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겨울에 찾아온 손님
* * *
어쩌다보니 밤나들이를 나오게 됐다.
달빛에 반짝이는 푸르스름한 정경이 고즈넉하고 드넓었다.
수시로 불어오는 삭풍이 차가웠으나, 살짝 달아오른 등의 열기를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쓸쓸한 기분에 멍하니 있노라니.
어디선가 산통을 깨는 얄미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해야. 아주 잡혀 살더구나. 한심하기는, 풉.》
……후우, 하마터면 주화입마 걸릴 뻔했네.
특히나 마지막에 일부러 낸 듯한 웃음소리는 정말로 위험했다. 나는 지건 마려운 것을 간신히 참으며 눈을 부라렸다.
"시비 걸지 마시죠. 지금 누구 때문에 쫓겨난 건데."
언성을 높이니 새삼 등이 욱신거렸다.
이 저주 받은 폐지가 벌인 대환장 박쥐소동의 연대 책임으로 등짝스매쉬를 맞았다.
내가 이 추운 날에 밤산책 나온 것도, 사실 용마망의 잔소리로부터 피난 나왔다는 게 학계의 점심….
《흥! 누구 때문이긴? 당연히 아해가 여를 업신여긴 잘못이지 않느냐. 한 번만 용서해줄테니, 앞으로 처신을 잘하거라.》
남의 어깨에 멋대로 들러붙은 거머리답게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두께가 1cm도 안되는 종이조까리 주제에… 낯짝 하나는 비브라늄 방패 급으로 튼실했다.
'오늘 둘 중 하나는 죽어야겠군.'
신격이고 나발이고….
내가 검지와 중지를 꼿꼿이 세우며 고뇌하자.
《아해야. 긴히 할 말이 있단다.》
문득 에오로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할 말? 그러고 보니 얘랑 맞짱 뜨려고 으슥한 곳으로 나온 게 아니었지.
"할 말이 뭔데요? 추우니까 가급적이면 짧게 끝내줘요."
《……그, 그게 있지 않느냐.》
에오로스는 답답할 정도로 뜸을 들이다가 운을 띄웠다.
《좀 처럼 잊혀지지 않는구나. 여와 아해의 첫 만남… 그 운명적인 순간이.》
"뭐… 인상 깊은 기억이긴 했죠."
웬 종이쪼가리한테 도둑놈이라고 매도 당하고, 태워 죽이겠다는 살해 협박까지 들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스펙타클한 순간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지 않네.
그때는 정말로 고추 바사삭이 되는 줄 알았다. 얘가 등신이라서 망정이지.
내 미묘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오로스는 왠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그, 비록 처음 시작이 어색할지도 모르나. 우, 우리…… 만남은 운명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뻔뻔한 녀석이 갑자기 우물쭈물거린다.
나는 수줍은 염소마냥 떨리는 목소리에 미간을 모았다.
'우리? 운명?'
이거, 뭔가 묘한 촉이 온다.
한밤 중의 밀담 요청.
그리고, 분위기 좋은 달빛 아래에 용기내어 내뱉는 대사까지.
이 장면… 왠지 드라마에서 본 것 같다.
《아, 아무튼! 여와 아해의 관계를….》
…설마?
소름 돋은 나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고백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그쪽은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무, 무순….》
갑자기 무의 새싹을 찾는다.
저런. 충격이라도 받을걸까? 조금 불쌍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단호해야 한다.
"너무 날씬한 것도 좀 별로고, 솔직히 성격도 하자가 있으시잖아요. 크흠, 실연이 괴롭겠지만 더 좋은 인연을 찾길 바랍니다."
《……에?》
에오로스는 멍청한 외마디를 끝으로 반응이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최강의 스탠드를 사용한 기분이 이러할까. 기분이 살짝 high하다.
《미, 미, 미….》
고장난 라디오처럼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뒤에 올 반응을 예측한 나는 재빨리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미, 미친게냐?!! 여, 여가 뭐가 아쉬워서 씹다 만 고깃덩어리에게…! 고, 고, 고백을 할 리가….》
잔뜩 흥분한 에오로스가 말도 제대로 못하며 발작했다.
충분히 엿을 먹였다고 생각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아님 말고."
《……! 가, 감히 여를 능멸….》
"에이, 왜 정색하고 그래요? 아니면 아닌 거지. 누가 보면 진짜로 마음 있는 줄, 풉."
《…#@@#$%!》
아이고, 우렁차기도 하지.
나는 수명이 늘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휘어청 밝은 달 아래를 거닐었다.
.
.
"아, 맞다. 그래서 본론이 뭐였죠?"
《……괘씸한 것. 저리 꺼지거라. 말 안해줄 거다.》
"그럼 저야 좋죠. 어서 제 몸에서 떨어져 주시죠? 각자 갈 길 가요."
《이, 이 납븐….》
정작 갈 곳이 없던 기생충은 울먹이다가 더듬더듬 제 사연을 털어놨다.
**
"그 분들은 겨울성으로 간다고 했습니다요. 아마 삼주 전입니다요."
한나라는 이름의 여자가 해괴망측한 말투로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기사는, 이 괴상한 여자가 묘사한 상인 일행 중에 자신이 찾던 자가 있음을 직감했다.
시오네는 곤히 접어둔 수배서를 펼쳐 한나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회색 머리, 푸른 눈, 귀족적인 미형. 이 자가 그대가 본 남자인가?"
"아아… 실물만도 못하나 확실히 그 분이십니다!"
곰처럼 생긴 여자는 어쩐지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여기사는 수배서로 달려드는 한나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뒤, 가면을 쓴 수도사에게 말했다.
"일에 차질은 있습니까."
[이 자에게 이단의 기운이 느껴지나… 희미하군.]
차가운 미성에, 한나는 뜨끔했지만 애써 침착했다.
신체가 바뀌면서 등에 새긴 문신이 사라져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 쯤.
[흠. 애매해.]
섬뜩한 느낌의 수도사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한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죽을 맛인 한나를 구원한 것은, 어딘가 낯이 익은 절름발이 소녀였다.
"저기, 이단이라는게뭐예요?"
엘리의 말은 평소보다 빨랐다.
시오네는 조금 의아했고, 수도사는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소녀를 넌지시 보다가 답했다.
[…여신을 음해하고, 잘못된 교리와 이념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무리들.]
언제나 냉정한 그의 목소리가 좀 더 서릿발처럼 느껴졌다.
여신과 이단. 16년 동안 산 속에서만 살아온 엘리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지만, 소녀는 일단 자신을 보는 가면을 쓴 남자에게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이단은 불태워야한다. 모조리.]
남자는 눈밭 아래에 수많은 시신이 묻혀있음을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앞의 소녀에겐 굳이 말해 않았다.
[이단을 보면 내게 알려라. 그들에게 얼씬도 하지말고. 위험한 놈들이다.]
"네네. 기사님만 믿을게요."
수도사가 드물게 말이 많아졌다. 다만,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경고 차원에서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엘리는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는 이야기일텐데.'
시오네는 저런 이야기도 웃으며 들어주는 엘리가 천사같다고 생각했다. 보다 못한 그녀는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못난 남자에게 말했다.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면 곤란합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리 말한 수도사는 멀뚱히 서 있는 한나를 노려봤다.
광기 어린 안광이 번뜩인다. 그녀는 저 섬뜩한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느낀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기사님?"
[…….]
문득 수도사는 새끼 고양이처럼 다가온 엘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꺅! 기, 기사님?"
[넘어진다. 출발하지.]
그는 소녀를 보릿자루처럼 옆구리에 끼며 걸음을 옮겼다.
시오네는 어쩐지 새끼고양이를 물고 가는 어미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며 뒤따라갔다.
그들이 멀어지자, 한나가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사, 살아난 건가?"
소문으로만 듣던 교단의 악명 높은 심문관을 만나게 될 줄이야.
만약 그 분을 만나서 새롭게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무래도 아캄 마을은 터가 영 좋지 못한 듯했다.
"빌어먹을, 어서 여길 뜨던가 해야지 원. 동지들도 이해하쇼."
한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짐짝처럼 실려가는 갈색머리 소녀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며.
**
눈과 먼지로 오랫동안 두드려진 높다란 성벽.
투박하고, 단조로운 외관은 마치 거대한 벽돌을 굽이치는 가파른 산맥에 기워놓은 듯 보였다.
어떠한 미적 감각도 느껴지지 않으나,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함으로 무장한 성벽은 더없이 장엄해 보였다. 또한 무수한 전투와 핏물로 쌓아올린 역사는 깨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겨울성.
하루가 다르지 않게 울려퍼지는 북소리와 뿔피리.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린 계절이었으나.
겨울성에 돋아난 창칼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
.
눈보라는 그쳤으나, 눈안개가 낀 시계는 흐릿하기만 했다.
허나 겨울성에 근무하는 초병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기에 큰 장애는 아니었다.
예민한 병사 하나가 스르륵, 스르륵 미끄러지는 소음에 크게 외쳤다.
"마차다!"
"엥, 진짜?"
성벽에서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우루루 일어나 그 아래를 내려다봤다. 삼년 간에 유독 평화로워 지루하게 느껴진 겨울성에 찾아온 이변이 제법 흥미로웠다.
"오, 진짜네."
"이 시기에 별일이야. 어떤 머저리인지 몰라도 용감해."
"저거 방한도 제대로 안해 놨네.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나."
"이봐, 엊그제 트롤이 왔다가지 않았어?"
성문을 열어야 하네 말아야 하네.
서로 옥신각신하며 웅성거리던 병사들 사이로 가죽을 덧댄 갑주를 입은 기사가 올라와 말했다.
"일동, 정숙."
그제야 느슨했던 병사들이 군기를 차리며 입을 다물었다.
기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치열했던 과거와 달리 평화 속에서 병사들이 조금씩 무뎌진다며.
"살만해졌나 보군. 어떤 자식이 성문을 개방하겠다고 했나? 칠년 전은 벌써 까먹었어!"
"…아닙니다!"
간악한 괴물은 미끼를 사용하는 법을 안다.
지난 날, 부상당한 수하를 구하기 위해 성문이 열었던 성주가 매복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도저히 망각할 수 없는 상처를 상기한 기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빠져."
구경 나온 병사들을 성벽에서 물리고.
기사는 마나를 가득 실은 목소리로 전했다.
"신원을 밝히시오!"
회색 성벽 아래까지 다가온 말 두필의 마차.
비록 활시위는 당기지 않았으나, 노련한 북부의 사냥꾼들이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마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털옷과 후드를 둘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었다.
눈이 밝은 기사는 말려올라간 소매 사이로 보이는 옷이 수도복 임을 알아차렸다.
"혹시 교단에서 나오셨소?"
"지금은 그저 수행 길에 오른 여신의 종입니다."
제법 쾌활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기사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거 고생이 많으시군. 헌데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시오?"
"아, 이거 실례."
남자는 후드를 걷어 얼굴을 내보였다.
흔한 갈색머리를 지닌 젊은 청년이었다. 확실히 이 근방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무슨 용무로 찾아왔소?"
"겨울성의 헌신과 희생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 노고에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고자 먼 길을 왔습니다."
이 험지에 자원봉사자라….
함정일까? 그도 아니면 황실의 첩자?
기사는 난감한 듯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빈 손으로 오기 뭣하여 몸을 데울 술과 가죽, 건량을 가져왔습니다."
"…성의는 감사하나, 교단 쪽 사람 임을 증명할 수 있소?"
교인으로 사칭하는 사기꾼이 비교적 흔하다.
만약 저자가 목걸이나 증명서 따위를 내보이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기사에겐 진위를 파악할 안목이 없었으니까.
즉, 무엇을 선보이듯 완곡하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거면 됩니까."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양손에 은은한 빛을 담아냈다.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빛.
…이건 말로만 듣던.
"오, 맙소사! 성력이라니."
"저 정도 수준이면 대신관 급 아니야?"
"몰라! 본 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몰래 훔쳐보고 있던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기사도 내심 놀랐기에 병사들의 뜨내기 같은 반응을 이해했다.
"키야, 이런 변두리 촌구석에서 볼 게 될 줄이야."
마지막 새끼 기억해둔다.
겨울성의 기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수하들을 손수 걷어찬 뒤 말했다.
"겨울성의 손님으로 받아들이겠소."
그의 말에 젊은 교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근데 성주 님께 말씀하지 않으셔도…."
"내가 성주요."
교인은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겨울성의 주인이기에 들을 수 있었다.
…성주가 왜 여자냐?
'쯧, 별 이상한 놈이 찾아왔군.'
이솔렛 폰 그레이가드는 눈썹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