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17화 (117/117)

〈 117화 〉 겨울에 찾아온 손님

* * *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회색 산맥.

삭풍과 얼음, 그리고 마물 외에 나는 것이 없기로 유명한 땅이었다.

허나, 그런 척박한 험지에도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려는 괴짜들이 있었다.

천년 전 산맥 위에 거대한 성벽을 세우고, 스스로 제국의 방패가 되기로 선언한 자들.

북방 그레이가드 가문.

중부에 사는 부유한 귀족은 그레이가드 가의 시조를 두고 말한다.

주어진 낙원을 차버리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어리석은 자라고.

초대 그레이가드의 가주, 레오닉 폰 그레이가드는 현 제국을 건국한 위대한 핏줄의 친동생이었으므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북부로 떠난 레오닉의 선택을 바라보는 후인들의 견해는 판이하게 나뉜다.

레오닉이 권력욕에 미친 형제를 피해 북방으로 도망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정말로 위대한 사명감을 지닌 영웅이었다고 일컫기도 했다.

이미 천년이란 세월 아래에 파묻힌 역사이기에 진실을 알 길이 없었으나. 그 누구도 회색 산맥, 그 너머에 숨어있는 '그들'을 견제해온 그레이가드 가문의 헌신까지 폄하하지는 못했다.

'아직까지는.'

언젠가 겨울성의 헌신이 헌신짝처럼 버려지게 되리라.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글귀에서나 보던 겨울성의 성채를 둘러봤다.

생각한 것보다 주둔지의 상황이 제법 괜찮았다.

성벽은 어느 하나 무너진 곳이 없었고, 병사들의 상태나 분위기 또한 비교적 양호해 보였다.

'외부에 배타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아직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기 전이라 여유로운 것이다.

그 말은 즉슨, 저들에게 닥쳐올 재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문득 기운 빠진 앳된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피터, 우리 이제 다 와써…?"

마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데이지였다.

녀석은 하얗고 통통한 볼따구를 내 어깨에 묻더니 축 늘어졌다.

'많이 지겨웠나 보네.'

어릴 적에 멀리 가족여행을 갈 때가 생각났다.

나나 혜은이도 장시간 차 안에 있으면 지루함을 못 견디고 칭얼거리곤 했었다.

애들이 언제 도착하냐고 보챌 때마다, 부모님들이 꼭 하는 거짓말이 하나 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러면서 매번 두 세시간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모님이 말하는 '거의'는 한참 남았다는 뜻이었다.

'이제 그 얄미운 대사를 내가 치고 있지만.'

막상 달래는 입장이 되니, 부모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나 또한 데이지나 바람꽃이 칭얼거리면 '거의 다 왔어' 외에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뭐, 그래도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나는 병든 병아리처럼 늘어진 데이지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제 진짜로 다 왔어. 기운내."

그러자, 우리 꼬꼬마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되물었다.

"…진짜진짜?"

흠, 서른 번 정도 구라친 탓일까?

얘가 반쯤 불신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순진한 꼬마라도 여러번 속여먹으면 학습하나 보다.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소녀의 변화가 조금 씁쓸하다.

나는 흑화한 데이지에게 진심을 보이고자,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펼치며 장담하려고 했다.

"진짜 진짜 리얼…."

"씁, 그대여. 교인답게 행동해야지."

옆자리에 앉은 수녀님이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수녀복을 차려입은 레베카였다.

낯선 복장인 그녀의 모습은 뭔가 오묘하게 보였다.

나를 따라서 성직자 코스프레를 하긴 했는데… 어째 레베카는 나와 다른 의미로 코스프레 같았다.

대체 무슨 차이 때문인지.

"그, 너무 빤히 쳐다보지는 마렴…."

"아. 알겠습니다. 자매님."

일단 펑퍼짐한 수도복이 아님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드르륵.

성벽 너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기척을 느껴졌다.

곧 있으면 저 굳건한 성문이 열릴 것처럼 보였다.

레베카는 겨울성을 제대로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흥미를 내비추며 말했다.

"의외로 별 탈 없이 받아들여 졌구나."

"신원만 확실하면 쟤들은 고양이라도 데려갈 걸요?"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겨울성은 언제나 인력난에 허덕인다.

위험천만한 괴물과 드잡이 해야하는 근무지인 만큼, 죽어 나가는 병사들의 숫자도 천문학적이었다.

그나마 과거에는 제국 전역에 모병권을 행사하여 인원을 충당 했으나, 현재는 황실의 압박으로 인해 그마저도 쪼그라든 상태였다.

지원도, 병력도 예전 같지 않은 겨울성의 상황.

지금이야 남하하는 몬스터들이 극적으로 줄어들어서 위기는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폭풍전야.'

언제나 재앙이 닥치기 전에는 징조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재앙은 인간의 방심에 의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야기된다.

나는 앞으로의 전개를 알고 있기에 확신했다.

'막아야할까? 아니면….'

나 혼자만 아는 고민에 잠겨있을 때.

데이지가 왜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피터, 고냥이를 왜 데려가? 귀여워서?"

애들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일단 나는 우리 야생소녀가 고양이는 식량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에 내심 안도했다. 그 때의 토끼랑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귀여워서 줍는다라?'

뭔가 황당무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데이지를 보고 있으니, 의외로 그럴 듯한 논리였다고 감탄했다. 얘, 내가 데려와 버렸으니까.

"뎃지. 혹시 천재야?"

"응? 내가 천재??"

동그랗게 뜬 눈, 어벙한 말투,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까지… 솔직히 그리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천재는 머리가 좋은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어떤 분야에 특출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율동 천재도 천재긴 하잖아.'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하면 먹방 천재라든가, 키작음 천재라든가 붙여주면 되겠지.

**

쿵! 하는 거대한 소음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피어오르는 먼지와 산산이 흩어지는 얼음 조각을 보고 있노라니.

­크오오오오오오오.

회색 산맥, 저 너머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일순간 몸이 경직되는 느낌.

일반적인 짐승의 하울링과는 궤가 달랐다.

"피어(fear). 터줏대감 같은 녀석이 있구나. 그대가 말한 이변일지도 모른다."

레베카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속삭였다.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겨울성이지만, 포브스가 선정한 최악의 근무지답게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무장한 병사들이 다가와 마차 주변을 호위했다.

외부인을 검문하기 보다는 저 산맥 너머의 존재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는 인상이 좋아보이는 병사에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저기 형제님. 저 울음소리가 어떤 짐승의 것인지 아십니까?"

"아마도 몇 년에 회색 산을 점령한 녀석일 겁니다. 저희끼리는 웬디고(Wendigo)라고 부르는데…. 가끔씩 울어댈 뿐 하산한 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하하!"

말이 많고, 친화력이 좋은 녀석이었다.

그런 병사의 안심하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들렸다.

무사히 겨울성 안으로 들어선다.

묵직하게 내려오는 성문을 바라봤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산맥 너머.

심연 속에 숨어있는 괴물이 지켜보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

3주만에 도착한 겨울성이었으나, 그동안 쌓인 여독을 해소할 시간이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기사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사제님. 성주께서 찾으십니다."

"……."

성주라면 아마도 '그 여기사'를 말하는 거겠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정보를 받아들이자 잠깐 뇌정지가 왔다.

'겨울성주가 어째서 여자일까.'

겨울성의 주인은 로판에서 흔히 북부대공이라고 불리는 포지션이었다.

험난한 북방에서 괴물과 맞서 싸우며 성장한 초인이며, 매사 냉정하면서도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자랄까.

'거기에 흑발적안인 게 국룰이지.'

물론, 작중에서의 겨울성주는 황실의 피를 물려받은 금발벽안의 미남자였다. 북부가 현 황제에게 견제를 당한 이유도, 그레이가드 가에게 황위 계승권이 있기 때문이었으니 틀림없다.

그런데, 그 북부대공께서 왜 갑자기 TS하고 난리인지가 최대의 미스테리다.

'설마, 얘도 TS물약을 주워 먹은 경우인가?'

…시어도어, 또 너냐?

킹리적 갓심이 들었지만 섣불리 내릴 판단은 아니었다.

일단 겨울성주라고 자칭한 작자와 부딪쳐 봐야할 듯 했다.

"사제님?"

"아, 예. 당연히 찾아뵈야지요. 오히려 기다리던 만남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병아리들의 인솔하게 될 레베카에게 말했다.

"자매님. 어린 자매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레베카에게 존댓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의외로 존댓말 할 줄 아는구나, 하고 감탄했으나… 나를 바라보는 루비색 눈동자는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디 성주께 허튼 짓하지 마시고요."

"어… 허튼 짓이라뇨?"

"글쎄요?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을게요."

레베카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뭔가 미묘했다.

"털뭉치, 허튼 짓이 몰까?"

"껄떡대지 말라는 거야. 여관집 아줌마나 솔 아줌마 때처럼."

견습 수녀복을 입혀 놓은 데이지와 바람꽃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게 좋지 않은 흐름이라는 건 잘 알겠다.

"오해입니다."

"……."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양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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