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불을 먹는자(8)
* * *
정말로 괜찮겠니?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꽁꽁 싸맨 탓에, 레베카가 통신마법으로 말을 걸었다.
답답하고, 더워서 죽을 거 같지만.
그것만 빼면 의외로 괜찮다. 나는 쾌할한 어조로 대꾸했다.
물론이죠. 오우거가 와서 밟아도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전 레베카를 믿어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의 아공간은 대단한 보물도 많았지만, 그 외에 잡다한 것도 두루두루 있었다. 그 중에는 황금 양털이나 스펀지 같은 희귀 식물의 줄기도 대거 포함됐다. 그 덕분에 솜이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충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가끔, 그대는 비겁한 구석이 있단다.
면목이 없네요.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만약 걔들이 내가 이러는 줄 알면 난리칠 게 뻔하다.
뭐, 시크한 바람꽃이야 '너네 피터, 하늘로 날아갔대~' 하고 짖고 넘어갈 지도 모르지만.
나를 유독 잘 따르는 데이지라면….
'음. 모르는 게 약이지.'
어차피 잠깐 동네 마실 나가는 것 뿐이다.
이런 일로 꼬맹이들에게 걱정 끼치는 건 너무 사치스럽다.
뺀질이 그 놈은 시킨 거 안하고, 허튼 수작 부리면 조져 버리세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간단하게 전할 말을 끝마쳤다.
하아.
시야가 캄캄했음에도, 레베카가 이마를 짚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어째 사고만 치고 싸돌아다니는 장남이 된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자신 있다니까요?
정말이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서 더 어이가 없구나.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레베카의 말대로 내 정신은 지극히 평온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정말로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군대에서 경험한 건데, 인간은 은근히 튼튼하다.
배그하면서 낙하산도 숱하게 타봤다. 골드1 정도면 낙뎀 정도는 가볍게 씹을 수 있다.딴 생각 못하도록 아무 말이라도 막 떠올려 본다.
다시 생각해보렴. 차라리 내가 현신하는 편이….
내 선택에도, 레베카의 제안에도 어떠한 대가가 따른다.
내게 닥칠 위험성은 직관적이다.
반대로 그녀가 숨기고 있는 고민은 막연하다.
나는 내 안의 저울추에 달아본다.
그 중 어느 쪽이 더 가벼운 지에 대해서.
이번에는,
사양하지 말고 힘껏 던지세요.
내가 치뤄야할 몫이다.
더이상 그녀가 무엇도 희생하지 않기를 바란 대가이므로.
괜히 살살 던졌다가 머리카락을 태우면 원망할 거예요.
만약, 몸이 성치 않으면… 나중에 크게 혼날 줄 알아. 알겠니? 명심하렴!
무사히 돌아와라,
라는 간단한 말을 어렵게도 한다.
'가끔 서툰 점이….'
다행이다. 레베카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이 상황에 실실 웃었다가는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할테니까.
하아, 그대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마음 고생을 하는구나.
고마워요 레베카. 잘 부탁해요. 만약 이 싸움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떽! 이 화상이 아직 장난 칠 여유가 있나보구나?
아, 잠만.
마음의 준비가.
오냐. 소원대로 보내주마!
두둥실하고.
전신이 붕 뜨는 감각.
부유한다.
인간은 날 수 있다.
**
고치에서 우화하는 나비처럼.
찔러넣은 단검으로 완충제를 해체했다.
숨막히는 열기 대신에, 차가워서 기분 좋은 공기가 피부에 스쳤다.
"이게 되네…."
불시착 하는 우주선 코스프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다신 하고 싶지 않은 아찔한 체험이었다.
'…조금 흘렸나.'
실로 아슬아슬했다. 땀을 왕창 흘린 것이 신의 한수다.
만약 체내에 수분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영 찝찝한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역시 화장실은 제때제때 가야한다.
"아이고, 삭신이야."
습관성 곡소리가 나오지만 팔다리는 멀쩡했다.
허리가 조금 쑤시는 것 외에 운신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 기적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고비는 잘 넘겼다.
'운이 좋군.'
나는 경직된 몸을 풀며 주변을 살폈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내려앉은 천장과, 부서진 건물 잔해로 엉망진창이 된 집안이 보였다.
보아하니 민가 쪽에 떨어진 모양이다.
맨땅에 추락하지 않은 덕분에 이만큼 무사한 걸지도 모르겠다. 레베카가 신경 써줘서 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건물 밖으로 이동하면서 현재 상황을 본부에 알렸다.
후욱, 여기서 족제비. 부상 전무. 무사히 착륙했다고 알림.
다치지 않았다니 천만다행이구나.
레베카가 기다렸다듯이 대꾸했다.
휴우, 아까 던질 때 손이 미끄러져서 아차 싶었는데.
…….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수명이 대폭 감소한 기분이다.
어쨌거나 가장 위험한 탈출은 성공적이다.
허나,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다.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
혼자서 해내야 하는 만큼 집중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프로페셔널한 요원이 되어야한다.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안내해주세요.
음, 일단 마을의 중앙으로 이동하거라.
라져.
그대여….
문득, 울먹이는 듯한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휴, 하여간 과보호가 심하다니까.'
어째 잔걱정이 많은 누나가 하나 생긴 기분이다.
그래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해져서 귀찮다기 보다는 애틋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확인….
나는 언젠가 써먹으려고 아껴둔 멋진 대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투가 왜 그 모양이 됐니? 떨어질 때 머리를 다치기라도 한거니?!
…….
때론 상냥한 배려가 비수처럼 날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되도 안되는 요원 흉내를 집어치우고.
서둘러 뜀박질한 나는 광장으로 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후우, 후우."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며,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재를 보았다.
더이상 주변의 공기가 차갑지 않았다.
여기서도 보이는 검붉은 불길이 한층 더 거세진 것 같다.
다 왔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너무 부담가지지 마렴. 여차하면 자력으로 빠져 나갈 수 있으니.
레베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달콤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굴뚝이 나 있는 건물을 찾으렴.
레베카는 레일라에게 들은 정보를 중개해줬다.
모녀의 도움으로, 새까만 굴뚝이 인상적인 집 한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름한 목조 건물이 즐비한 이 마을에서.
그 굴뚝집만은 유일하다시피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요정의 자장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 마을에 들어온 첫날에, 촌장 그 노친네가 추천한 식당과 동일했다.
회색 벽돌로 이뤄진 네모난 건물.
이런 변두리 시골 마을에 있는 식당치곤 너무 번듯하고, 튼튼해 보였다.
'마치 금고처럼.'
도적 놈들이 제딴에는 안전하게 보관해둔 모양이다.
식당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잘 드는 단검 앞에서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인기척은… 없나.'
예상한 대로 빈집털이였다.
사실 두셋 정도는 있을 거 같아서 경계했지만, 일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수월하게 풀렸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묘하게 향신료 냄새가 나는 넓은 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 탄내도 약간 나는 걸 보아하니 이 곳이 주방인 듯했다.
도착했어요.
굴뚝이 이어진 곳을 살펴보거라.
'유독 어두워.'
나는 손에 든 램프로 캄캄한 주변을 비췄다.
말이 부엌이지 주방기구는 거의 없었다.
내가 있던 집과 마찬가지로, 화덕만 있는 살풍경한 풍경이다.
'역시 겉치레만 식당이네.'
나는 혀를 찬 뒤, 화덕 주변을 불쏘시개로 쑤셨다.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주의해야 한다.
허나, 한참을 뒤져봐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머리까지 밀어서 살펴 봤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수북한 잿더미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손에 묻어나는 검댕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옅다.
굴뚝 위 쪽을 덕지덕지 만졌음에도, 손이 지저분해지지 않았다.
최근에 청소했거나 사용이 드물다는 반증이다.그러나, 그런 것에 비해 쌓여있는 재의 양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
'위가 아니야.'
아래다.
잿더미 속을 찔러 넣는다.
움푹, 파이는 부분에 길다란 나뭇가지가 끝도 없이 들어갔다. 마치 유사(??)처럼 게걸스럽게.
그것은 꾸역꾸역 재를 삼킨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덩이?"
아니, 그에 한없이 가깝지만 조금 다르다.
블랙홀처럼 새까만 점처럼 보이지만, 시선을 조금만 떼면 누렇게 바랜 여백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레일라의 말대로다.
이건 그림이다.
생생하기 짝이 없는 구멍을 그려낸 그림이었다.
'이딴 게 성물이라고?'
뭔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느낌이 상당했다.
레베카, 이거 맞아요?
맞을 게다. 성물이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란다. 그저 낡고 특이한 물건에 불과하지.
레베카가 보증했으니, 행동은 하나 뿐이다.
나는 지체 없이 흡혈귀의 잔해가 담긴 병을 꺼내 들었다.
'…이것도 일종의 부관참시인가?'
음, 좋은 일에 쓰일테니 지옥에 있는 보르네오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걸로 끝이겠지?"
아차…. 이딴 대사는 좋지 않다.
'해치웠나?' 급으로 위험하다. 다 쓰러뜨린 적이 부활하는, 진부한 위기가 닥치는 클리셰 따윈 사양하고 싶다.
"……."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게 낫다.
묵묵히 일하는 남자가 멋진 법이니까.
뽁.
병의 마개를 열었다.
이대로 쏟아버리기만 하면ㅡ
《멈, 춰라… 살덩어리…!》
아, 지랄.
《천한 도둑질에, 여를 능멸하려 들기까지….》
중성적이면서도 위압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 출처는 안 봐도 뻔하다. 저 기이한 그림, 정확히는 그곳에 깃들어 있는 초월적인 무언가.
가끔 농담처럼 언급되곤 하는 이름.
《영겁의 불꽃 속에서 네 놈의 영혼이 바스라질 때까지 구워 주겠노라.》
'신…!'
막상 겪게 된 그 이름의 무게는 아득했다.
레베카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압박감이었다.
견적이 바로 나온다.
감히 내가 비벼볼 사이즈가 아니다.
'좆됐네.'
자칫하면, 정말로 뼈도 추스리지 못하게 생겼다.
하지만 벌써부터 포기하긴 이르다.
여기까지는 상정한 범위에 속한다.
나는 가지고 있는 병을 모조리 꺼냈다.
그러고는,
쏴아아.
내 머리 위에 뒤집어 썼다.
마치 휘발유를 몸에 붓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흡혈귀가 남긴 재로 범벅이 된 인간이, 한 때 신이라고 불린 존재에게 묻는다.
"퉤, 시바. 어디 한번 해봐."
《하등한 필멸자 주제에…!》
한 때 신이라 불린 자는 하찮은 존재의 당돌함에 분노하여 답한다.
《…라고 하였으나. 그 비루한 삶을 딱하게 여긴, 자비로운 여가 기회를 베풀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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