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13화 (113/117)

〈 113화 〉 겨울나기

* * *

겨울이 되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부쩍 버거워진다.

어쩌면 겨울이란 계절은 사람을 게으름뱅이로 만드는 마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겨울잠에 드는 곰처럼 말이다.

평소 같으면 진작에 눈을 떴을 시각.

'이불 밖은 위험해.'

나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중얼거리며.

차디찬 세상 밖으로 나가기 보다는 포근한 침낭을 돌돌 마는 것을 택했다.

잠결에 따뜻한 온기를 찾아 다리를 뻗었다.그러자,

"우웅…."

작고 말랑한 뭔가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이제는 익숙한 몸짓이라서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볼륨감이 있는 침낭을 확인하고 그 안쪽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이 찾아왔다.

까만 실타래가 풀어진 것처럼 보이는 정수리.

언제나처럼 뒤집어진 특이한 자세로 잘도 잔다.

"…므거어."

내 다리에 깔린 꼬마가 무어라 잠꼬대를 했다.

제딴에는 무거운 지 버둥거리는 모습이 좀 짠하면서도 왠지 재밌다.

보고 있으면 좀처럼 지루하지 않아서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무단 세입자가 조금 괘씸하기도 하고.

나는 소리 없이 낄낄 웃으며 새까만 머리결에 손을 묻었다.

'왠지 덥더라.'

단순히 침낭의 성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공간이 조금 좁아 졌지만, 뭐 덕분에 감기 걸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만 용서하기로 하고 자세를 고쳤다.

"으, 츠어…."

잠깐 뒤척였더니, 그 사이에 찬 공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온기를 찾아서 내 쪽으로 파고드는 몸짓에 침낭을 꼼꼼이 여몄다.

'번데기 한 마리 완성.'

아니, 나까지 포함하면 2인분인가.

그렇게 침낭에 틀어박혀서 데이지랑 같이 뒹굴거리며 시간을 축내던 중.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니?"

­아빠!

용마망와 아가용이 세트로 나를 깨우러 왔다.

어째서인지 앞치마를 곱게 차려입고서.

­인나요, 인나!

"뀨으…."

내 위에 폴짝 올라탄 레일라가, 사실 데이지도 깔아뭉갰다는 비극을 잠깐 망각할 정도로 놀랐다.

'…꿈인가?'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왠지 모르게 즐거운 듯 소리내어 웃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꿈이 아니란다. 아침을 차려놨으니 어서 일어나렴."

"엥? 왜…?"

나는 진의를 파악하고자 레베카를 위아래로 살폈다.

아침에 깨워주는 앞치마를 입은 미녀라….어쩐지 전율적인 느낌이다.

내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자,

그녀가 보란 듯이 가슴을 쭉 내밀더니 묘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웃었다.

"매번 그대가 했잖니."

아침밥 해주는 착하고 예쁜 여자…!

가슴이 웅장해지는, 크고 아름다운 마음씨에 그저 감격하고 있을 때.

"힝, 족제비…."

어째 바람꽃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슬픔에 잠긴 소녀의 눈빛을 파악하고서, 뒤늦게나마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아아,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맛은 기대하지 말도록 하자.

내일 아침부터는 일찍 일어나야겠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

아삭아삭.

소리부터 맛난 사과로 입가심을 했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그렇게 몸에 좋다지.'

좀전에 잃어버린 건강을 보충하는 느낌이다.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레베카가 뭔가 까만 물질이 수북히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모자라면 좀 더 먹지 그러니? 아직 많이 남았단다."

"…아하하, 오늘따라 입맛이 없어서요."

실제로도 배가 살살 아프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내 완곡한 거절에 그녀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으나 더이상 권하지 않았다.

'나만 독박 쓸 수는 없지.'

나는 이 자리에 없는 배신자들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 입만 먹고 도망간 약삭 빠른 꼬꼬마들.

그 나이대답게 놀러간다는 핑계는 아주 가불기다. 덕분에 레베카와 오붓하게 식사해야 했다.

'힘든 싸움이었어….'

그래도 내 희생으로 그녀가 웃었으니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뭐, 두 번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용마망의 성의와 노고를 생각해서 나라도 어울려 줘야겠다.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으응. 괜찮은데."

마법으로 후딱 끝나는 설거지를 굳이 떠맡았다.

평상시와 입장이 바뀌어서 그런지, 레베카가 기분 좋은 듯 흥얼거리며 거들어줬다

이왕 도와줄 거면 마법을 쓰시면 편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도움 받는 입장이 할 소리가 아니라서 잠자코 접시나 닦았다.

"일단 그대가 알려준 대로 고기를 바싹 구운 다음에…."

내 옆에서 그녀가 답지 않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어쩐지 어린애가 잘한 일을 부모님에게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레베카가 못마땅한 듯 내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흥, 적당히 좀 웃으렴."

과연 꼬집기라….

자존심 강한 용의 보복이 실로 무시무시하다. 내버려두면 큰일이겠어.

나는 반쯤 토라진 레베카를 달래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아고, 그랬어요~ 고생했네, 장하다 장해."

"…그대여, 이 수모는 두고 보자꾸나. 반드시 그대의 간사한 입을 굴복시킬 터이니 각오하고 있으렴."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목 씻고 기다려야겠다.

**

반쯤 각성한 레베카가 식칼을 드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린 뒤.

나는 미리 만들어둔 스튜를 데워 실의에 빠진 어린 양, 아니 댕댕이를 달래러 갔다.

"살아있냐?"

"안 먹을래요…."

우울한 기색을 뿜어내는 검은머리 소년.

세상 다 산 것처럼 보이는 테오의 죽상에, 나는 무거운 분위기를 뛰어보고자 짐짓 유쾌한 척 말했다.

"괜찮아, 임마.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할 건 눈물 뿐이야. 아래 정도는 누구나…."

"아아악!"

평소 소심한 녀석이 웬일로 소란을 떨었다.

거 사람이 살다보면 까짓꺼 실수할 수도 있지.

하물며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아닌가? 나로선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사춘기 소년의 섬세한 마음은 그렇지 않나보다.

나는 이대로 놔두면 땅을 파고 관을 짤 것 같은 테오를 한차례 다독여 줬다.

"걱정마. 람람이는 몰라. 이 엉아가 비밀로 하면 아무도 몰라."

"……진짜요?"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에.

'근데 람람이 코가 워낙 좋아서 말이지.'

하고, 입이 근질근질 거렸으나.

쿠크다스 같은 소년의 멘탈을 생각해 그만 놀리기로 했다.

"잘 먹고 빨리 나아. 형이랑 산책 가게."

"네에…."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 생긴 기분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

축축하게 젖은 소년의 영혼을 달랜 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되짚어 보던 중이었다.

'겨울성까지 앞으로 넉넉하게 이주일 정도. 몇몇 골칫거리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사고만 없으면 무사히….'

"히…… 끼아아앗!!"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난데 없이 등짝에 들이닥친 서늘한 냉기 때문에!! 하마터면 심장 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내 등에, 몬가, 몬가 있어…!'

지나치게 차갑고, 축축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나는 부르르 떨면서도 머릿속으로 냉철히 생각했다.

'시바, 살수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키히힛, 웃겨!"

꺄르륵거리는 맑은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코가 빨갛게 익은 바람꽃이 이를 다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보기 드문 천진난만한 모습이 좀 귀엽다만.

…내 등짝에 손을 집어넣은 것만 아니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 손버릇이 고약한 댕댕이 같으니.

나는 보답으로 가볍게 꿀밤 한 대를 먹여주려다가 혀를 찼다.

'쯧, 봐줬다.'

조막만한 손이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장갑이라도 쓰고 다닐 것이지. 나는 적응이 되어버린 등에 반쯤 체념하며 말했다.

"눈 만졌어?"

"오잉? 어케 알았어!? 밖에 이따만큼 왔어~ 키히힛."

어떻게 알긴.

네 손이 졸라 축축하고 차가우니까.

결국 눈이 올 거라는 예상이 들어 맞은 모양이었다.

뭐,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참, 눈은 질색이라더니'

그리 말했던 꼬마의 입가가 귀에 걸려 있다.

어이 없어서 허탈하게 웃고 있으려니 바람꽃이 통통 튀는 말투로 말했다.

"델러 왔어~! 땅콩이도, 하양이도 있어~!"

꼬맹이들끼리 어디있나 했더니, 일찌감치 눈밭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순간 어제 있었던 해프닝이 때문에 조금 우려스러웠으나, 나와 댕댕이를 흐뭇하게 보던 레베카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고 있으니 안심하렴."

"킁, 특별히 족제비도 껴줄게! 나와아."

거참 끼워준다니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나는 피식 웃고는, 소매로 녀석의 코를 살살 문지르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추운데 단디 입어야지. 장갑도 끼고."

"당디?"

그래, 이 코맹맹이야.

한쪽으로 갸우뚱하는 꼬마의 목이 영 허전해 보였다.

내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바람꽃을 꼼꼼히 싸맸다.

어린애가 쓰기엔 조금 길겠지만, 두세바퀴 감아버리니 땅에 끌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무 완성.'

나는 동그란 눈만 내민 댕댕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응, 잘 어울리네."

"…갑갑한데."

왠지 얌전해진 바람꽃이 목도리를 만지작하며 투덜거리길래 단호하게 말했다.

"어허. 풀지마. 감기 걸리면 아야해."

"치, 애 취급이야."

너 애 맞잖아.

나는 쫑알거리는 꼬마를 대충 상대해주며 옷을 껴입었다.

**

'눈부셔.'

어두침침한 공간에 있다가, 새하얀 빛무리를 보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눈을 잠깐 감고 있으니 겨울 특유의 냄새가 났다.

청량하면서도 가슴을 꽉 메우는 희미함. 어쩐지 사람을 설레게 하는 그런 투명함. 어제보다 짙어진 물내음.

나는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음을 실감하며 눈을 떴다.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정경이 펼쳐졌다.

광활한 평야며, 드높은 산이며, 무수한 나무며 세상이 오롯이 하나의 색감을 이뤄져 있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마법 같은 풍경. 그저 바라보며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이 부린 예술을 둘러보던 중, 눈에 덮인 마을이 보았다.

연기 하나 밖에 올라오지 않는 마을의 풍경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눈이 와서 고생이겠네.'

나는 동료들의 장례를 치루겠다며, 저 외로운 마을에 홀로 남은 남자의 등이 떠올렸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도 눈이 왔을까.

만약 그렇다면, 눈더미에 파묻혀 영영 잊혀지길 바랐다. 그래야 오늘처럼 늦잠을 잘 일은 없을테니까.

"족제비?"

나보다 한참 작은 손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이게 뭐냐는 듯이 쳐다보니, 목도리를 감은 꼬마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우면 춥다고 말해. 족제비는 약골이니까 챙겨줄게."

누구 딸내미인지 몰라도 거참 듬직하다.

바람꽃은 내 손을 잡고 나보다 짧은 다리로 앞장 서서 걸었다.

새하얀 눈밭에 조그맣고 귀여운 발자국이 생겼다.나는 그 옆을 따라 걸었다.차가웠던 공기가 어느새 포근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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