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08화 (108/117)

〈 108화 〉 불을 먹는자(10)

* * *

"앞으로 목줄이라도 채워야겠구나."

언제 들어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뭐, 그녀가 하는 농담은 별로 재미 없었지만.

그래도 세상이 환해지는 듯한 미모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튀어나왔다.

'유머 감각이 영….'

나는 묘하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짠하고 나타난 레베카에게 말했다.

"에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글쎄 오해일까."

…농담이겠지?

나는 왠지 모르게 서늘한 목을 감싸며 어물쩍 말했다.

"그나저나 애들은요? 저보다는 애들이랑 같이…."

"입 다무렴. 의자 대용으로 써버리기 전에."

'어, 그건 오히려….'

말을 돌리려다가 괜히 꾸중을 듣게 생겼다.

하긴, 고집스레 모험을 감행 했으니 레베카에게 바가지 긁힐 것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내겐 아이들만큼이나 그대도 소중하단다. 알겠니?"

막상 듣게 된 잔소리가 생각보다 듣기 좋았던 것이 조금 예상 밖이다.

이런 부끄러운 멘트를 치다니.

애들밖에 모르는 바보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 지 솔직히 감동했다.

"레베카…."

나는 괜스레 먹먹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자, 레베카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민망해져서 그러는 모양이다.

"크흠, 아무튼 아이들도 안전한 장소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렴."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전개되나 싶던 중.

"그나저나…."

레베카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기다란 손가락을 한쪽으로 뻗었다. 정확히 내 맞은편에 있는 낡아빠진 그림.

"저런 흉물이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니?"

"아."

그러고 보니, 저 종이조까리에 대해서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미처 말할 정신이 없었기도 했거니와, 괜히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일단 묻어뒀으니까.

'이거 안 좋은데.'

헤헤, 깜빡했어요.

사실은 저거 때메 죽을 뻔했지 뭐예요?

라고, 뒤늦게나마 유쾌하게 넘어가볼까 싶었으나….

"추후 그대와 진득한 대화를 나눠야겠구나. 기대하고 있으렴."

… 어림도 없어 보였다.

역시 이런 일은 숨기다가 걸리면 더 크게 돌아오나 보다. 대화 수단이 뭔지 모르겠지만 고생깨나 해야할 것 같다.

《네 놈, 고깃덩어리. 왠지 불쾌하다 했거늘. 시대에 뒤떨어진 도마뱀이 침을 발라둔 게로군.》

문득, 나와 레베카의 대화를 지켜보던 골동품이 끼어들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전락한 신격이라지만 에오로스는 레베카의 정체를 파악한 듯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간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냐? 딱한 피조물이로다.》

1대 1로도 쳐 맞던 양반이 무슨 자신감인지 도발을 시전했다.

문제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이조까리가 나대니, 레베카가 고운 미간을 찌푸린 것은 당연지사.

"구시대의 잔재가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그니까요. 시중에 팔리지도 않을 골동품 주제에. 우리 누님의 연배는 아직 한창…."

지금이 바로 물타기를 해둬야할 때!

나는 레베카에게 잘 보이고자 눈앞의 적을 물어뜯으려고 했으나…

…꽉!

어째서인지 그녀가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슬쩍 보니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입 닥치라는 뜻 같았다.

《흥, 제 주인 앞에선 꼼짝도 못하는 구나. 꼴 좋다. 버릇 없는 살덩어리. 》

골빈 종이조까리 같으니.

신격이 아니라 능지도 떡락한 건가. 내가 레베카에게 구박 당한다고 마냥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네 놈이야말로 입 닥쳐라. 더이상 내 것에게 관여하지 마라. 소멸시켜 버리기 전에."

《너, 너… 미물, 네 년은 여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을텐데…! 후환이 두렵지도….》

"잘 알지. 인간이 없이는 존속하지 못하는 하루살이 아니니? 네 신도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뒤에도 그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 지 확인해보자꾸나."

와, 이게 걸크러쉬인가 뭔가인가.

용눈나의 거침 없는 모습에 새삼 반할 뻔했다.

《가, 가련한 중생을 핍박하지말라. 그건 옳지 못한 일이지니.》

레베카의 서슬 퍼런 경고에, 에오로스가 호다닥 꼬리를 말았다.

《…게다가 지금의 여에게 혀는 없으니 무례를 넘어가주마.》

이 새끼, 진짜 너무 추한데….

꼴에 자존심인지 말꼬리를 잡는 게 가관이었다.

레베카 또한 초월자의 모지리 같은 반응에 당황한 듯 멈칫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추방된 이들 중 하나가 무슨 연유로 이 곳에 있지?"

추방된 이들?

내가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 같다.

《흥, 여가 할 소리이니라. 박쥐 같은 도마뱀이여. 어찌하여 네 년이 여기 있느냐?》

얘는 능지가 박살난 게 분명하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에오로스는 거만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분명 네 동족들은 서약에 따라 동면에 들어갔거늘. 어찌하여 섭리에 벗어나는… 끄악!》

"마지막 경고다."

레베카가 만들어낸 바람의 칼날이 종이귀퉁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 감히… 여, 여의 신체에 손을….》

"질문은 질문으로 받지 마라. 내 인내심은 그리 넓지 않으니."

《이 비열한 미물 따위가, 감히 여를 협박….》

"시끄럽다. 답할 셈이 아니거든, 망각의 업에 따라 당장 꺼져라. 네 놈들, 외신은 대륙에 있어선 아니될 존재이지 않느냐."

레베카는 전에 없이 싸늘한 태도로 말했다.

에오로스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짙은 혐오감과 경계심이 느껴졌다.

《허튼 소리!!》

그에 발작하듯이 에오로스가 급발진했다.

《사기와 기만으로 이뤄진 계약에 따를 성 싶더냐?! 여의 거처는, 여의 발걸음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정당한 권리다! 이 여명의 에오로스가 숨쉴 곳은 이곳이란 말이다! 여를 쫓아낼 수 없음이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두 초월자의 대화를 내 멋대로 대충 해석하자니, 어떠한 사정으로 대륙에서 쫓겨난 신세인 에오로스가 몰래 불법적으로 체류하다가 걸렸음에도 안 나가고 꼬장부리는 상황인 것 같다.

'아니, 이게 뭔 개소리지?'

내가 말한 거지만 어지럽네.

신이라는 양반의 사연이 이렇게 구질구질하다고…?아니,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리라.

뭐, 자세한 이야기는 에오로스를 갈구고 있는 레베카에게 따로 물어봐야겠다.

"아득바득 대륙에 붙어있는 모습은 기생충이 따로 없구나. 이리도 추하게 전락한 모습이라니 부끄럽지도 않나."

오우….

레베카의 매도는 의외로 수준급이었다. 제법 매섭다.

《기, 기생충!? 썩을, 망종의…!! 이 미물이!! 너, 네 이년…!!》

결국 거듭된 갈굼에 종이쪼가리가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또 다시 여의 대계를 훼방놓으려 드는구나!! 그 간악한 카리스가 보낸 종자로다!!》

"확언하건대, 나는 물론 내 일족은 카리스의 종이 아니다. 하물며 네 놈들의 정쟁 따위 관심도 없어."

카리스.

에오로스가 수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자.

'그 자도 신일까?'

정황상 그럴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인물이라는 직감이 든다.

'신, 초월적인 존재.'

나를 이 세계에 불러들인 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에오로스의 등장이 내게 오묘한 힌트처럼 다가왔다.

지금껏 의식하지 않고 있던 비밀이 불현듯 눈앞까지 다가온 기분이었다.

《중립, 그 가식적인 중립! 앞에선 그리 말한 네 동족들은 변변히 카리스와 함께 인간들을 싸고 돌았노라. 왜 카리스가 아닌, 인간의 애완동물이라고 자처하지 그러느냐?》

"앞서 말했다시피 그들의 신앙을 핥아먹고 사는 네 놈들이 할 말이 아니구나. 네 놈이야말로 거머리나 모기와 유사하니 우스운 일이구나."

《이, 이, 익…!》

랩배틀에서 쳐발린 종이쪼가리 에오로스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 우리 데이지보다 말빨이 딸리는 것 같다.

열살짜리보다 허접한 신이라니…. 이거 병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하븨를… 히끅, 여는 합의를 요구하노라. 여에게서 훔쳐간 소중한 것을 돌려준다면, 훌쩍….》

아까부터 뭘 돌려달라는 건지.

땡깡 부리는 애처럼 처절한 목소리에 온세상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탐탁지 않은 듯 종이쪼가리를 그저 걷어찼다.

《히끅, 고대의 미물은 어찌하여 이토록 여를 모멸하고 핍박하는가! 흐으으, 영성과 지혜를 지닌 존재라면 동틀 녘의 여명에게 마땅한 경의를….》

"이게 뭘 잘했다고 언성을 높여? 재 맛 좀 볼래?"

어디서 악어의 눈물이야.

숱한 생명을 잡아먹은 악신에게 동정심은 사치다.

《까아아아악! 그만, 하지마. 제발, 여를 더럽히지 말아다오…!》

왠지 모르게 찜찜해서 황급히 손을 뗐다.

시바, 종이쪼까리한테 이딴 감정을 느껴야한다니… 기분 나쁜 패배감에 짜증이 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재투성이가 된 손을 털고서 말했다.

"이거 이제 어쩌죠?"

마냥 병신 같지만 실상은 생명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것도 어린애의 희생을 요구하는 악질적인 신앙의 총체. 하물며 죄책감이나 책임감도 없이 권능을 휘두르는 녀석이니 배제하는 게 좋아 보였다.

"일단 처분하긴 해야하는데…."

레베카는 함부로 버리기 곤란한 쓰레기를 주운 것처럼 고민했다.

《여, 여에게 손가락 하나 해를 입히면…… 쾌, 쾌적한 아침을 맞이할 수 없는 저주를 내리겠노라! 평생 갈림길에서 막다른 길을 고르게 되고, 차가운 물은 펄펄 끓는 열탕처럼 느끼게 되리라…!》

위기감을 느꼈는지 에오로스가 갑자기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이게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뭡니까 그 웃기지도 않는 저주는?"

"아니, 그리 우습게 볼 게 아니란다. 외신일지라도 소멸시키면 그 여파가 있을 지 모르는 일이니."

시바, 성물이 아니라 그냥 저주 받은 종이조까리였네.

"악령퇴산!"

《이 천벌 받을 놈이…!》

어째서 레베카가 곤란해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퇴마해선 안될 종류라는 거다. 그렇다고 방치하기에는 악질인 녀석이고.

'하아, 불쏘시개로도 못 쓰는 종이라.'

그게 뭐야. 쓸모 없지 않나.

길을 가다가 껌을 밟아버린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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