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12화 (112/117)

〈 112화 〉 겨울나기

* * *

매캐한 탄내가 머물고 있는 마을.

회색빛 하늘 아래에 타다 남은 건물의 잔해와, 그 주변에 널부러진 수 백구의 검뎅이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아으으….

시커먼 형상들은 간혈적으로 꿈틀거렸다.

때로는 메마른 눈물을 흘리며 신음했다. 마치 육지에서 말라가는 생선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 초라한 움직임조차 뚝하고 끊기기 일수였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할 리 없었다.

수 백의 생명이 너무도 허무하게 아스라져 가고 있었다.

지옥에 던져진 죄인들의 말로를 엿본 기분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뜻밖의 지옥도는 인륜을 져버린 업보일지도 모른다고 막역히 생각했다.

허나, 통쾌하기 보다는 그저 참담하기만 했다.

흡사 숯더미처럼 느껴지는 저들은 한 때 인간이었으므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중얼거렸다.

"…혼자 오기 잘했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만한 풍경이 아니었다.

이제 막 구구단을 배우는 어린 아이에겐 더더욱.

세상에는 보지 않는 편이 이로운 것들이 있다. 화마가 지나간 이곳 또한 그러했다.

그런데,

"저도 있습니다만."

누군가가 내 혼잣말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나는 뒤돌아 재수 없는 연금술사를 지그시 노려 보다가 되뇌었다.

"혼자 오기 잘했다."

"아 예."

시어도어는 더이상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과 마차나 되찾고 돌아가시지요. 밤새 뜬 눈으로 지샌 터라 피곤합니다."

어쩌면 저들을 살릴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말라 죽어가는 수 백의 생명을 목도하고도 제 할 말만 했다.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싸늘하게 식은 내 눈을 본 연금술사가 뭔가 오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하나만 가져가서 해부해 볼까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허나, 질 나쁜 농담이라고 하기엔 태연자약한 얼굴에 자리 잡은 호기심이 진심이었다.

결국 소름이 끼친 나는 정신 나간 연금술사에게서 세 발자국 떨어졌다.

이 미친 놈을 치워버리는 편이 저들에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놈의 광기 어린 태도가 경직된 내 발을 떼어냈다.

그렇게 떠나려가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내 발을 붙잡았다.

오한에 벌벌 떠는 그는 무어라고 말했다.

희뿌연 망막에는 내가 비치지 않았고, 어눌한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덕분에 그 의미를 한참 되짚어야 했다.

오랜 고민을 마친 나는 품에서 망할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눌러 붙은 가슴팍에 꼿꼿이 세운 채로 들이밀었다.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칼날이 사라졌다.

곧이어 평온한 얼굴로 잦아들었다.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아이마냥.

­고맙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며, 연금술사가 의미 모를 얼굴을 한 채 물었다.

"아는 얼굴입니까?"

"글쎄."

브루노 스피드왜건.

내 선택이 부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가식이나마 호의를 보여준 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

레베카에게 애들을 맡기고, 시어도어를 데리고 나온 게 실수였다.

"말을 모는 법 정도는 숙지하시지요. 언제까지 얻어탈 생각입니까?"

망할 놈의 연금술사는 이 때다 싶었는지 알량한 재주를 가지고 비아냥 거렸다.

운전 면허도 없는 시골 귀족 주제에.

나는 애써 정신 승리를 하며, 그가 데리고 온 갈색 말과 점박이 말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치, 제미니."

이 시대에 말은 귀중한 동물이자, 재산이다.

그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화마를 휩쓸리게 나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투르르.

그간 정이 붙어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제법 슬플 뻔했다.

겨울성으로 떠나는 여정에도 차질이 생겼을 것이고. 실로 다행스러운 소식이다.

"애들 밥이나 주고 있어."

한결 기분이 나아진 나는 귀족 놈을 마굿간지기 취급함으로써 소소하게 복수했다.

푸른 피의 마부가 말을 달래는 동안, 나는 사라진 촌장의 집에 들렀다.

아무래도 영 수상한 점이 많은 양반이다 보니 이것저것 뒤져볼 생각이었다.

《흐으으, 여의 신도가, 여의 기반이….》

하지만 넋이 나간 종이조까리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자칭 여명의 신, 에오로스는 마을에 나자빠진 수 백구의 숯더미를 보더니만 계속 이런 상태였다.

나는 노이로제가 걸릴 듯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신경 쓰이는데 저기 구석에 가서 우는 게 어때요?"

《이, 이! 배려 없는 사내를 보았나…! 미녀가 슬픔에 잠겨 있다면 손수건을 건네는 것이 미덕이거늘!》

아니, 종이쪼가리한테 뭔 손수건이야.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 젓고는, 악착같이 내 바지자락에 붙은 녀석을 떼어내려고 했다.

《꺄아아악! 여, 여의 어딜 만지는 게냐!? 이 파렴치한 고깃덩어리!》

"환장하겠네…."

평평하다 못해 납작한 종이조까리에게 이딴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이대로라면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찰거머리 같은 에오로스는 일단 내버려두기로 했다.

꼴에 외신이라 상당히 찜찜하지만, 시골 촌장에게 사기 당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니 딱히 두렵진 않았다.

《흑, 흑….》

파산해서 질질 짜는 모습이 조금 애초롭기도 했고.

나는 만약 눈물을 흘렸으면 내 민망한 부위를 적셨을 종이조까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어딜봐서 악신이야?'

그냥 팔푼이지.

못난 종이조까리를 보고 있자니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떠올랐다.

어린애는 커녕 사람조차 잡아 먹지 않는다는.

이른바 신앙계의 비건이라고 주장하는 에오로스. 그런 그녀의 입장과 달리 그녀의 신도들은 지극히 광적인 면모를 보였다.

산제물을 의미하는 한스의 문신.

다른 신도들의 몸에도 적나라하게 새겨 있었다. 나는 그 괴리감이 영 꺼림칙했다.

'에오로스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거나, 내가 모르는 기가 막힌 사연이 있거나.'

전자라면 메소드 뺨치는 연기력을 지닌 악신이고,

후자라면 진짜배기 병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촌장의 집을 조사하러 온 이유도 그런 목적이 절반이었다.

에오로스가 사업을 말아먹은 어르신이라면 그나마 좋게 넘어갈 것이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수 천미터의 땅 속에 물리적으로 봉인할 생각이었다.

《아아, 여는 앞으로 무얼 먹고 살아야….》

그 운명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종이쪼가리는 그저 짠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

­1244년 XX년 XX일

영주라는 족속은 배부른 수탈자요, 약자의 수호자라는 기사들은 칼든 강도에 지나지 않으며, 선량한 구도자라는 성직자는 탐욕스러운 돼지에 불과했다. 전능하신 우리의 신에게 바라노니, 부디 그 저주 받을 짐승들을 태워 죽이소서.

­­1XXX년 XX년 XX일

결국 신조차도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여, 나는 찬탈하리라. 스스로 짐승을 태워 죽이는 신, 몰락으로 거듭나리라.

누렇게 바랜 종이에 쓰여진 문구.

괴발개발 휘갈겨서 쓴 악필은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격정적인 원한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행여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노인네, 글도 쓸 줄 아는 양반이었네."

이것은 일기였다.

한때 시골 영지의 소작농으로 살았던 노인의 회고록이자, 비틀린 서사를 엮어낸 일종의 '성서'였다.

'정신 나갈 거 같네.'

모리안, 그 영감은 미쳐도 단단히 미쳐 있던 모양이다.

한 때는 처량했고, 때로는 잔혹했으며, 말년에 이르러 숭고했던 이념이 어느덧 돌아버린 과정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를 성경처럼 쓰고 있던 게 분명했다.

"정말로 신이 될 작정이었네."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다는 행위는 삶을 엿보는 것과 같다.

많은 상념을 불러 일으키며, 하물며 사연 있는 광인의 일기는 그만큼 깊고 어둑한 것이었다.

단숨에 읽을거리가 못 된다.

그래도 대략적인 개요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쓰다가 만 일기장을 덮고, 뿌연 입김을 내뿜었다.

《여, 여는… 몰랐느니라!》

내가 낭독한 노인의 일기가 에오로스의 무죄를 일부 증명했다.

허나, 그 증명이야말로 그간의 실태를 알지 못한 그녀의 기분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무지하며,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그게 에오로스라는 외신을 향한 신도의 신랄한 삼박자였으므로.

《여, 여가 믿었거늘…. 잘해 줬는데, 어째서, 여를 배신….》

혼이 나간 목소리가 퍽이나 애처로웠다.

솔직히 말해서 노인의 평가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저 타산지석이라고.

나중에 우리 애들은 사기 당하지 않게끔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볼일을 마치고 집을 나섰을 때,

누군가가 시어도어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뭐야, 그 덩치는."

"글쎄요."

연금술사는 귀찮다는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귀족이라기에는 심히 불량스럽고 소탈한 모습인지라, 흡사 동네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저, 저를 고쳐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아…."

끅끅 서럽게 우는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나는 번뜩하고 사무치는 죄책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뗐다.

"…심영이?"

"어흐윽!"

그 의미를 모를 텐데도, 녀석은 서럽게도 울었다.

시바, 덕분에 그 이전의 원한 관계는 잠시 잊고서 동정심이 솟구쳐 올랐다.

《어흐, 흑….》

감정을 이입했는지 종이조까리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시바, 괜히 울기 시작하면 시끄러운데….

나는 차디찬 대지에 엎드려서 서러이 우는 한스를 가리켜 말했다.

"어떻게 좀 해봐. 고쳐주기로 약속했잖아. 귀족이 약속을 저버려?"

"…이럴 때만 귀족 취급입니까? 하아, 이제 만들기도 어려운 건데."

피도 눈물도 없는 연금술사는 아깝다는 얼굴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이, 이건…."

"협조해준 대가다. 성기능을 되찾을 수는 있을 것이나, 부작용이 없진 않다. 물론 선택은 네 몫이다. 추후 내게 찾아와 책임을 묻지 말라."

시어도어의 불친절함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친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나라면 그 부작용이 뭔지부터 물어볼 건데.'

뭔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물약이었다.

허나, 시어도어를 일생의 은인 쯤 생각하는 한스에겐 그런 판단을 내릴 여유도 없나보다.

우리는 그를 뒤로 하고 아캄 마을을 떠났다.

더 찾아볼 것도 없거니와, 오래 머무를 만큼 좋은 추억이 없었으니까.

"나으리.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요!"

절절한 사나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차를 이끄는 시어도어에게 품고 있던 의문을 물었다.

"그래서 부작용이 뭔데?"

"별 거 아닙니다. 여성체가 됩니다. 그럼 성기능이 회복되지 않습니까?"

원숭이 손처럼 악질적인 해결 방법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악마냐고.

**

아캄 마을에서 돌아온 뒤, 동굴에서 하루를 쉬어가기로 했다.

밤새 깨어있던 나는 잠깐 눈을 붙였다.

꿈조차 꾸지 않은 단잠을 누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더니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온종일 자버렸네.'

반성하며 잠깐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이 세계는 공장이나 매연이 없어서 그런 지 대기가 맑다.

덕분에 무심코 밤하늘을 올라다 보면, 새카만 도화지에 새겨진 별무리가 눈부실 정도로 보일 터지만….

어째 오늘 밤하늘이 온통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하얀 입김을 담배 연기처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눈이 오려나."

조만간 뭐라도 내릴 것처럼 같다.

아마 심상치 않은 날씨를 보아하니 제법 많은 눈이 쏟아지리라.

'눈이라….'

어린 시절에는 멋모르고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늘의 예쁜 쓰레기처럼 보이는 그것.

나는 아직도 순수한 소년의 영혼을 가졌으나.

일찍이 병역을 마치고, 20대 후반을 바라보던 직장인이었기에. 눈이라는 기상 현상을 마냥 반길 수는 없었다. 눈이란 어른에게 고민을 안겨준다.

'눈이 오면 마차 타기 힘들텐데.'

우리 후치랑 제미니가 고생하게 생겼다.

말들이 얼어 죽지 않게끔 대비책을 마련해 둬야겠다.

…마부는?

시어도어 놈은 상의 탈의 후 뺑뺑이 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한다.

'애들은 눈오면 좋아하겠지.'

왠지 레일라는 눈을 좋아할 것 같았다.

아마 그녀에게는 생애 첫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디 좋은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는데.

방실방실 웃으며 뛰어다니는 꼬마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만, 너무 하얗게 생겨서 눈밭에서 잃어버리면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최근 머리카락이 붉어져서 다행인가.'

레베카가 그 붉음을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의미가 확연하게 와닿지 않는 내게도 그녀의 기분이 전해져서 유쾌해졌다. 분명 좋은 일이겠지.

한편, 평생 설산에서 살았을 바람꽃은 눈을 지겨워할 것 같았다.

뭐, 내 예상과 다르게 막상 눈이 오면 댕댕이처럼 눈을 쫓아 뛰어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볼만하겠네.'

나는 머리에 소복하게 눈을 쌓고 온 꼬마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킥킥 웃었다.

그런데,

데이지는 눈을 좋아하려나?

원작에서의 그녀는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이 난 김에, 오손도손 모여있는 꼬마들에게 눈을 좋아햐나고 물어봤다.

"눈? 아니, 그거 진짜 별로야. 흰 토끼가 잘 안 보여!"

이상한 나라의 댕댕이는 눈이라면 질색했다.

사냥을 나설 때마다 걷기 힘들고, 축축해져서 짜증난다나 뭐라나.

나는 자기가 잘 아는 게 나오니까 말이 많아진 바람꽃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뭐, 생존이랑 관련된 거면 어쩔 수 없지.

­몰?루.

역시나 레일라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듯 했다.

그래, 애초에 본 적이 있어야지. 내가 미안하다고 머리를 토닥이자 배시시 웃으며 넘어갔다. 착한 애다.

그런데,

"……싫어."

데이지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아이의 낯빛이 너무도 창백했고, 지금껏 멀쩡했던 아이가 저체온증에 걸린 것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심상치 않은 반응.

호불호를 넘어서 무언가 트라우마가 있는 듯 보였다.

'이게 지뢰였구나.'

예상한 것보다 격렬한 거부 반응에 속이 쓰렸다.

사연이 있는 아이에게 말을 꺼내는 건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나는 마찬가지로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댕댕이에게 눈짓했다.

'람람아, 좀 도와줘!'

'몰라. 족제비가 그랬잖아.'

데이지는 어깨를 감싸주고 잘게 떨었다.

알 수 없는 추위에 홀로 얼어가는 몸짓이었다. 처음에 그녀와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주 작은 세계에 갇혀 있던 아이.

나는 그런 그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걸 다 아는 게 아니었다.

데이지에겐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가 존재했다.

솔직히 말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이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지금으로썬 다음을 기약했다.

어차피 데이지에겐 시간이 많으니까.

언젠가 그녀가 성장하고, 조금 더 준비가 된 날에 먼저 말해주리라.

그 때까지 추위에 떠는 데이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고민할 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까지 벗어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몸으로 떼웠다.

데이지는 여전히 작고 가녀려서 내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동글동글한 머리는 턱 받침대로 쓰면 적절한 높이다.

"무거워?"

"…으응. 괘차나."

살짝 당황한 데이지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 간지러웠다.

움직일 때마다 뭔가 좋은 향이 나는 것이 레베카가 손수 관리해주는 듯했다.

'나도 샴푸 빌려달라고 할까.'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이 금방 돌아왔다.

얌전한 고양이를 무릎에 올린 것처럼, 뜨듯미지근한 온도가 포근한 기분을 들게 했다.

­저도 추워요!

해맑은 레일라가 끼어 앉으니 태평양 같던 내 무릎이 비좁았다.

갑작스러운 입주민이 불만스러운 듯이 데이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좁아."

"왜 그러고 있는거야? 이 바보들."

바람꽃은 그런 우리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흔히 고독한 늑대라고들 말하는데, 그건 그녀에게는 딱히 해당되지 않는 말인 듯 했다. 우리 댕댕이는 따돌림 당하는 걸 싫어하니까.

"람람이 컴온."

"흥, 싫거든? 되게 바보 같거든!?"

바람꽃은 혀를 쏙 내밀더니 뾰로로로 도망쳤다.

예상한 대로 밤새 눈이 내렸다.

그녀에게 춥지 않은 겨울이 되길 바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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