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겨울나기
* * *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놀이가 있다.
"피터! 뚠뚠이 좀 쌓아줘!"
참고로 '뚠뚠이'란 데이지가 데굴데굴 굴려서 만든 눈뭉치의 이름이다.
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어 보고자.
눈놀이의 입문자인 데이지에게는 눈사람의 머리 파츠를 맡겼는데.
얘가 눈을 굴리다가 정을 붙인 건지, 눈뭉치에다가 '뚠뚠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렸다.
'왠지 옛날 생각나네.'
이 나이대의 애들이 하는 행동이 비슷한가보다.
한창 귀여운 시절의 혜은이(네짤이라고 말하던 시절)도 눈사람에게 이름을 붙이곤 했으니까.
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없게 됐지만….
아무튼!
뚠뚠이는 우리 꼬꼬마가 작은 손으로 빚어낸 역작이다.
설령 잘 못 만들어도 무조건적으로 칭찬하리라고 다짐했다.
"허…."
허나, 나는 뚠뚠이의 실체를 목도하고는 침음할 수 밖에 없었다.
"응? 피터, 왜 그래?"
"…아니, 예상보다 좀 크구나 해서."
데이지 표 눈덩이는 과장없이 내 몸통만했다.
혹시나 해서 슬쩍 들어봤는데, 역시나 그 묵직함이 상상 이상이었다. 워낙 무거워서 그런지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았다.
눈사람을 만들라고 했더니만… 뭔 공성용 병기를 만들어 놨다.
'지가 무슨 윌럼프도 아니고.'
나보다 한참 작은 소녀의 괴력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 살벌한 크기의 눈덩이가 2층이라는 사실에 눈앞이 아찔해 졌고.
이걸 들어도 내 허리가 무사하려나….
"안 돼?"
털모자를 쓴 귀여운 꼬마의 흔들리는 눈빛.
어쩐지 내게 실망한 것처럼 보여서, 근거 없는 자신감과 오기가 솟아났다.
애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지.
"안되긴 껌이지."
나는 소매를 척척 걷어붙이며 보란듯이 웃었다.
우리 애를 위해서라면, 집채만한 눈덩이라도 해치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뎃지야. 우리 뚠뚠이는 몸통으로 하지 않을래?"
내가 담당한 눈사람의 몸통 부분이 뚠뚠이보다 훨씬 작았다.
이대로라면 머리만 압도적으로 큰 슬픈 눈사람이 탄생할 게 뻔한 일!눈앞의 비극을 뻔히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에에. 왜?"
나는 의문을 표하는 뚠뚠이 엄마를 설득했다.
"뚠뚠이가 이대로 대두가 되면, 다른 눈사람한테 대갈 장군이라고 놀림 받을지도 몰라. 따돌림 당한 뚠뚠이는 자신을 만든 뎃지를 원망하며, 매일매일 눈물을 흘리겠지.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으로 따스한 햇볕을 쬐려고 할지도지…."
"지, 진짜루? 그럼, 어떡해…?"
데이지가 눈을 왕방울만하게 떴다.
세상의 어두운 일면에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나는 그에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진짜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회에서 외모 또한 경쟁력이거든. 그건 눈사람들도 똑같지."
"하아. 이 화상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옆에서 레베카가 애한테 참 좋은 걸 가르친다며 탄식했지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뎃지,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뚠뚠이가 어디가서 기 죽지 않게 미남으로 만들어 보자."
"아아! 할게, 할래! 미남으로…!"
데이지가 각오를 다진 얼굴로 두 손을 꼬옥 말아쥐었다.
'후, 간단하구만.'
나는 안심하며, 작은 손에 주먹을 맞댔다.
헌데 우리 꼬꼬마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근데, 뚠뚠이 여잔데…?"
아하.
그건 몰랐네.
**
눈사람 만들기, 눈싸움, 눈썰매, 보물찾기, 레슬링, 술래잡기….
거의 세시간 동안.
눈밭에서 할 수 있는 놀이는 다 하면서 꼬마들과 놀았다.
그 결과.
'아아. 하늘은 푸르구나.'
나는 눈 속에 파묻히기 직전인 시체 꼴이 되었다.
한창 에너지가 넘쳐나는 애들을 상대해주려니, 한미한 체력이 금세 바닥나 버렸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나보다 몸집도 작은, 조그만한 꼬마들은 어째서 지치지도 않는지…삼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그래도 누워 있으니 편하네.'
하늘을 지붕 삼고, 폭신한 눈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을 때.
내 위로 유려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붉고 화사한 머리카락이 꽃처럼 흐드러져 어쩐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 보며, 고운 눈웃음을 지었다.
"살아있니?"
"…죽은 자의 온기가 남아있습니다."
내가 앓는 소리에, 레베카는 키득거리더니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먼 정경을 바라보며 작게 허밍했다.
시원하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제법 익숙하게 들렸다.
'마음에 들었나보네.'
나는 레베카가 연주하는 허밍을 조용히 감상했다.
대충 부른 콧노래를 용케 예술로 승화했다고 생각하며. 고운 목소리를 가진 그녀인지라 노래에도 소질이 있나보다.
문득, 몽롱한 뇌리에 한가지 묘수가 떠올랐다.
나중에 듣고 싶은 노래가 생각나면, 레베카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상상.
그러다가 우연히 높으신 귀족의 귀에 내가 전파한 KPOP이 들어간다면….
'어쩌면 나, 이세계 천재 작곡가로 대박날지도…?'
물론 그럴 일은 없다.
애초에 양심이 찔려서 원작자라고 말하지도 못할테고.
'아쉽지만 한류 전파는 접어두자.'
혼자서 김칫국 마시는데, 뜨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실제로도 영롱한 루비색 눈동자가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였다.
"저, 왜 그렇게 보세요?"
"표정이 바뀌는 게 신기해서."
이상한 동물을 관찰하는 그런 감각인가.
이해한다. 나도 고양이가 줄넘기 하는 영상을 너튜브로 찾아보곤 했었다.
하지만 막상 관찰 대상이 되니 좀 민망해서 이야기를 돌렸다.
"여자는 찬데 앉으면 몸에 안 좋대요."
"누워 있는 그대만 할까."
"에이~ 저는 좀 다르죠. 남자잖아요."
"훗. 그래, 그래. 아~ 주 대견하구나."
…진짠데.
남자는 하체가 차가워야 하는데.
여러모로 할 말이 많았지만.
레베카에게 정자니 정소니 설명하기 뭐해서 그냥 넘어갔다.
"후후, 그대 또한 사내 아이구나. 내 앞에서 허세도 다 부리고."
헌데,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짓는 레베카가 조금 얄미웠다.
언젠가 이 주제로 논문이라도 써봐야겠다.
이왕이면 정밀 삽화까지 첨부해서.
그리고, 반드시 이 여자에게 낭독시켜야지.
그 때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리라.
**
해가 부쩍 짧아진 계절은 밤이 이르게 찾아온다.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이 하루의 끝을 알렸다.
"뚠뚠아, 잘 있어야 해…."
데이지가 오늘 사귄 친구에게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생애 첫 눈사람에 애착이 가는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눈물 겨운 이별 장면이지만… 눈사람의 크기가 너무 거대해서 그런가?
솔직히 내 눈에는 조금 징그러웠다.
뚠뚠이를 집에 데리고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땅콩! 춥잖아 적당히 안 해? 지금 안 오면 놓고 갈거야."
"그치만, 좀 만…."
발이 무거운 꼬마를 떼어놓는 역할 또한 친구였다.
바람꽃이 얄짤없이 등을 돌리자.
데이지가 뜨악하고 놀라더니 허겁지겁 쫓아갔다.눈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뭐 저런 얄팍한 우정이 다 있나 싶었다.
"가, 같이 가."
"흥. 다음에 한눈 팔면 안 기다려줄 거야."
틱틱거리면서도 걸음을 늦추는 댕댕이.
어쩐지 질투심 많은 여자친구의 대사처럼 느껴져서 실소가 나왔다.
나는 다음에도 쟤가 기다려준다에 삼시세끼를 걸 수 있다.
"그대여, 힘들지 않니? 아무래도 아가는 내가 맡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진짜로 질투심 많은 여자는 따로 있었다.
나는 은근슬쩍 뻗으려는 나쁜 손을 등으로 방어하며 말했다.
"아뇨. 가볍고 따뜻해서 오히려 좋은데. 그리고 레일라도 제가 더 좋을걸요? 그치?"
음냐….
아가용은 내 품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졸다가 우연히 그런 거지만, 나는 보란듯이 레일라를 고쳐 안으며 얄밉게 웃었다.
"으윽."
사이 좋은 나와 레일라를 보며,레베카가 분통하다는 듯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 아가인데…."
울먹이는 목소리에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이게 그 유명한 NTR인가 뭔가하는 그거인가 싶었다. 다만, 너무 쓰레기가 된 기분이라 나중에 순순히 애를 돌려줬다.
**
《이 쓰레기 같은 고깃덩어리! 지금 잠이 안 오느냐? 지금 당장 여에게 고해성사를 해야할 것이야!》
이제 발을 닦고 누우려니 듣게 된 험담이었다.
나는 몰래 내 침낭을 비집고 들어온 종이조까리를 끄집어내며 말했다.
"저기요. 오늘은 많이 피곤한데. 만약 하실 말씀 있다면 내일 해주세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저런, 피곤하다니. 아량 넓은 여가 이해해… 줄 거 같으냐?! 아해야, 당장 눈을 뜨거라! 야! 눈 뜨라고!》
…어쩌다가 이런 성가신 거랑 엮였을까.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포근한 침낭 속에서 기어나왔다.
짝퉁 신의 하실 말씀이 다소 중요하다고 생각되니 어쩔 수 없었다.
주섬주섬 겉옷을 입고 있으려니.
에오로스가 이제 와서 내숭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와의 대화를 위해 차림새를 가다듬는 아해의 태도가 썩 보기 좋구나. 비록 지금껏 여를 방치했지만….》
"…바깥에 내다버리면 될까."
아차. 속 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 이, 이 불경한…!》
"어허. 진정해요. 조크입니다, 조크."
뒷목 잡고 부들부들 떠는 듯한 종이조까리를 대충 달래가며 텐트에서 벗어났다. 아무래도 곤히 자는 아이들이 있는 장소에서 대화할 수는 없으니까.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나를 보더니, 에오로스가 새초롬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시건방진 아해야. 날이 어둑하니 횃불 정도는 들고 다니거라. 뒤통수가 깨진 뒤에는 후회해봐야 늦노라.》
묘하게 악담처럼 느껴지지만.
나름대로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허나, 자다가 깨서 기분이 좋지 않은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단호히 말했다.
"걱정. 곤란."
《짜, 짜증나… 진짜 뭐 이런, 개….》
제대로 빡쳤는지 에오로스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자려고 하는 사람을 깨웠으니 자업자득이다.
나는 한결 조용해진 것에 감사하며, 나와 함께 달밤에 체조하러 갈 파티를 모집했다.
"야, 심심하지? 산책 가자. 안 자는 거 알아. 자고 있어도 깨울 거고. 일어나."
"…아십니까. 저는 애완견 같은 게 아닙니다."
"미쳤냐? 당연히 아니지. 네가 뭐가 예쁘다고 개랑 비교해. 헛소리 하지 말고, 꿈 깨."
"……."
시어도어가 나를 미친 놈 보듯이 노려봤다.
항상 기분 나쁜 웃음을 유지하는 녀석이 이토록 감정을 드러내다니. 타인의 감정을 지배하는 기분이 제법 유쾌했다.
나는 힘겹게 일어난 연금술사에게 기름 램프를 내밀며 말했다.
"램프 들어."
"부디, 언젠가 뒤통수에 돌을 맞길 바랍니다."
시어도어가 어딘가 귀에 익은 저주를 빌면서 램프를 받아갔다.
《아해와 같은 자를 두고 최저라고 부르노라.》
에오로스가 묵언 시위를 관뒀는지 비아냥거렸다.
상대해 주기 귀찮았던 나는 그녀에게 단 두음절로 응수했다.
"반사."
《……아아악!》
빡친 종이쪼가리가 돌고래처럼 고주파를 내질렀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시하려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시커먼 물체가 우수수 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정체를 파악하고서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왓더벳!'
동굴 천장에 겨울잠을 자던 불쌍한 박쥐 떼였다.
망할 종이쪼가리가 쏘아올린 초음파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인간에게나, 박쥐에게나 피차 끔찍한 재앙이 닥쳤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움움, 이헤 무흔 나리히?"
몰래 야식을 먹고 있던 레베카 덕분에 상황을 조기 수습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 해피타임을 방해당한 용마망의 분노와 잔소리를 맞이해야 했다.
"그, 그치만. 모든 잘못은 이 종이조까리가."
"그대가 주워 왔으니 책임지고, 이런 일이 없도록 간수해야할 것 아니니!"
바가지 긁히는 나를 보며, 만악의 근원이 홍소를 터트렸다.
《냐하하! 감히 여를 능멸한 업보이니라!》
빌어먹을 재앙신 같으니.
빠른 시일 내로 갖다 버리자고 결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