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불을 먹는자(12)
* * *
어쩌다 시작된 두근두근 동굴 대탐험!
그 내막에는, 갑자기 사라진 친구를 찾고자 하는 소녀들의 아름다운 우정이 있었다.
"큰일나따…."
허나, 정작 당사자인 바람꽃은 조금 후회스러웠다.
처음에는 선뜻 나섰으나 뒤늦게 상황 판단이 된 것이다.
'…이러다가 혼날 거 같은데?'
원래 어른들은 애들끼리 위험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만약 사고라도 난다면….
'분명 피터가 화낼거야…!'
평소 잘 웃는 사람이 화나면 무서운 법이다.
그 사실을 몸소 체험한 적이 있는 바람꽃은 흠칫 떨었다. 솔직히 혼나는 게 두렵다기보단 그에게 미움 받는 것이 더 싫었다.
[딸아. 사고쳤으면 첫째는 은폐, 둘째는 신속, 셋째가 안전이란다. 일단 공범의 입 단속부터….]
언젠가 흘려들은 어느 주정뱅이의 말을 떠올렸다.
바람꽃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빠의 조언을 실행에 옮겼다.
"땅콩. 잘 들어! 이건 아~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알겠어? 비밀 임무라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아이참, 알아써. 알겠다니까."
졸졸 따라오던 데이지가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포옥 쉬었다.
이미 수차례는 더 들은 바람꽃의 잔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운 탓이었다.
"털뭉치, 왜 같은 말을 자꾸해?"
왜긴, 그건 너가 멍….
바람꽃은 불쑥 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키며, 못 미더운 동료에게 재차 당부했다.
"족제비한테도 말하지마."
"응? 그치만…."
벌써부터 허물어지는 동료의식!
모래성보다 연약한 우정에 짙은 배신감을 느낀 바람꽃이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너어 진짜! 내가 말했어. 배신하기만 해봐?"
"……!"
어, 어떡하지?
데이지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럴수록 시퍼렇게 뜬 바람꽃의 도끼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땅콩, 내 눈 똑바로 봐. 설마 나보다 족제비야?"
"ㅇ……."
데이지는 냉큼 긍정하려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왠지 본심대로 말하면 큰일날 거 같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게."
허나, 눈치 빠른 바람꽃에겐 이미 들통나 버렸다.
애초에 그녀는 이 꼬마가 그 남자의 껌딱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치, 짜증나.'
이해와는 별개로 괜히 섭섭한 바람꽃이었다.
결국 빈정이 상해버린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중얼거렸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흥, 나도 됐어. 이제 너랑 얘기 안 해."
"치, 친구…?"
데이지는 겨울철에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 마냥 바람꽃을 쳐다봤다.
뭐야? 왜 이래?
그 시선에 당황한 바람꽃이 덩달아 마주보자, 데이지가 뭔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할게! 피터한테도 말 안해! 약속!"
"??"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의아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바람꽃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린 같은 배를 탔어. 만약 의리를 저버리면, 네 저녁밥은 압수야!"
"…응! 으리! 지킬 게. 친구니까…!"
데이지는 혼자서 패널티를 부여받은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두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렇게 두 꼬마가 피의 맹세(새끼 손가락 걸기)를 나눈 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는 얼굴인 데이지가 바람꽃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물었다.
"근데, 하양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어차피 외길이잖아. 쭉 따라서 가면 돼."
"아하! 히힛, 털뭉치는 똑똑하구나~"
…얘가 뭘 잘못 주워 먹었나?
바람꽃은 자신을 보며 실없이 웃는 데이지가 조금 어색했다. 뭔가 쑥스러운 기분에 그녀는 괜히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앞이나 똑바로 보고 걷지? …넘어져서 다치지 말고."
"아! 털뭉치, 저게 머야?"
한 눈을 팔린 데이지는 듣지 못했는지 천장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어휴, 정신 사나워.
바람꽃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어둑어둑한 천장이었다.
밤눈이 좋은 편인 그녀조차도 흐릿하게 보였다.
"있긴 뭐가 있… 앙? 뭐야 저게?"
정말로. 뭔가 이상한 게 있있다.
작고, 푸르스름한 빛깔을 띄는 형체였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특이하게 생긴 바위 같았지만… 이따금 꿈틀거린다. 아무래도 생물체인 듯했다.
'으으, 징그러.'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이상한 동물.
동굴 천장을 빼곡히 메운 그 모습이 소름끼칠 정도였다. 인식하고 보니 어마어마한 군집이었다. 어쩐지 사방에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만….
"으엑, 이거 다 쥐똥이잖아?!"
무심코 발아래를 본 바람꽃이 못볼 것을 봤다는 듯이 시커먼 바닥에서 황급히 발을 뗐다.
"쥐? 아닌데. 내가 아는 쥐는…."
"빠, 빨리 가자."
…쟤네들이 똥 싸면 그대로 맞는 거잖아!
바람꽃이 질색하며 데이지를 데리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데이지가 말했다.
"있지. 쟤네들 맛있을까?"
"미쳤어? 저걸 어떻게 먹어!"
"쥐 아니야? 예전에…."
"시끄러! 입 다물고 걷기나 해."
바람꽃은 왠지 모르게 군침을 삼키는 데이지를 보며 재촉했다.
얼마 걷지 않아 환한 빛이 보였다.
출구다! 다행히 그리 길지 않은 동굴이었으니 금방이었다.
"킁, 이게 무슨 고생이야."
바람꽃은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급 피곤해진 그녀는 이제 탐험이고 뭐고, 얌전히 돌아가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 돌아갈 때도 쥐똥밭을 지나야하잖아….'
"저기 있다!"
바람꽃이 좌절하고 있을 때, 이번에도 데이지가 뭔가를 발견했다.
얘는 나보다 눈이 좋은 거 같네?
바람꽃은 내심 감탄하면서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쫓았다.
새하얗고 조그만한 등.
웅크리고 앉아 있어서 평소보다 더 작게 느껴지는 녀석이 보였다.
"나참, 쟤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말은 하고 가야할 거 아니야!
"야, 뭐해!!"
바람꽃은 그동안 쌓인 불안을 풀어내듯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
사냥감은 흠칫 놀라더니 풀썩 주저 앉아 버렸다.
단단히 혼쭐이 난 모습에, 북부의 늑대는 만족스럽게 씩 웃으려다가… 이내 표정을 싹 굳혔다.
"이 배신자!"
옴뇸뇸.
하얀 꼬마가 치사하게 혼자 맛있는 걸 먹고 있었으니까.
**
포식자에게 있어서 인내는 익숙한 것이었다.
먹잇감을 사냥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언제나 기다림이므로.
'어미 사자가 집을 비웠다.'
여마법사가 다급하게 동굴 밖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실제로도 강대한 존재감이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노인은 눈을 희번뜩이며 중얼거렸다.
"기회로다."
끔찍한 굶주림을 견딘 끝에 찾아온 기회.
오직 지금 뿐이다. 파수꾼이 자리를 비운 지금만이 설익은 과실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리라.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더이상 공복을 참지 않아도 된다.
희열에 찬 노인은 게걸스럽게 둥지를 향해 달려갔다.
《찬탈된 권능을 회수하라!》
《저 속에서 떨고 있을 여린 생명을 탐닉하라!》
이제 결계든, 함정이든, 거칠 것이 없다.
뇌리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따라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모조리 집어 삼켜…."
거대한 불꽃으로 화한 노인이 들이닥치려는 순간.
!!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동굴에서 튀어나왔다.
피시식, 꺼져버린 불씨가 노인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지 보여주는 듯했다.
"뭐, 뭐냐. 어째서…."
떽!
둥지에 꼭꼭 숨어있어야할 먹잇감.
한입거리도 안될 작은 소녀가 제발로 걸어나왔다.
'설마 함정인가?'
당황한 그가 주위를 둘러봤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혼자서 나타난 것이다.
"아해야. 무슨 자신감이냐?"
으음!
새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가 우뚝 섰다.
무심코 홀린 듯이 보게 되는 꽃봉오리 같은 앳된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결단이 엿보였다.
"허허, 이런 당돌한 것."
노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면… 저 안에는 다른 핏덩어리도 있었다.
"숭고한 희생이더냐 어린 것아. 참으로 눈물 겹구나."
제 목숨 하나로 넘어가달라는 것이다.
노인은 자신의 반에 반도 살지 못한 어린 소녀의 용기에 탄성이 나올 지경이었다. 허나,
"아해야. 어림도 없다."
눈이 먼 불꽃 앞에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삼킬 수 있는 것은 골수까지도 모조리 태워버릴 뿐이다.
"아해야, 너는 어떤 목소리로 지저귀일까?"
노인은 느릿하게 걸음을 떼며 작은 의문을 품었다.
과연, 저 신기한 어린양은 마지막 순간에 무어라고 말할까?
경험상 처음에는 '살려주세요' 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 이후로 비명을 지르거나, 용서를 구하거나, 부모를 찾거나, 저주를 퍼붓는 등 반응이 제법 다채로웠다. 하지만 마지막 말만큼 대체로 비슷하게 끝난다.
'제발, 죽여줘.'
천천히 음미하던 먹잇감은 전부 그리 말하곤 했다.
노인은 희번뜩거리는 노안으로, 덧없이 사라질 어린양의 면면을 담는다.
화르륵.
분명앳된 얼굴에는 공포와 절망으로 뒤덮혀ㅡ
'왜 웃고 있는 게냐?'
…있어야하거늘.
억겁의 염화 앞에 선 꼬마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잘….
앙증 맞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가 닫혔다.
노인은 타오르는 염안으로 그 움직임을 읽으려고 애를 썼다.
이윽고, 읽어냈다.
'…잘 먹겠습니다?'
천진난만한 꼬마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