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불을 먹는자(9)
* * *
《…여에게 귀의하라. 그것만이 고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지니.》
위엄이 서린 초월자의 목소리였다.
비록 전락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었으나, 그 존재감은 한낱 나약한 인간이 버틸만한 것이 아니다.
하여 한 때 신이었던 자는, 눈앞의 고깃덩어리가 자신의 권고를 받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은 항상 굴종해야 마땅하므로.
허나, 그의 예상과 달리.
"얼씨구."
이름 모를 인간은 묘한 추임새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기까지.
그 미소는 한 없이 비웃음에 가까웠음에, 초월자는 생각한다.
…비웃는다?
전지전능한 여를 목도하고도?
《감히…!》
하는 짓부터, 표정, 그리고 기이한 존재감까지.
처음부터 그 무엇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아니꼬운 종자였다. 고작 벌레에 그치지 않는 미약한 존재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천인공노할 일이다.
네 방자함은 죽음으로도 갚지 못하리라! 분노한 초월자가 지엄한 선고를 내렸다.
그리하면 필시 어리석은 인간은 무릎을….
"거 새끼, 아가리 존나 터네."
《아, 아가리…?》
동물의 입 따위를 속되게 칭하는 말.
헌데, 그 단어가 어째서 지금.
저 건방진 인간의 아가리에서 튀어나온단 것인가? 감히 어느 면전에 대고?
"잔말 말고 꼬우면 해보라고."
…정녕 여가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걸까?
아니, 신체를 잃은 초월자의 정신체에 그럴 리가 만무하다. 즉, 억겁의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무례다.
하찮은 벌레 주제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화가 난다기 보다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이런 일은 상정해두지 않았기에. 겁을 주면 나약한 존재가 알아서 무릎 꿇으리라고 확신 했으나,그 믿음이 덧없이 멸망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낭패감이 느껴졌다.
현재의 그는 개미 새끼 하나를 짓누를 여력조차 없었기에. 어떠한 제지도, 행동을 가할 요량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초월자는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는, 재투성이 남자가 오묘한 미소를 머금더니 정중히 물었다.
"혹시, 허접이세여?"
**
《아해야. 잠시 서로 한발자국 물러나 이성적인 대화로 합의점을 찾는 것이 어떠하느냐.》
실로 엄근진한 목소리였으나, 어째 내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니까. 이제와서 무승부로 하자?"
《여의 자비이니 감사히 여기도록.》
선심 썼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
그 눈물 겨운 성의에 몸둘 바를 모르겠던, 나는 한껏 격앙된 감정으로 말했다.
"합의는 니미! 개수작 부리지 말고 불부터 꺼."
《무엄하도다! 여에게 말하는 본새가….》
신이라는 존재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시발. 불, 끄라고."
《……아, 아해는 어리므로 아량이 넓은 여가 이해하겠노라.》
아주 진한 허접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허세를 부리면서 나대다가 참교육 당하는 스타일. 요즘 유행하는 시건방진 애송이 같다. 뭐, 말투는 틀딱이다만.
'이게 신?'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온다. 허나, 방심은 금물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위명이 우습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오죽하면 죽을 각오로 뒤집어쓴 흡혈귀의 재를 먹여줄 생각이었을까.
《잠시 거뒀노라. 후우, 여가 젊을 적엔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거늘….》
만약 눈앞의 라떼충이 한꺼풀 기세를 꺽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됐을 것이다.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왼손의 반지를 매만졌다.
레베카. 거긴 어때요?
안 그래도 열기가 줄어 들었단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구나.
아직까지는요.
수습하는대로 합류하마.
명색이 신이라더니 허언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일단 이걸로 안심이다.
한결 여유가 생겼더니 좁아진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제와서 긴장이 풀려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볼썽 사나운 일은 없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므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봐줘서 살았지만, 너무 쉽게 물러난 감이 있어. 어째서지?'
흡혈귀의 잔재가 예상보다 더 상극이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어떠한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 못해서 물러난다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진짜 뭐하는 새끼지?'
의문이 쌓이지만, 나로선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다.
초월적인 존재에게 몸통 박치기할 정도로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통성명부터 하기로 했다.
"그래서 님 뭔데요."
《님? 아, 하하! 이제야 존칭을 하는구나! 하찮은 필멸자가 여에게 응당 바쳐야할 예우….》
"이게 아직 똥오줌을 못 가리네. 뭘 쪼개? 안 닥쳐?"
《이, 이, 이…….》
표정 하나 없이 구멍만 그려져 있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의 모습이 그려졌다.
신이 아니라 껍데기, 그 비스무리한 것이라더니.
말도 똑바로 못하는 놈의 모습을 보아하니, 하찮다는 건 자기 소개인 모양이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넌 누구냐?"
《…알껍다.》
뭐 그딴 이름이 다 있어. 누가봐도 진명이 아니었다.
말투가 퉁명스러운 것이 삐진 게 분명하다. 허섭스레기 주제에 속까지 좁은 모양이다.
굳이 상대해줄 가치가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알껍다. 신이라더니 이름도 개병신 같네."
《이, 이, 이, 망할 종자가 자꾸…!》
거 울지 말고 말 좀 똑바로 해봐.
철 없는 사촌 동생을 상대하는 느낌이라서 슬슬 즐거울 지경이다.
《여의 위대한 이름을 똑똑히 새겨라. 여는 '에오로스' 동틀 녁의 여명이오, 길 잃은 목동들의 안내자일지니!》
"에로스? 신 이름이 어떻게…."
진명도 썩 좋은 건 아닙니다만.
내가 귀를 후비며 말하자, 신 비스무리한 것이 발작하듯이 소리를 쳤다.
《에. 오. 로스다! 이, 이 역겨운 고깃덩어리 녀석!》
"응, 반사. 니 얼굴."
《죽, 죽, 죽….》
틀딱신께서 이를 갈다가 갑자기 죽을 찾아대신다. 쯧쯧, 늙었으면 치아 관리를 어련히 잘할 것이지.
"그래서 듣도 보도 못한 잡신 님,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건드렸어요?"
《…….》
침묵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허나, 그 반응이야말로 내겐 호재로 더없는 작용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건드렸음에도 덤비지 않는다. 자존심 강해보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말이다.
'뭔지 몰라도 샌드백 신세인가 보네.'
나는 약자에겐 한없이 강해지는 남자다.
그러니 감사하게 두들겨 팰 따름이다. 신이든 뭐든.
**
이 세계에서 '신'은 분명 존재하지만, 여러모로 베일에 쌓여있는 수수께끼의 존재다. 판타지라면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 임에도, 원작에서 그를 언급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 탓에 나조차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선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어느날 태초의 신들이 사라진 뒤, 유일하게 남아 인간을 굽어살피는 신이 '빛의 여신'이라는 신화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건 나 뿐만 아니라 '빛의 여신'을 섬기는, 이세계에서 유일한 종교가 되어버린 '성광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광교의 교황조차 자신이 믿고 신앙하는 존재의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 누구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빛의 여신'.
신탁을 내리고, 신성력이라는 은총을 하사할 뿐 그 외에 이렇다할 행적이 없었다. 마치 기나긴 잠에 빠진 것처럼 고요했다.
어째서 태초의 신들이 사라진 것인가.
언제부터? 왜 빛의 여신만이 자리에 남은 것인가.
답해줄 이가 없었기에, 의문은 무구한 세월 속에서 자연스레 잊혀졌다. 그리하여 학식 있는 주민들이 태초의 신들을 두고 이르기를.
'잊혀진 신.'
나는 스스로를 '에오로스'라 칭한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도 이 녀석이 그 권좌의 일부에 속하지 않을까 하고.
맥거핀이라고 할 수 있는, 거물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초월적인 존재와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곤 티끌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또ㅡ
《흐윽, 여, 여를, 핍박하지 말라!》
그 실체가 이럴 줄 몰랐기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나는 울먹이는 듯한 에오로스의 목소리에 반성했다. 냄비 받침대보다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조금 심했나보다.
"제가 언제 핍박했나요? 살짝 놀린 걸로 과장하시네. 그러게 왜 가만히 사람을 건드리고 그래요."
《그, 그건! 아니, 천한 도둑질은 한 건 네 놈들이다! 지금 당장 여의 것을 내놓거라. 네 요구는 들어줬지 않느냐?》
에오로스는 뜨끔하며 말문이 막히더니, 금세 말머리를 돌렸다.
자신의 잘못을 뒷전에 미루는 모습이 어이 없고, 뒤이어 내뱉은 주장 또한 전혀 모를 소리였다.
"웽 도둑질? 몰루겠는데. 그거야말로."
《죽, 죽….》
또 이거네. 배고프신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황망한 목소리를 감상하다가 말했다.
"대체 뭘 돌려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나 들어봅시다. 그거 듣고 생각해보게."
《망할 종자.》
대뜸 욕을 하네. 초딩이신가.
"안녕. 잘 있어라."
《기다리거라. 세상 거룩한 사연이 여기 있노라.》
어차피 말할 거면서 더럽게 잰다.
역시 귀찮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소기의 목적은 떨어진 신성의 완전한 부활이며, 대국적으론 자매들을 배반한 패륜아 '카리스'에게 철퇴를 가하기 위한 정의의 행보일지니.》
나를 대할 때와 다른 종류의 분노를 갈무리한 목소리였다.
《만물은 태양 아래에서만 오롯이 존재하는 법. 멋대로 빛을 사칭하여, 세상을 방치하는 패륜아의 나태한 치세를 두고 더이상 볼 수 없노라. 하여, 여에게 뻔뻔히 고개를 드는 시건방진 네….》
이 새끼가?
《아니, 용감한 필멸자에게 권하노라. 여에게 귀의하라. 몸 받쳐 신앙하라. 지금까지의 죄를 눈 감아주는 것은 물론. 여의 첨병으로써 영원한 젊음과 불사의 권능을 약속하마.》
승낙이 정해진 최후통첩처럼.
에오로스의 중성적인 목소리엔 기이할 정도의 호소력이 담겨있었다.
사람을 불 앞의 불나방처럼 만드는, 치명적인 불꽃의 유혹.
마법적인, 어쩌면 권능에 가까운 매력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을 현혹하는 마성(??). 그게 에오로스가 지닌 비장의 수였을지도 모른다.
허나,
"싫은데."
《이럴 수가, 어떻게….》
나는 이보다 매력적인 목소리를 알고 있다. 이를테면,
"흠, 걱정이 되어 와봤더니. 잠깐 사이에 불여시가 꼬였구나."
불꽃보다도 진한 루비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여인이라던지.
"이래서야 산책도 함부로 보낼 수가 없겠어."
앞으로 목줄이라도 채워야하나?
레베카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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