〈 102화 〉 불을 먹는자(4)
* * *
나는 따뜻한 차와 냉수 중에서 냉수를 내밀며 말했다.
"영감님, 할 일 없어요?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거예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싸가지 없는 말투였다.
허나, 나는 멋대로 남의 집에 눌러앉은 노인에게까지 예의를 차릴 정도로 유교적인 청년이 아니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촌장은 냉수를 홀짝이며 툴툴거렸다.
"젊은 친구가 성격이 급하구려. 아직…."
"한스인지 뭔지 반납할테니까 이만 가보세요. 용건은 그게 전부잖아요."
나는 핑계를 늘어놓으려는 촌장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레베카에게 부탁한 작업은 끝났다.
묘한 재주가 있는 시어도어를 붙여뒀으니, 마을 청년에 불과한 이교도의 심문은 성공적이리라.
그러니, 지금 당장은 촌장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아직 그에게도 캐물을 것이 남아 있지만… 치매 걸린 노인네 마냥 자꾸 시시껄렁한 소리만 해대는 통에 시간 낭비였다.
일단 레베카가 알아낸 것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반지의 마법으로 나누는 밀담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게 빠르고 정확하다. 또한,
'우리 애들의 안전도 확보해야 하고.'
마족에 대한 처분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우선 사항을 착각하여 지켜야할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여차하면 발을 뺄 생각도 해야한다.
그런 내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섭섭하게 굴지 말게나. 늙으면 남는 게 시간이라네."
촌장은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냉수를 들이켰다.
나는 그의 느긋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이 노인네를 붙잡아둔 게 맞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굴로 들어가야한다.
달리 말하면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얻고자하는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촌장은 목적이 불분명해 보였다.
겉으로는 붙잡혀온 한스를 데리러 왔다고 말했으나… 그런 것치고는 한스의 신병을 돌려달라고 보채거나 확인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느긋하게 식사하며, 시덥잖은 대화나 시도하고, 거기에 차 대접까지 바랐다.
그는 마치 이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딱히 좋은 의도는 아니리란 직감이 든다.
'얼른 쫓아내는 게 좋겠지.'
어쩐지 서로의 입장이 반대가 된 기분이다.
나는 촌장의 묘한 태도를 의식하며 일부러 삐딱하게 말했다.
"저는 젊어서 바쁜데요. 영감님,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관이나 짜시죠."
"…뭐가 그리 급한가. 우린 아직 통성명도 나누지 않았네."
자존심 강한 노인이 악착같이 엉덩이를 붙이려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굳이? 피차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이유야 어찌됐든 마을 청년 하나를 불구로 만들었다.
지금 당장 이 마을을 떠나도 될 정도로 사이가 틀어진 상태지만, 촌장은 허허 웃으며 말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네. 서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모리안이라고 하네."
…댁 이름은 다른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뻔뻔하게 가명을 쓰는 촌장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구라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잘도 치네.'
이 세상에는 괴팍한 노인네가 많은 것 같다.
아니, 오래 살아온 만큼 어쩔 수 없이 성격이 뒤틀리는 게 당연할 걸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난쟁이 도플이며, 눈앞에 있는 모리안이며, 거기에…
'무려 천년 먹은….'
"그대여. 언제까지."
"아이고, 젊고 어여쁘신 마님 오셨습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아부를 시전했다.
갑자기 레베카가 거실 겸 부엌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찔릴만한 생각은 한 적이 없지만..
"어… 그래."
레베카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칭찬이니 기분 좋게 받아들인 듯 보였다. 후, 다행이다.
"족제비이…."
어디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베카의 치마자락에 바짝 붙어있는 바람꽃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항상 자신만만하던 꼬마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어떤 새끼가 우리 애 울렸냐.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바람꽃에게 여린 등을 토닥거렸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보기 안쓰럽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대가 쉰내나는 늙은이에게 어울려주는 사이 문제가 생겼단다."
레베카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노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문제의 원인이라고 짐작되는 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요즘 년놈들이 쌍으로 버르장머리가 없군. 나 젊을 적엔 상상도 못했는데, 크크…."
스스로를 '모리안'이라고 지칭한 촌장.
아니, 마을에서 '두목'이라고 불리는 노인이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
1212년 6월 XX일
드넓은 보리밭은 올해도 황금 같은 풍년을 맞이했다. 여신께서 보살펴주신 듯이 작년보다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넘쳐나는 보리는 그 절반을 술로 빗어도 남아돌 정도였다. 이 정도 수확이면 세금을 바치고도 식구들이 충분히 겨울을 날 수 있으리라.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1212년 11월 XX일
어째서일까. 작년보다 영지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났다.
분명 창고에는 밀과 보리가 수북하게 쌓였거늘. 모래알이 씹히는 죽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었다는 게 현실이다.
영주가 세금을 2할 더 올렸다. 거기에 이것저것 제하고 나니, 손에 남은 곡식은 작년보다도 적었다. 고단한 겨울이 끝나지 않는다.
1212년 12월 XX일
흉흉한 기운이 도는 영지에 경사가 생겼다. 영주의 외동딸이 중앙 귀족에게 시집간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영지에선 출세나 다름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영주가 막대한 혼수를 갖다 바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혼수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영주에게 밉보이면 징집 당할 수 있기에 그저 침묵해야 했다.
1212년 12월 XX일
영주를 고발하겠다는 용감한 이가 등장했다. 일찍이 아내를 여의고 홀몸으로 병든 딸을 키우고 있던 이웃 남자였다.
1212년 12월 XX일
이웃 남자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심하게 맞아서 죽었다. 그의 아픈 딸도 얼마 가지 못해서 굶어 죽을 것이다.
1213년 1월 XX일
영지 내에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 대부분 굶어 죽거나 야반도주를 하는 이들로 나뉘었다.
일손이 줄어들자, 영주는 더 포악해졌다. 이제 죽는 사람이 더 많다. 이대로 있어봐야 죽을 게 뻔하다. 일단 살고 봐야했다. 식구를 데리고 영지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여신님께서 굽어 살피시길 기도 드린다.
1213년 2월 XX일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앞날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다. 도망간 농노를 추적하는 사냥꾼이 걱정이고, 평생 배운 것 없이 소작만 해온 터라 경작할 토지 없이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 그런 고민마저도 성난 영주에게 붙잡히지 않아야 가능하다. 도망쳤다가 붙잡혀온 농노의 말로를 알고 있기에, 결코 붙잡혀 돌아가선 아니된다. 그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장소로 떠나야한다.
1213년 4월 XX일
간신히 도착한 장소에 낙원은 없었다. 척박한 대지에선 풀뿌리조차 캐기 힘들고, 온 사방에는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위협적인 괴물로 가득하다. 한낱 농노에 불과한 우리들에겐 북부의 환경은 너무나 가혹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했기에, 우리는 녹슨 낫이라도 들 수밖에 없었다. 보리이삭이 아닌 누군가의 목을 향할 것이다. 여신님께서 이해해주시길 기도한다.
1213년 10월 XX일
빼앗고 또 빼앗았다. 비로소 천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친 농노들을 모아 조금씩 세를 불려나갔다. 간혹 나를 토벌하러 온 자들이 있었으나 오히려 짓밟아 주었다. 이제 하늘 같던 영주도 두렵지 않다.
1239년 XX월 XX일
너무 자만해서 일까. 마른 하늘에 천벌이 내렸다.
그것은 검 한자루만 덜렁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그를 보며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러자, 설산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눈을 깜빡하자, 백 명의 동료들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기사라는 족속이 우리와 같은 인종이 아님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메뚜기 떼처럼 흩어져서 도망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239년 XX월 XX일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천직은 무슨. 농노는 농노답게 밭이나 일구며 살아야한다. 이번에는 조용히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혹한의 대지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독하게 추웠으며, 아무것도 없었다.
패잔병처럼 살아남은 동료들이 하루가 다르게 죽어나갔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들에 의해서….
1239년 XX월 XX일
싸늘하게 식어간 동료들을 묻을 구덩이를 팠다. 문득, 화장조차 해줄 수 없는 현실이 서글퍼 졌다.
1239년 XX년 XX일
오랜만에 기도했다. 제발 그 누구라도 좋으니,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온기를 나눠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도망친 농노를 돕지 않는다. 자애로운 여신도 하찮은 농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태어난 나라와 무능한 신을 버리고 증오하기로 했다.
1239년 XX년 XX일
우리는 새로운 신을 찾았다.
이제 더이상 추위에 떨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을 태워서라도….
**
집이 무너져라 들려오는 소음에,
실실 쪼개는 모리안을 가차없이 무력화 시킨 뒤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고."
안 쓰던 사투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반쯤 무너지다시피한 현관 너머로 그 광경이 펼쳐졌다.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짙은 쇠냄새가 났다.
검, 창, 도끼, 낫… 내가 알고 모르는 쇠붙이란 쇠붙이가 죄다 이 곳에 모여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
지척에 깔린 무수한 인간들.
족히 수 백명은 되어 보인다. 이게 다 어디 숨어있었나 싶을 정도로 숨 막히는 물량이었다.
어떻게 이 정도 인원이 소리소문도 없이 모였지.
굳이 레베카가 아니더라도 눈치챌 수 밖에 없는 인기척일텐데.
"어이, 형씨! 또 보게 되니 반갑네?"
그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브루노 스피드왜건과 아침에 찾아온 중년 남자들. 설마 저들이 이 무리를 모아온 걸까?
'…수틀리면 몰려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고작 해봐야 7명인, 그 중의 넷은 어린애들인 우리 일행을 습격한다기에는 황당할 정도로 과한 인원이 아닌가?
여러모로 따지고 싶은 기분이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나는 내 바지 자락을 꼭 붙잡은 채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음, 조금 무거워 졌나?
"날씨가 좀 춥네. 답답해도 이해해줘."
"…응."
바람꽃은 내 어깨에 코를 파묻었다.
안정을 찾으려는 듯 데운 숨결을 몰아쉰다.
나는 한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나오지 말라니까.'
다수의 인간에게 습격받은 트라우마가 있는 녀석에겐 그다지 좋지 않은 광경일텐데…. 기어코 따라나선 수인족 꼬마의 고집에서 강박을 느꼈다.마치 보내선 안된다는 것처럼. 비슷한 경험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두목, 꼴이 보기 좋습니다. 협상은 쫑입니까?"
"오냐… 근데, 시작도 못했다. 이 성질이 급한 년놈들과, 굼벵이처럼 느려터진 네 놈 탓에!"
"크크, 우리 애들이 빠진 걸 어쩝니까."
내가 바람꽃을 달래는 사이에,모리안과 브루노가 제멋대로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모리안이 기다린 게 저들인 모양이다.
뭔가 믿고 있는 게 있긴 했네.
그 예상 밖의 숫자가 놀랍긴 하지만, 동시에 '어, 이 정도면 무난하네.'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영감님, 이거 잘못됐다고 생각 안해요? 기회를 드릴게요. 쟤들 돌려보내시죠. 살 날 얼마 안 남은 노인네 따라 죽는 사람들은 무슨 죄예요?"
"허허, 고 놈의 주둥아리는 예의범절이 기가 막히구먼. 나중에 돼지밥을 실컷 먹여주겠네. 사양하지 말게. 성가신 박쥐를 치워줬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해줘야지."
역시 흡혈귀의 존재는 알고 있었네.
그 놈을 해치운 게 우리인 걸 알고도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레베카가 보장했다. 분명 모리안은 덩치만 큰 인간이었다.
나는 조만간 마을 하나가 잿더미로 변할 것이 안타까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흠, 생각보다 뒤가 없는 놈들이구나."
레베카가 살짝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인다.
그녀답지 않은 기색에, 나 또한 레베카가 바라보는 곳을 살폈다.
화르륵.
대낮부터 횃불을 들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희뿌연 액체를 온 사방에 흩뿌리는 이들이 보였다.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킁, 기름 냄새 나."
바람꽃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 의미를 깨닫고 뒤늦게 아연실색 했다.
공기 중에 메스꺼운 냄새가 묻어났다.
이건, 한 두군데가 아니다. 설마 이 주변 전체에 기름을 먹인 건가.
"영감탱이, 미쳤어? 다같이 타 죽으려는 거야?"
"흐흐. 왜 아니겠나."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레베카조차 집단 분신자살의 현장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소녀 또한 인간의 악의를 피하듯이 내 품 속을 파고든다.
나는 실실 웃는 모리안을 발로 걷어차며 윽박 질렀다.
"니들 도적이라며. 뭐가 필요하길래 목숨 가지고 장난질이야!"
"한스에게 들었는가. 흠, 하긴 기름이 목숨만큼 귀하긴 하지. 비록 공물이긴 하나, 조금 속이 쓰리구먼."
임플란트가 시급해 보이는 모리안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영문 모를 개소리였다.
"평범한 인간이 자네와 같은 괴물을 잡는 방법이 뭔지 알고 있나?"
"염병. 난 일반인, 아니, 개소리 집어치우고, 저 새끼들부터 말려. 단체로 통구이…."
"불은 신이라네."
그 말이 점화 신호였는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