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09화 (109/117)

〈 109화 〉 불을 먹는자(11)

* * *

저주 받은 종이쪼가리의 처분에 대해 고민하던 중, 레베카가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내버려두자꾸나."

깔끔하게 방치.

책임감이 있는 그녀치고는 의외의 결정이었다.

"어… 그래도 괜찮나요?"

"어쩔 수 없지. 신격을 소멸시키는 건 꺼림칙한 일이니."

《휴우….》

숨 죽이고 듣고 있던 에오로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마땅한 수가 생기기 전까진 땅 속 깊은 곳에 유기해 둬야겠구나."

《……!》

곧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소리에 경악에 찬 단말마를 내질렀다.

김치 장독대 신세가 되기 직전인 에오로스는 레베카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고 판단했는지.

《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으니…! 아, 아해야. 여는 아해의 신실함을 믿는단다. 부디 저 도마뱀을 말려….》

노선을 돌려 나를 붙잡고 애원했다.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하는 추함이 어떤 의미에서 존경스러울 수준이었다.

"언제 봤다고 믿고 말고 입니까? 나 알아요?"

물론 그렇다고 해악의 근원을 곱게 볼 리가 없었지만.

나는 내게 들러붙는 종이조까리를 패대기쳤다.

날파리처럼 취급된 것이 충격인지 에오로스가 구슬피 울먹거렸다.

《대체, 여가 뭘 했길래 이리도 핍박하느냐…! 그저 조용히 살고 있는 여를… 히끅.》

이건 좀 가증스럽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녀석에게 배알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종이조까리 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시발. 왜 이러냐고? 야, 너 조용히 살았다고 했냐? 그래서 아무 죄도 없다고?"

《누, 누가 여에게 죄를 논할 수 있을까. 여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도다!》

미친 년.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아니… 신이란 초월자의 관점에선 정말로 떳떳할 지도 모른다.

녀석이 나를 고깃덩어리라고 부르는 건, 한낱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반증이지 않을까.

'어린애가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정녕 신이 세상의 죄악을 판단한다면,

만일 그가 저지른 죄는 누구에게 따져야하는가.

괜스레 염세적인 기분이 든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참으며 물었다.

"…네가 잡아먹은 어린애들은 기억하냐?"

이제와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아무도 모르게 사그라진 어린 생명이 안타까워서 나온 말이었다.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인간, 그게 무슨 망언이느냐! 여가 어찌하여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한단 말이냐? 지금 당장 취소해라!》

에오로스는 질색팔색하며 노기를 드러냈다.

발뺌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먹은 빵의 갯수는 세지도 않는다는 그런 의미인가.

'왠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예상 밖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뭔가 석역치 않은 느낌이 든다. 녀석의 입장을 좀 더 들어봐야할 것 같다.

나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바닥에 재를 한 줌 모은 뒤 말했다.

"그딴 거짓말을 내가 믿을 거 같냐?"

《꺄아악! 거짓말이 아니다…! 여는 진실만을 이야기할 뿐, 비겁한 거짓을 고하지 않는단 말이다!》

진심으로 억울한 지 종이쪼가리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저기요. 나보고는 고기니 뭐라면서요."

《고깃덩어리를 고깃덩어리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느냐? 여는 기름진 육식은 즐기지 않으니라! 여는 오로지 담백한 신앙과 가끔 알싸한 외경을….》

미주알 고주알.

시간을 벌 생각인지, 에오로스는 묻지도 않은 제 식습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언제적 제물이고, 육식인가!

야만적이고 구시대적인 식습관은 신성에 좋지 못하다.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 식단!

건전하고도 지속적인 식습관이 아름다운 신격을 만든다.

《내버려두면 신앙을 생산하는 필멸자들의 배를 가를 이유가 없느니라!》

인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며.

본인은 인간으로 따지면 채식주의자에 가깝단다.

솔직히 말해서 밑도 끝도 없는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동틀 녘의 여명이라는 이름에 맹세코.》

에오로스는 신언(??)까지 내뱉어가며 결백을 주장했다.

어이 없게도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당한 와중에 떠오르는 묘한 생각.

'그럼, 네가 우리를 습격한 건….'

《여는 그런 적 없노라. 여는 할 일이 없어 여기서 줄곧 낮잠을… 아니, 카리스를 찌를 복수의 창을 갈고 닦고 있었느니라! 에헴,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게지.》

백수의 그것과 같은 변명인데, 묘한 신뢰감을 준다.

이 무능한 새끼라면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허나, 그러면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는다.

에오로스가 악신이 아니라고? 방구석 폐인이나 다름 없었다고?

뭔가 잘못됐다.

"우리를 습격한 건 엄연히 네 권능이었어."

《음, 정말로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아마여의 대리인이 아닐까 싶구나. 신앙과 외경을 모아주는 노고를 치하하고자 권능을 하사했으니까.》

시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는 곁눈질로 레베카를 본다.

그녀 또한 뭔가 눈치챈 기색인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외신, 대리인에게 권능을 얼마나 떼주었느냐?"

《으음. 압도적인 권능을 선보여야 신도들이 따른다고 하여, 여가 지닌 지분의 8할 정도를….》

8할…?

10개 중 8개. 대충 생각해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권능이라는 미지의 자원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으나, 8할이라는 숫자는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니나 다를까 레베카가 경악했다.

"이런 미친! 그걸 어떻게 믿고서…."

《아니, 투자하면 나중에 세 배로 불려 준다기에… 이건 하지 않으면 바보이지 않느냐?》

이 병신이.

뇌수가 질질 새는 듯한 에오로스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허나, 지금은 종이쪼가리의 정신 나간 호구력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음모를 벌인 새끼가 따로 있다…?'

망할! 개 같은 농담하지마.

나는 다급하게 레베카를 향해 물었다.

"애들을 빼낼 때 동선은 어떻게 했어요? 텔레포트? 아니면."

"…공중."

그래, 환자인 테오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 결과로 인해 애들을 숨겨둔 장소가 노출 됐을 가능성이 생겼다.

나는 머저리 같은 종이조까리에게 달려들었다.

"종이! 네 대리인이라는 그 새끼 누구야?"

《어, 음… 하찮은 필멸자의 이름따위 기억에 두지….》

"시발, 진짜 뒤지고 싶어!!"

《히끅… 아니, 그게 기억이 잘…. 그저, 가장 늙은 인간인 것만….》

뇌리에 음흉한 노인네가 하나가 떠오른다.

땅 속에 쳐박아 뒀으나, 만약 놈이 정말로 흑막이라면….

제길.

"레베카!"

"알고 있단다."

레베카는 이미 주문을 읊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건지, 갑자기 종이쪼가리가 내 팔에 달라붙었다.

"꺼져. 이거 안 놔?"

《여, 여를 버리지 마라! 여의 소중한 것 돌려줘어…!》

빌어먹을 껌딱지 같으니.

이미 단물이 빠진 녀석이지만 떼어놓을 시간도 아깝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

겨울철, 얼어붙은 산길을 오르는 것 위험하다.

과거에도 이런 곳에서 발을 잘못 디뎌서 골로 가는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결코 추억은 아니다.

그리움을 느끼기에는 지독하게 고난했던 과거였으므로. 쫓기고 쫓던 지난 시절은 상처 뿐이었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에는 항상 굶주렸다.

몇날 며칠을 허기에 허덕이다가 음식 같지도 않은 것들로 간신히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눈.

나무 껍질.

구더기와 지렁이.

푸석푸석하게 마른 곡식.

포식자가 먹다 버린 산짐승의 내장.

세월 앞에서 처절했던 삶의 조각은 희미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낙인처럼 새겨진 것이 있다.

야들야들한 살.

비릿하면서도 풋풋한 향기.

늙은 육체에 젊음을 불어넣는 금단의 과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식욕.

노인은 뇌리에서 속삭이는 공복이 이끄는 곳으로 향한다.

…찾았다.

바로 앞.

저 곳에 있다.

그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기운.

순진하고도 오만한 신성이 끝끝내 내어주지 않던 원천.

가장 순수한 온기.

저것만 있으면 'OOO'은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리라.

더이상 미칠듯한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으리라. 허나,

'두렵다.'

신의 불꽃을 막아낸.

그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숨 죽여 기회를 엿보자.

어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 사자가 있을 때까지.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깊고 어두운 목소리는 노인의 것과 똑닮아 있었다.

**

에, 에츄…!

땀이 식으면서 찾아온 한기가 몸이 부르르 떨렸다.

"킁."

데이지는 코를 훌쩍이며, 바닥에 널려있는 모피를 끌어 안았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하지만 뭔가 조금 심심했다. 좀 더 살가운 온기가 있으면 좋겠다.

'어디 간 거야….'

그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하지만.

어린애처럼 떼를 쓸 수 없기에 애써 타협하기로 했다.

"있지, 털뭉치."

"왜 뭔데 땅콩?"

어쩐지 얼굴이 어두운 바람꽃이 툭하고 대꾸했다.

말투는 쌀쌀 맞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착한 애니까. 데이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너랑 좀 더 붙어 있어도 돼?"

"엑, 싫어! 저리가. 너 땀나서 냄새 난단 말이야. 찝찝해."

너, 너무해.

틀린 말은 아닌데… 대놓고 질색하니까 조금 슬프다.

"치, 나도 됐거든."

빈정이 상한 데이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상처 입은 꼬마의 마음을 눈치챈 바람꽃이 하악질을 멈췄다.

'말이 조금 심했나?'

사실 땀냄새는 별로 안 나는데.

괜히 미안해진 바람꽃은 뺨을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많이 추워?"

"…몰라."

"땅콩이 삐졌어?"

"……아니거든. 저리가."

에이, 삐졌네.

콩알만한 게 속도 좁다니까.

바람꽃은 쪼그라 앉은 데이지를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진짜 애기다, 애기.'

에휴, 어른인 내가 챙겨야지.

허나 어떻게 달래줘야할 지가 고민이었다.

'족제비가 있으면 금방 풀릴텐데.'

바람꽃은 잠시 자리를 비운 어른들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 둘은 좀 전의 사건을 해결하러 갔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 무시무시한 불꽃의 위용이 생각나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얼굴이 굳은 바람꽃을 훔쳐 보고 있던 데이지가 슬며시 말했다.

"털뭉치, 어디 아파? 배고파?"

"내가 넌 줄 알아??"

이게 누구보고 먹보라는 거야.

흥, 바람꽃은 어설프게 팔짱을 낀 뒤 데이지를 쏘아봤다.

"됐어. 정 추우면 하양이랑 같이 있던가."

"그치만, 난 털뭉치가 더 좋은데…."

­살랑살랑.

데이지의 눈에 뭔가 밟혔다.

복슬복슬, 좌우로 펄럭이는 탐스러운 강아지 꼬리였다.

"흐흥, 내가 아니면 안돼에? 나차암, 땅콩이는 엄살쟁이라니까. 에휴, 내가 그렇게 좋아?"

"…으응?"

사실, 털이 복슬복슬해서 그런건데….

데이지는 우쭐해 하는 바람꽃의 눈치를 보다가 일단 속내를 삼키기로 했다. 괜히 모피 취급한 걸 밝혀서 좋을 게 없다.

"그나저나 하양이 걘 어디 갔어?"

"??"

그러게 새하얀 꼬마의 모습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곳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닐까?

머리만 붙이면 쿨쿨 자는 그 애라면 그럴 지도.

"추운데서 자면 뼈가 콕콕 쑤시는데…."

"찾으러 가자. 개인주의는 용납 안해!"

데이지와 바람꽃이 의지를 다질 때,

"레, 레일라 님이라면 아까 입구 쪽으로 가던데…."

한구석에 쌓여있는 모피의 언덕이 말했다.

아니, 레베카가 쏟아낸 모피에 파묻혀 있는 테오라는 소년이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좋아, 잘했어!"

바람꽃은 그런 테오에게 엄지를 척하고 올린 다음, 빠르게 등을 돌렸다.

"땅콩, 따라와! 바로 잡으러 가자!"

"응? 엑, 털뭉치! 같이 가!"

데이지가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한편, 꼼짝달싹할 수 없는 테오는 멀어져가는 소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횡설수설했다.

"어, 어라? 저, 저기요?! 가기 전에 저 좀 꺼내… 화, 화장실이 급…."

허나, 소년의 절규 아닌 절규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아니….

"……."

그와 비슷한 처지인, 땅 속에 파묻힌 연금술사가 담담히 애도를 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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