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14화 (114/117)

〈 114화 〉 겨울나기

* * *

조금씩 흩날리는 눈꽃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올해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첫눈이라고.

동시에 내가 머물게 된 세상에서 보는 첫번째 눈이라고.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저 시릴 정도로 아름다워서 왠지 먹먹해졌을 뿐이다.

밤새 내린 첫 눈으로 만들어진 설원은 내 발목이 빠질 정도로 소복했다.

나는 오랜만에 눈길 위를 걸었다.

뽀드득, 뽀드득거리는 소리와 푹신한 감촉에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소리가 좋아했다.

일부러 눈이 쌓인 곳을 찾아 걷다가 미끄러진 적이 제법 있었다.

어른이 되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조금 씁쓸해진 나는 괜히 동심을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람람아, 눈 밟을 때 왜 소리가 나는 줄 알아?"

"응? 몬데?"

호기심에 쫑긋 움직이는 강아지귀.

다짜고짜 정답부터 요구하는 모습이 당돌했지만 귀여워서 봐줬다.

'눈을 이루고 있는 얼음 결정이 부….'

박식한 척하며 이론을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조금 짓궂은 농담이 뇌리에 떠올랐다.

"눈에는 눈의 요정이 살고 있거든."

"에, 진짜??"

화들짝 놀라 제 발밑을 확인하는 바람꽃.

생각한 것보다 순진한 반응이 나와서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와아~!"

댕댕이가 대단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 봤다.

존경과 신뢰가 담긴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의외로 부담스러웠다.

'진짜로 믿을 줄이야….'

똑부러진 녀석이라서 의심할 줄 알았는데.

어째 순진무구한 애를 속인 기분이라서 괜히 양심이 찔렸다. 그 탓에 눈의 요정에 대한 충격적인 반전을 꺼낼 수 없게 됐다.

백지에 발자국을 찍는 건 눈밭으로 충분하다.

동심을 짓밟으려한 것을 반성하며, 나는 진실을 가슴 속에 조용히 묻어두기로 했다.

"그래서 뽀드득 소리는 왜 나는거니?"

그런데, 열살배기보다도 호기심 많은 존재가 옆에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동심을 지켜줄 나이와는 거리가 먼 연령대인지라,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진실을 들려줬다.

­뽀드득.

'이거 눈의 요정이 밟힐 때 나는 소리래요.'

'…….'

기대하던 레베카가 크게 흠칫! 하더니,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나를 째려봤다.

구제불능의 쓰레기를 보듯 경멸하는 눈빛….

상상이상으로 반응이 격하다. 감당하기 벅찬 자괴감과 두려움이 들었으나 간신히 버텼다.

슬슬 묘한 쾌감마저 생기려고 할 때, 레베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째서 사내에게 자식을 맡기지 말라고 하는지 알겠구나."

아니, 나만큼 애들이랑 잘 놀아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괜스레 섭섭함을 느낀 내가 소심하게 반박하자ㅡ

"그대는 놀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노는 거잖니? 다 큰 어른이 철부지처럼."

…레베카의 입담이 오늘따라 매서웠다.

뭘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어쩌면 동심을 파괴 당한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디즈니 이야기를 유독 좋아했었지.

'그 전날 밤에도 렛잇고를 따라 불렀고.'

풉, 엘사인 줄.

의외로 동심을 간직한 건 이쪽일지도 모르겠다. 소녀 감성 같으니.

**

댕댕이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는 한적한 공터였다.

만약 이곳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숲 속에 생긴 땜빵처럼 보였을 것 같았다. 지대도 평평해서 눈 놀이하기에 적절했다.

'산 속에서 잘도 찾았네.'

그것도 눈 덮힌 산속에서, 그것도 임시 야영지인 동굴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그것도 내게 보고도 하지 않고…!

'쯧, 겁도 없는 녀석들.'

몰라서 용감한 건지… 꼬맹이들끼리 참 멀리도 왔다.

나는 내심 언짢았지만 일단 내색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용케도 이런 장소를 발견했다면서 칭찬하는 척했다.

그러자,

"흐흥~ 위대한 늑대한테 이 정도는 식은 고기 먹기지!"

댕댕이 녀석이 냉큼 미끼를 물었다.

자신의 공이라며 우쭐거리는 모습이, 회 뜨기 직전의 펄떡거리는 활어처럼 하찮아 보였다.

'요즘 살이 통통하게 올랐네.'

나는 풍성하고 작은 머리통을 정성스럽게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참 잘 '못' 했어요."

"잉?"

­콩!

미리 봐둔 정수리에다가 '나쁜 어린이' 도장을 찍었다.

"아야!?"

바람꽃이 제 정수리에 두 손을 포갰다.

그러고는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갸우뚱했다. 갑자기 놀아주지 않는 주인을 보며 당황한 댕댕이처럼.

"왜 때…."

"누가 니들끼리 돌아다니래. "

나는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전에 그랬지. 어디 가면 간다고, 나나 레베카에게 알려주고 가야한다고. 기억 안 나?"

"…해써, …요."

바람꽃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지금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저자세를 취했다.

"알면서 왜 그랬어? 혹시나 조난이라도 당하면, 곰 같은 게 튀어 나왔으면 어쩔 뻔했어?"

"그거라면 내가 냄…."

"그래서 지금 너가 잘했다고 말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말해. 그럼 이제 더이상 싫은 소리 안 할게."

내가 굳은 얼굴로 조곤조곤하게 말하자, 바람꽃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

침묵은 반항이라기보다는, 반성인 듯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솟은 강아지귀가 축 쳐져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에고, 기가 팍 죽었네.'

항상 명랑한 아이가 시무룩해진 게 조금 안쓰러웠지만.

나는 이 또한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바람꽃에게도 억울한 부분이 있으리라.

그녀는 수인족 특유의 뛰어난 후각과 예민한 감각이 가졌으며, 레베카라는 별격의 존재가 알게 모르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한들.

잘한 건 없다.

여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다.

비교적 안전한 도시에서도 방심할 수 없는 마당에. 고작 열살배기가 기별도 없이 산 속을 쑤신다니… 상상만으로도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만의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 때는 이미 늦어.'

언제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망할 놈의 세상은 여리고 약한 자들에게 더 비정했다.

그런 주제에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크고 작은 역경을 보내곤 한다.

그러니 쓴소리를 아끼는 것은 아이들을 망치는 일에 불과했다.

적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는 울타리가 있어야 한다. 그게 약속이자, 규칙이다.

"음."

그런 내 의도를 아는 건지.

평소 애들을 감싸고 도는 편인 레베카는 내 훈육을 지켜볼 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의외로 단호한 엄마가 될 듯 했다.

'나중에 자녀 교육은 걱정 없겠네.'

용마망의 새로운 면모에 살짝 감탄한 뒤.

나는 그렁그렁한 푸른 눈을 보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잔소리는 여기까지 할까.'

훈육은 길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바람꽃처럼 영민한 아이에겐 짧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걸로 충분했다.

"람람아.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닌 거 알지?"

"…웅."

누가 북부의 위대한 늑대는 우는 법을 모른더랬다.

그런 바람꽃은 목소리가 살짝 잠겼을 뿐,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착하네.'

역시 어른스럽고 아량이 넓은 아이다.

허나, 그만큼 쓴소리를 자주하고 유독 놀려먹은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 졌다.

저번에도 한 번 소원권을 챙겨줬듯.

채찍 뒤에는 적당한 보상이 있어야 나중에 미움받지 않는다.

"원래 미운 자식한테 고기 하나 더 준대."

"…왜?"

바람꽃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기야, 나도 어릴 적에 저 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미운 놈을 챙겨줘야해? 예쁘고 착한 애를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솔직히 지금도 썩 공감하지 않는 속담이지만, 현 상황을 포장하기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서 꺼냈다.

나는 갈고리를 수집하는 녀석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을 혼내지 않아. 그냥 관심 끄고 방치하지."

"……?"

"봐봐. 내가 정말로 람람이를 미워했으면, 이렇게까지 화를 냈을까? 어디서 뭘 하든 신경도 안 쓰지. 그러니까 화를 낸 건, 내가 람람이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

"……!"

논리정연한 내 말에, 바람꽃이 벙찐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흠, 생각한 것보다 리액션이 약하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빼액 지를 줄 알았는데. 기대가 빗나가서 살짝 아쉬웠다.

"머, 머라는 거야…."

한참 뒤에 바람꽃이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히 삐친 건지 녀석은 끝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

"람람아, 천천히 좀 가. 얌마, 같이 가자니까?"

"싫어! 따라오지마!"

삐친 댕댕이가 기어코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덕분에 나와 레베카는 함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되어 덩그러니 있었다.

나는 총총 멀어지는 조그만 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중에 쟤가 좋아하는 거 해주면 기분 풀겠죠?"

"쓰레기."

…내, 내가 잘못 들었나?

화들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니 레베카가 샐쭉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상냥한 마망은 어디가고, 웬 일진녀가 있냐….

순간 학창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암것도 아닙니다요."

딱히 무서워서 눈을 피한 게 아니다.

그냥 오늘따라 눈나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서….

그렇게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 레베카 님에게 빌빌거리고 있을 때.

바람꽃이 합류한 나머지 꼬마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삐약삐약 소리를 질렀다.

"피터어!"

새하얀 눈밭과 대비되는 까만 색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여백에 스며드는 먹처럼. 허공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왠지 모를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예쁘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색을 저주라고 여겼으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을 알려주니, 수줍게 웃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을까.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칭찬으로 크게 혼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런 데이지를 뒤따라,

­아빠!

하얀 아이가 깡총깡총 뛰어오는 모습이 눈토끼를 닮았다.

눈발처럼 휘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신비로웠다.

'어쩌면 눈의 요정이 따로 있는 게 아닐지도.'

그렇기에 이 겨울이 끝나면, 눈과 함께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허나, 옅게 물들어 있는 붉은색이, 앞으로 다가올 그녀의 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여서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뛰어오는 두 아이를 멍하니 보다가 외쳤다.

"애들아 뛰지마! 넘어져."

"응! 알써."

거참, 대답만 잘하네.

짧은 다리는 여전히 바빠 보이는지라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신났네.'

그래도 그들의 모습이 내겐 기꺼웠다.

눈을 싫어하는 아이와, 눈을 처음 보는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아무래도 내게 혼쭐이 난 댕댕이가 놀아주긴 잘 놀아준 모양이다.

"으익…."

"아이고, 거 봐. 내가 넘어진댔지?"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이들에게 상냥하지 않았지만.

마냥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님을,함께 알아가기를 바라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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