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05화 (105/117)

〈 105화 〉 불을 먹는자(7)

* * *

'착각인가?'

아니, 다시 살펴봐도 자리 잡은 붉은색은 그대로였다.

나는 이게 무슨 의미를 뜻하는 지 몰라서 일단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아…!"

"흠, 이거 신통하군요."

그래도 레베카의 탄성과, 시어도어의 이채 어린 반응을 보며 긍정적인 일이라고 짐작했다.

레일라에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니면 다행이다.

나는 안도하고, 눈앞에서 소리 없이 잘도 재잘거리는 아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모습에 묘한 시기감이 들었다.

어쩐지 저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던 것 같다.

­그림이에요! 그림!

그 아기자기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예능에서 나올법한 미니게임을 맞추는 기분이어서 그랬다.

­우웅, 집중!

앳된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해 보였다.

정말로 그 때처럼. 이 아이가 내게 전하고자 싶은 말이 있나보다.

'연옥에서처럼.'

"미안. 집중할게."

­한번만 봐줄게요!

그리 말하듯.금방 화를 푸는 모습에서, 아량 넓은 대인배의 소양이 느꼈다. 키는 작지만.

나는 초롱초롱 빛나는 루비색 눈동자를 보며 묘한 확신이 들었다.

역시 이 아이는 특별하다.

단순히 그녀의 위대한 태생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일라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듯했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 사태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직감한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뒤, 한껏 기대하며 물었다.

"그림. 그러니까, 그게 중요하다는 거지?"

­네에! 맛있었어요!

…음, 아닌가?

**

『누구나 가슴 속에 작은 비밀을 품고 있어.

그래, 비밀이야말로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이야!』

'…마법.'

귀퉁이가 찢어진 낡은 동화책에 쓰여진 첫 문장.

눈을 감는 것만으로, 그대로 찍어낸 것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릴 수 있다.

무척 편리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각한다.

이건 아마도 '저주'라고.

­사락.

그럼에도 내용을 알고 있는 낡은 동화책을 펼치는 이유는,

그냥이다.

말 그대로 그냥.

그녀가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사락.

언제나처럼,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긴다.

백색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루라고 정의하는 86400 중에서 221초가 느슨하게 지나간다.

­사락.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단편적이다.

좋게 말해서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수선했다. 솔직히 내용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간 망토를 쓴 어린아이가 집 밖을 나왔다가 나쁜 늑대에게 고초를 겪는 이야기. 개구리가 죽은 엄마의 무덤 앞에서 후회하는 이야기.

대부분 어린아이를 겁주고, 어른의 말에 순종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많다. 하지만 동화책이 쓰인 은밀한 의도를 읽어낼 지성이 있었다. 재능의 영역은 아닌,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인지를 타고난 존재다.

­사락.

(흥. 위대하다고 뻗대더니. 배움이 없으니 미개한 도마뱀에 불과하군. 교육시킬 필요가 있겠어.)

이 동화책을 던져준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짜고짜 실험이니, 복종이니 하며 귀찮게 구는 인간이었다. 젊고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오만?

응, 그렇게 보였다.

그래도 엄청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덕분에 오만이라는 단어와 동화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또, '비밀'을 배웠으니까.

­사락.

그나마 이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작은 아이가 부모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덕분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모험을 좋아한다는 것을.

­털썩!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침대 위에 엎드려 발장구를 구르며 상상해본다.

'아빠?'

으응, 잘 모르겠어.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큰 맘 먹고 찾아보려고 해도, 희미한 실조차도 느껴지지 못했다.어쩌면 그녀에게 아빠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키는? 눈 색깔은? 동화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정할까?'

상상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우울과 지루함을 잊을 수 있으니까.

우울과 지루함. 이곳에서 배운 최초의 감정.

그리고 그런 어두운 감정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

'…엄마.'

그 사람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아빠와 다르게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녀가 먼저 만나보려고 찾아갔음에도 만나주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걸까? 왜 울고만 있어요?'

……잘 모르겠어.

이해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철컥.

[나와라. 괴물.]

철창 너머, 어느덧 눈가에 주름이 생긴 남자가 말했다.

지난 날 오만하지만 맑았던 남자의 두 눈은 까닭 모를 두려움과 질투심으로 흐려져 있었다.

왜 무서워하는 걸까?

왜 부러워 하지?

오히려.

[반항하지마라. 네 손 같은 건 잘라버려도 우리 일에 지장은 없다.]

손이 없으면,

책장을 넘길 수 없으면 슬플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가 말하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았다.

­서걱, 서걱.

뾰족한 금속이 살 속을 헤집는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평생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꿈틀.

차가운 액체가 스멀스멀 기어오는 감촉은 섬뜩하다.

오늘은 511초. 몸 속에 들어오는 액체의 양은 점점 늘어난다.

'…졸려.'

인고의 끝에, 겨우 무거운 잠이 쏟아져 내린다.

쇠와 벽으로 이뤄진 그녀의 회백색 세계가 어지럽게 접혀 들어간다.

­뚝.

그렇게 86400초는 허무하게 끝이 난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221초 남짓한 동화책에 쓰여진 이야기보다도 재미없고 단조로웠다.

­째깍.

그와 동시에, 멈춰있던 시계가 이제 막 초침을 달린다.

'여기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안개가 낀 세계에서 홀로 눈을 뜬 아이는 속삭였다.

【제 취미는 산책하고 모험을 하는 거예요.

쉿,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이건 비밀이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어… 맛있었어?"

­네에!

레일라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보고 있는 사람까지 행복해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런 해맑은 미소였다.

그래…!

우리 애가 맛있었다니 잘된 거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영문을 모르겠다.

얘가 자다가 먹는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뭐, 그것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그런 종류의 뭉실뭉실한 이야기는 아니길 바라며 되물었다.

"잘 됐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알려줄 수 있겠니?"

­네에. 아빠.

조그마한 게 꾸벅하고 고개를 숙인다.

…남들이 딸바보가 되는 이유는 알 것 같다. 쾌락 없는 책임이라…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오히려ㅡ

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

"무슨 일이니? 설마 우리 아가한테 좋지 않은 일이…."

애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뜨끔한 나는 레베카의 눈을 피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뭐랄까. 뭔가, 맛있는? 그런 그림이 있다고 하네요."

"맛있는 그림…?"

통역을 전해들은 용마망이 고운 미간이 모으며 중얼거렸다.

소중한 딸랑구가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먹었다고 하니 신경이 쓰이나보다.

"아아, 그 머리카락… 섭취. 그렇군. 이 정도 불꽃을 만들어내는 기물이라면 가능할지도…. 그런데, 그걸 어떻게…."

문득, 연금술사는 초승달처럼 휜 눈으로 음미하듯 중얼거렸다.

"흐흐, 제가 모르는 비밀이 아직 남아 있었군요. 용케도."

루나틱(lunatic).

미치광이의 푸르스름한 눈빛이 아이의 작은 몸을 샅샅이 훑으려 든다.

"그만."

그 노골적인 시선은 레일라에게 닿지 않는다.

제 딸을 보호하고자 앞에 선 어미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눈깔 치워. 짓이겨버리기 전에."

"……."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번만 더 그딴 눈깔을 내비친다면."

"……시, 실례했습니다."

시어도어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바들바들 떠는 그는 도중에 끊긴 레베카의 말에 이어질 문장을 떠올릴 엄두조차 하지 못했다.

'쯧쯧.'

혼이 나가버린 시어도어를 흘끔 봤다.

아무리 정신 나갔어도 건드리면 안될 것 정도는 구분해야한다. 아니, 저만한 반응을 보일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가.

나는 레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맛있는 그림, 그게 어디 있는지 알아?"

­O!

세상 해맑은 둥그라미가 떠올랐다.

**

과거에게는 모리안, 한 때는 두목, 때로는 촌장.

그리고 언젠가 만인에게 제사장이라고 불려질 노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빌어먹을 것들…!"

당장 도끼로 그 년놈들의 머리통을 깨버리고 싶었다.

허나, 땅에 묻혀 얼굴만 간신히 내밀고 있는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시간 또한 많지 않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신께서, 불꽃께서 갑자기 미쳐 날뛰기 직전이다.

그 분이 호소하는 굶주림은 처음 영접했을 당시보다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노인은 그 분이 속삭이는 공복은 익숙하다.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불꽃은 만족하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왕래가 줄어드는 겨울철이라 배불리 먹일 수 없으나, 그동안 먹여온 것이 있기에 이토록 굶주림에 허덕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신은 지고의 미식가다.

최고의 식사를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과 자비를 가지셨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단순한 굶주림이 아니다.

숱하게 되내이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것은 맹렬한 감정은,

­죽인다, 태워, 죽인다, 심장을, 태운다, 창자를, 태운다, 피부를, 그슬린다, 뼛가루, 재, 까맣게, 새까맣게 태워, 태워죽인다…

마치, 굶주려 가며 아껴온 마지막 한점의 고기를 누군가에게 강탈당하는 것처럼 지독하게 표독스러웠다.

이건 분노다.

미쳐버릴, 모든 것을 태워버릴 증오다.

"외부인, 무슨 짓을 벌인거냐…!"

꼼짝달싹할 수 없는 노인은 이를 달그락 떨어댔다.

분노에 눈이 먼 그들의 신이 신도마저 잡아먹을 지도 모른다.

신의 자비란 언제나 변덕스럽기에, 일렁이는 불꽃은 막연한 두려움이 되어 다가왔다.

**

­저어기, 있어요.

앙증맞은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은, 불의 장벽 그 너머.

…통구이가 되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건가?

물론 그럴 리가 없을테니, 레일라가 말한 '그림'은 말 그대로 바깥에 있다는 소리였다.

'기물이라고 했지?'

연금술사의 예상이 맞다면, 그녀가 발견한 그림이 그 유력한 후보였다.

어떻게 얘가 그걸 알고 있는 지 궁금하지만.

그 부분은 이 사태를 종식시키고 난 뒤에 알아봐도 늦지 않으리라.

결국 문제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

'여기서 빠져나가야한다.'

불을 끄기 위해서 불 속을 지나가야 한다니….

뭔가 서순이 잘못된 것 같다만 어쩔 수 있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갈 수 있다면 그 외에 장애물은 딱히 없다는 점.

저 불꽃의 장벽을 이루는 막대한 인원으로 인해 마을 내부는 텅텅 비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은 건 저길 빠져나갈 방법인가."

"아,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불길이 닿지 않는 상공이라면 손쉽게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시어도어가 묘수랍시고, 한 때 유행하던 새날리기 게임을 제안하고 자빠졌다.

게임과 다른 게 있다면…

"설사 팔다리 정도는 부러지더라도 움직일 수 있지요."

바로 사람을 포탄으로 날린다는 점.

미친 놈 아니랄까봐 정신 나간 제안을 한다.

그러나, 직관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이 설득력이 아예 없진 않았다.오히려 충격을 대비해 솜이불을 잔뜩 싸매고 던져진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그림이 제법 그럴싸하다.

'문제는 그걸 여기서 누가 하느냔데.'

레베카에게 맡기면 그럴 수고조차 필요하지 않다.

허나, 불길을 막아내느라 바쁜 그녀를 밖으로 돌릴 수 없는 노릇이다.

데이지와 바람꽃은 논외다. 애들은 절대로 보낼 수 없다.

고작 열살 언저리인 꼬맹이들에게 심부름 맡기는 기분으로 시킬만한 일이 아니다. 너무 위험한데다가, 예상치 못한 게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시어도어는?

이건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인간이라서 믿을만한 종자가 아니다. 되려 무슨 말썽을 부릴 지 모른다.

'그나마 자위 수단이 있고, 목적 의식까지 뚜렷한 자.'

소거법으로 자연스럽게 한 사람만 남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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