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불을 먹는자(5)
* * *
음식을 익혀먹고, 금속을 제련하고, 추위를 이겨내는 등.
불의 발견은 인류의 번영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로 인간에게 있어서 불이란 더없이 친숙하다.
허나, 그 유용함에 기대어 살다보면 잊어버리곤 한다.
불은 인류의 번영과,
멸망 또한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의 신을 목도하라."
노인의 광기어린 목소리를 기점으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활활 피어오르는 불꽃은 가히 탐욕스러웠다.
기름이며, 마른 짚이며, 판자며, 인간이며… 제 앞길에 놓인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몸집을 부풀린다.
세상이 삽시간에 불길로 뒤덮힌다.
그 광경은 감히 신, 혹은 재앙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신이 불러온 재앙이긴 하네. 병신이지만.'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강렬한 열기와 빛 때문에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나름 주방을 드나들면서 뜨거운 것에 이골이 난 편이지만…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던져진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나마 다행히인 것은.
"과연, 평범한 불은 아닌 모양이구나. 허나 어림없다."
불길은 일정거리에 도달할 때마다 허무하게 흩어졌다.
제아무리 위협적인 불꽃이라도, 결국 드래곤이 전심전력으로 만들어낸 결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니 침칙하자.
레베카가 곁에 있는 이상 우리는 안전함 그 자체다.
"람람아 캠프파이어 같은 거야. 쫄지마."
"…흐, 흥! 북부의 위대한 늑대에게 불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거든~?"
라고, 겁 먹은 포메라니안처럼 바짝 얼어있는 댕댕이가 말하십니다.
그래도 겁 먹은 것보다 쎈 척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 그대로 기를 살려주기로 했다.
"이야, 내가 몰라뵀네. 우리 람람이 용감해."
"우, 우리 람람이 아니거든?! …이 바보 족제비이."
얌마, 그러는 나도 족제비 아니거든?
나는 불안해 보이는 바람꽃을 안심시킨 뒤.
가늘게 뜬 눈으로 넘실거리는 불꽃 너머를 들여다 봤다.
불길 속에서.
수 백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춤사위 같기도 한 그들의 몸부림에,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기름을 잡아먹은 불의 온도는 700°C 가량 오른다고 한다.
평범한 인간이 견딜만한 온도가 아니다.
'불에 타 죽는 고통이 제일 최악이라던데.'
손가락이 조금만 데여도 더럽게 쓰라린 게 화상이다.
하물며 전신의 피부를 그을려가며, 내부 장기까지 천천히 익어가는 고통이란 대체….
상상만으로 소름이 끼친다.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소사(?死)한 대부분이 극심한 고통에 수 십초도 견디지 못해 쇼크사한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닐테니.
'미치광이들.'
그런 끔찍한 지옥 속으로.
수 백명의 인간이 제 발로 뛰어 들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광기다.
그런데,
[…….]
어째서인지 어떠한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화염이 무언가를 자글자글 씹어먹는 소음만이 주변을 메운다.
내가 그 기이함에 의문을 품을 때.
레베카가 일렁이는 불꽃 속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어리석은 자들에게도 계획은 있다 이건가. 부디 그럴싸한 계획이었으면 좋겠구나."
"시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구먼."
모리안이 기분 나쁜 조소를 흘리며 끼어든다.
"흐흐, 요망한 계집 같으니. 마법사였군? 어째서 이런 촌구석에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 반드시 네 년은 잡아다가…."
…이 새끼가?
한참 어르신인 우리 눈나가 말씀하시는데 말이야.
끽해봐야 60대인 젊은 양반이 말대꾸?
그리고, 순진한 어린애가 여기 있는데 못하는 말이 없네.
이 시대의 유교 청년으로서 예절범절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거 노인이랑 애 앞에서 입조심하십다."
"네, 네노므, 가라머어즈마…."
아구창에 신발을 문 모리안이 부들부들 이를 갈았다.
그러게 주둥아리는 잘 간수하셨어야지.
'늙어빠진 노친네가 어디서 껄떡대고 지랄이야.'
내가 살심 섞인 예의범절을 주입하고 있을 때.
레베카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음, 그대여.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단다."
"네? 뭔가요. 지금 좀 바쁜데."
"과연, 그대가 언급한 노인은 누구니?"
"……."
…아, 나도 입조심 좀 해야하는데.
그렇게 심대한 위기에 놓인 순간.
나를 구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레베카가 말한 놈들의 '계획'이었다.
오오오.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넘실거리는 화염 속에서.
오오오.
서로의 손을 부여잡은 수 백의 남녀가 있었다.
옷은 불에 타버린 모양인지 그들 모두 헐벗은 나신이었고, 한스와 같은 흉물스러운 문신을 새긴 것이 눈에 띄였다.
'어떻게 저 속에서 살아있지?'
평범한 인간이 아닌건가.
아니면, 저 불꽃이 정말로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걸까.
영문 모를 상황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시간과 정보가 아직 모자랐다.
화르륵.
주춤하던 불길이 재차 우리를 향해 기어온다.
스멀스멀 거리를 재며 탐색하는 모습은, 어쩐지 의지를 지니고 있는 뱀처럼 교활해 보였다.
"흐음."
레베카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몸을 길게 늘인 불의 뱀이 그녀의 결계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결계가 아무리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숨을 쉬기 위한 산소와 일정한 양의 열까진 막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걸 노린건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어느덧 불꽃이 레베카의 결계를 뒤덮은 모양새가 되었다.
…숨이 턱 막힌다.
공기가 점점 달아오른다. 한겨울에 땀이 비오듯이 내리기 시작한다.
'후우, 불가마가 따로 없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후끈한 열기를 피해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어라, 레베카. 말 그대로 온실 속 화초네요?"
"이 상황에서 아부 떠는 거니? 그런다고 봐주진 않을 거란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너무 속보이는 드립이었나.
"아닌데요. 우리 람람이 말한 건데? 그치?"
"뭐라는 거야. 족제비, 머리 아파?"
사람이 기껏 칭찬해줬더니….
씩씩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다.
"레베카, 이거 끌 순 없어요? 이러다가 통구이가 아니라 찜이 될 거 같은데."
나는 바람꽃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찍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먼치킨 드래곤께서 보우하시니 만사 오케이라는 심정으로.
"으음, 조금 난감하구나."
그런데, 어째서인지 레베카가 드물게 난색을 표했다.
"엥?"
"그게, 물을 다루는 마법은 기초만 알고 있어서…."
용마망께서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신다.
에이, 농담이겠지?
나는 안정자산이 떡락할 거란 헛소문을 접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라…?'
진짜네. 이게 왜 진짜지?
놀랍게도, 레베카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 그대여. 이건 내가 무능한 게 아니란다. 이 정도 화력이면 파란 녀석들이라도 데려와야…."
불에 내성이 강한 그녀는 몰라도.
나머지는 정말로 찜이 되게 생겼다.
**
어린애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다.
하물며 본능이 발달한 수인족은 감각이 예민하기까지 하다.
바람꽃이 사태가 여유롭지 않음을 눈치깠다.
"피, 피터! 우리 괜찮은 거야? 이거 큰일난 거지? 나 찜 되는 거야?! 그런 거 싫어…."
품 속에 안아 든 녀석이 어쩔 줄 몰라했다.
별명이 아닌 내 이름을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긴 많이 놀란 모양이다.
'뭐, 화재가 발생했는데 침착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오븐구이가 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일단 공황 상태인 예비 아기늑대찜구이를 진정시키고자, 나는 여유로움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찜보다는 국물 있는 요리가 좋아."
"……."
시덥잖은 개드립을 쳤음에도.
나를 쳐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는 여전히 불안과 근심이 가득했다.
북부의 위대한 늑대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
나는 한결 진지한 얼굴로 곤란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좀 큰일이야."
"으응. 우리 어떡해…."
항상 자신만만하게 솟았던 강아지귀가 축 쳐진다.
그 모습은 눈앞에서 간식 뺏긴 댕댕이보다 처량해보였다.
나는 앳된 얼굴에 그늘이 더 짙어지기 전에 덧붙였다.
"슬슬 팔이 저려. 생각보다 무겁네?"
"……응?"
난데 없는 소리에.
바람꽃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갈고리를 띄운다.
그러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더니.
"……?!"
쫑긋! 하고 귀를 바로 세웠다.
이윽고, 화난 포메라니안처럼 이를 드러내며 아르릉거린다.
"너, 너, 너 주글래? 나 안 무겁거든!? 이거 놔 바!!"
역시 눈치가 비상하다.
나는 발버둥치는 바람꽃을 부등부등 달랬다.
"람람아 진정해. 아무도 너라고는 안 했어."
"이 씨, 내가 바보멍청이땅콩인 줄 알아?! 족제비, 이거 놔! 콱 물어버릴거야!"
…얌마, 우리 데이지한테 왜 그래?
아무튼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물론 나중에 물리지 않는다면.
"일단 이 불을 끄는 건 힘들단 거죠?"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물었다.
그러자, 레베카가 미드직한 가슴이 쭉 내밀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러하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누구니? 다른 수단이…"
"크크, 애송이들아. 쓸데없는 발악이다. 우리의 신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신발은 어떻게 뱉은거야?
다 늙은 노인네가 근성 하나 끝내준다.
"신은 무슨, 얼어죽을 신이야. 병신이겠지."
성가시게 구는 모리안을 아예 땅에 파묻어 버렸다.
우리 눈나는 물이 서툰 대신에 땅을 파는 데는 도가 텄다.
"이게 무슨…."
"영감님, 이제 정신이 들어요?"
이거 그립구만.
본의 아니게 디그다 시즌 2를 찍게 되었다. 그 때 그 놈은 살아 남았으려나.
"지, 지금이라도 항복하게!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인간의 발버둥 따윈 무의미할 뿐이야."
땅바닥에 쳐박혀 얼굴만 나온 주제에 근엄한 척한다.
동네 개구쟁이 마냥 불장난이나 치는 영감님 아니랄까봐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나는 시끄러운 입에 다시 신발을 물려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인간이 아니면 괜찮겠네."
"무흐 허소히흘."
내 중얼거림에 모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기야 그는 모를 것이다.
감히 신에게 대적할만한 권능과 자격을 지닌 존재가 여기 있음을.
레베카는 제 말을 끊어버린 노인을 불쾌하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쯧, 얼마 남지 않은 명줄을 재촉하는 자로다. 이 자를 어찌할 셈이니?"
"일단 살려만 두죠. 나머지는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어차피 지금 당장 불을 끌 수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찜질방 왔다고 생각해야지.
그나저나 자고 있는 애들이 걱정이다.
땀띠라도 나면 큰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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