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46화. FA컵 8강전(1)
* * *
위건과의 격렬한 매치는 2:0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최우수 선수는 내가 아니라 제리가 받았는데 이건 뭐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다. 상대 진형을 거의 지배하다 싶이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두 골이나 넣은 내가 못 받은건 조금 아쉽지만, 팀 동료가 받았는데 축하해 줘야지.
"하하하!! 제리 인터뷰하는데 완전 허수아비인 줄 알았어!"
"....젠장 닥쳐!"
제리가 벌게진 얼굴로 라커룸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 쩔었다고?"
디에고가 제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경기력이 좋은 날은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캡틴 폴 조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스포츠백을 들고 버스를 타기위해 라커룸을 나섰다.
"우리 루키는 조만간 유명해질 것 같은데? 3경기 8골이라니. 그 웨인 루니도 이 정도로 파격적인 데뷔를 하진 않았던걸로 아는데..."
에버튼에서 파격적인 데뷔를 보여준 웨인 루니인가.. 그래도 에버튼 FC 출신이라 빅 클럽에서 데뷔한건데 비교가 안돼지...
"하하.. 그런가요?"
나는 머쓱이며 뒷 머리를 긁적였다.
팀은 3연승 중이고 라커룸의 분위기는 최고로 올라있다. 이 정도로 연승을 하기 시작한건 오랜만인지 다들 조금 흥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제리 맥과이어!"
아틀레이가 양손을 번쩍 들고 제리의 앞에서 소리쳤다.
"오늘 수비도 굉장했어요. 점유율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도 안정적인 수비가 멋있었어요."
제리가 아틀레이를 향해 엄지를 척하고 올려주었다. 아틀레이는 씨익 웃고는 제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스포츠백을 들고 라커룸을 나갔다.
"앞으로 홈 경기 2연전 후에 FA컵 8강인가... 좀 바빠지겠네."
"박싱데이가 이미 지난 상태라 다행이야... 조금만 늦게 합류했으면 이리저리 치이고 다녔을 거 같아."
나는 정신적으로 조금 지친듯한 느낌이다. 몸은 멀쩡한데도 말이다. 아마 내 인생 이렇게 바쁘게 살아온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축구라는 종목을 거의 접하지 않았던 인생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박싱데이. 지옥의 12월이 이미 지난 상태라 다행이다. 지금까지 선발 두번 교체 한번을 했는데도 이리 정신이 없는 느낌인데.. 확실히 경험의 차이가 이런부분에서 나오는 것 같다.
"하아..."
"왜 그래. 너 오늘 두 골이나 넣었다고! 다들 미쳐버리려고 하는걸 못본거야? 너가 기운을 내야지!"
"아니 그게 말이지.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민이 되서..."
나는 괜히 나약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세상에.. 필드에서는 무슨 미친 황소처럼 뛰어다니더니 여기서 여린 소녀처럼 굴다니... 도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거지?"
제리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새끼 위로는 못해줄 망정
과거의 찌질했던 나의 성정이 조금씩 새나오는 기분이다. 도대체가 사람이 변하려고 해도 잘 변하지 않는 다는게 이런 뜻인가.
나는 확실히 성공의 길을 차분히 걸어가고 있는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일이라는게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막상 도전을 시작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는게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아니야. 좋은 생각만 하고 살아야지! 불안하면 더 연습을 하면 되는거야!"
나는 얼굴을 양손으로 짝 치고 짐을 싸러 내 라커룸 앞으로 걸어갔다.
"...허 참. 희한한 새끼네."
제리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오...오오!!"
알렉스 감독님이 팀 전술 훈련중인 1군 선수들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꽤나 선수들에게 활력이 생긴 듯 합니다."
뻐엉!
"좋아!! 달려!!"
폴 조지가 찬 공을 제리가 열심히 달려가며 공을 받는다.
"제리 맥과이어는 확실히 폼이 올라왔습니다. 1군 주전 윙어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나도 그래 보이네. 이지혜와의 연계도 꽤나 좋아보이고."
제리가 길게 드리블을 치다 간결하게 이지혜에게 공을 돌리고 빠진다.
"...이지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요즘 좀 고민이 있어보이는데, 심리 상담 이야기는 전해주었나?"
"네. 오늘 방문 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래. 우리 선수는 우리가 잘 챙겨 줘야지. 안그래도 요새 이지혜에 관한 말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데 첫장부터 지저분해지면 힘들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상황 자체를 처음 겪는 사람은 그 부담감을 못 견딜 수도 있지. 게다가 여자이기도 하지 않나."
"네 본인도 그 부분을 잘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더 큰 관심을 받게 된다면 그 부담감을 못 견딜 수도 있겠다고 슬며시 이야기 하더군요. 경기장 안에서의 모습은 장군감인데 밖에서는 연약한 소녀로 보이는게.. 또 신기하기도 하네요."
심리상담. 많은 스포츠 선수들은 멘탈케어를 클럽에서 책임져 준다.
아무래도 미디어의 노출도 강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니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듣다보면 왠만한 강철멘탈이 아니면 멘탈이 상당히 갈려나가기 마련이다.
"그 부분은 최대한 오랫동안 길게 유지할 수 있도록해.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강제로라도 시켜. 아진 어린 선수니까 더욱 신경을 많이 써줘야해. 상처란건 안에서 부터 곪아 갈 수 있으니까말이네."
"네.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 까지 걱정하는건 너무 설레발이긴 하지만... 벌써 몇 몇 찌라시 신문에서 이지혜를 건들기 시작했으니 말이죠."
"하아.... 미친 새끼들 건들어도 10대 소녀를 건들 생각을 하다니.. 사람 새끼들이 맞는 건가?"
알렉스 감독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세계엔 몇개의 유명한 찌라시 신문이 존재한다.
사실 여부는 상관없이 과격한 기사만을 기재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겨우 3경기만을 뛴 어린 선수를 굳이 커다란 신문사에서 다룰 이유가 뭔가.
"클럽과 연계 된 법무사에게도 이미 이야기를 전해두었습니다. 선을 넘는 순간 바로 작업을 시작하라고."
"강경하게 가야하네. 나도 운영진들에게 꾸준히 어필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퍼엉!!
웰링 유나이티드의 1군 스쿼드와 U23 스쿼드가 열심히 연습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FA컵 8강이라... 전혀 예상 못한 성적인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미 서포터즈들은 환상적이라고 칭송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아마 경기를 지더라도 크게 반발은 없을 겁니다."
"당연하지. 프리미어 리그 클럽과 경쟁해서 이기는게 어디 쉬운일인줄 아나?"
"하하하 그렇죠."
"리그전은 당분간 지혜는 교체로 사용할 생각인데..."
알렉스 감독이 이지혜를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아무래도 어린 유망주를 빡세게 굴릴 수는 없죠. 심슨의 폼이 꽤 올라와서 리그1 주전 공격수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는 듯 하니 잘 이용해 보는게 좋을 듯 합니다."
감독과 수석코치는 U23 스쿼드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심슨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패기 없는 모습으로 급하게 공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눈에 힘도 생기고 최대한 골을 넣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래도 쓸만한 녀석이긴 했는데 자신감이 너무 결여되있었어. 저번의 골이 자신감을 크게 올려준 효과가 있었나 보군."
"정말 좋은 소식이긴 합니다. 공격진의 뎁스가 너무 얇았는데 그나마 숨통은 트겠군요."
"당분간 주전은 심슨으로 가지. 골만 좀 넣어 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제리를 인사이드 포워드 형식으로 뛰게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
제리 맥과이어가 열심히 드리블을 치며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침투해 간다.
제리가 컷백 패스를 구사하니 바로 앞에 공이 굴러온 지혜에게는 골을 넣기엔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오오오오!!!
1군 스쿼드녀석들이 루키 듀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는 모습이 보인다.
"...좋아. 계획을 손봐 보자고. 리그전들은 무조건 이겨야 해. FA컵은 지더라도 강등권에서 최대한 벗어나야해. 아마 서포터즈들은 왜 이지혜를 선발로 내새우지 않냐고 원성을 부리겠지..."
"네 무조건 그럴겁니다. 그런 소리가 안나올려면 심슨을 위한 자리를 확실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지혜는 지금 골머신 수준으로 넣고 있으니 핵심 선수급이지만, 우린 이지혜만 있다는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해."
알렉스 감독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눈을 감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익!!
경기가 종료되는 휘슬 소리가 들려온다. 심판을 맡았던 코치가 감독에게 달려와 감상평을 요구 했고 알렉스 감독은 엄지를 세워 보여주었다.
***
"오 가은언니."
"아 지혜야 왔어?"
집으로 돌아오니 경기 영상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편집하고 있는 가은언니를 볼 수 있었다.
"오늘 고생 많았어.. 내일 모래 경기인가? 교체 출전할 거라고 했지?"
"그렇지.. 이번 시즌은 리그 적응기라고 생각하라고 하시더라고. 괜찮다고 했지만 안됀다는 말씀뿐이였어."
"어른말은 잘 들어야해.. 뭔가 생각이 있으신거겠지. 이기영씨가 아마 어린 선수를 격하게 사용하면 부상위험이 크다고 하시던데 그래서 그런거 아닐까?"
"그럴수도있지.. 아무래도 클럽에서 나를 신경 많이 쓰고 있나봐. 나 내일은 정신과도 가봐야해."
"정신과? 왜? 어디아파?"
가은 언니가 하던 작업을 내팽게 치고 나에게 달려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쁜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다니... 행복한 마음이 들지만 숙쓰러운 마음이 더 크다.
"아니.. 멘탈 케어? 앞으로 선수 생활 하면서 문제 생기지 않도록 꾸준히 상담을 받는거래."
"오... 그런거라면 해야지! 해서 나쁠게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아 맞다. 나 지혜랑 할 이야기 있어!"
가은 언니가 박수를 짝 치며 나에게 말해왔다.
"무슨 이야기? 중요한 거야?"
"중요한 거기도 한데, 지혜의 허락이 필요한거라서..."
왠지 가은 언니가 주눅이 든 채로 말을 한다.
"뭔데 그래?"
"그게 말이지... 황대표님이 후원을 해주시기로 했어! 스폰서!"
"스폰서? 갑자기 왜? 여태껏 해주신 것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데..."
"그게... 클럽에 스폰도 하고 클럽에 가우스 그룹 광고를 걸기도 할거라는데...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 불우한 어린아이들 중에 축구를 하고 싶은 어린이들에게 기부를 해주시겠다는 거야!"
"오? 엄청 좋은일 아니야? 근데 그걸 왜 나한테..."
"그게 사실 황대표님이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시다고... 조건을 하나 거셨어. 물론 지혜가 싫으면 안해도 돼!"
"조건...? 뭔데 그 조건이?"
도대체 무슨 조건을 걸었길래 가은 언니가 우물쭈물대며 말도 잘 못하는 걸까?
"지혜가 최우수 선수를 하는게 첫번째 조건! 한번 할 때마다 한번씩 기부하실거래!"
"!!"
최우수 선수라.. 그게 쉬운일인가? 하지만 하기만 하면 좋은일이 하나 더 생긴 다는 이야기다. 싫을리가 없다.
"그 정도면 당연히 좋지. 근데 첫번째라니.. 조건이 또 있어?"
"응! 그게 말이지... 이게 중요한 건데... 두번째 조건은 최우수 선수 인터뷰 때 멋진 코스프레를 하는 거야!"
"...?"
"..."
"그게 무슨..."
뇌가 정지되는 듯한 기분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건 저번에 고양이 귀같은 거 말하는 거야?"
"응! 사람들 반응도 좋았잖아? 지혜의 이쁜 모습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좋은일도 하는거지! 그렇게만하면 우리 방송을 시청한 사람에 비례 해서 기부를 해주신대!"
"...싫어!!"
나는 수치사 하기 너무 싫었다.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근데 좋은일 하는건데... 어그로 끌면 시청자도 엄청 늘어날꺼고..."
자고로 스포츠 선수라면 관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팬들도 재미없는 스포츠 선수 보다는 재미있는 스포츠 선수를 더 선호할까? 나는 모른다.
"지혜야 싫으면 안해도되 다른 방법도 있을꺼야..."
괜히 의견을 내고 주눅이든 가은 언니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 이미 버린 몸인데. 이것도 사실 재능을 이용하는거 아닐까? 이쁜것도 재능이잖아. 하아....'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가 아직 남자의 가슴에 데미지가 들어가는 듯 했다.
"알았어 할게... 그래도 했다가 반응 안좋으면 안할거야!"
"진짜?! 우와?! 고마워!! 그래 한번 해보자!!"
"좋은일을 하기 위해 하는건데.. 뭐 무슨일 생기겠어?"
무슨일이 생길지는 이때의 나는 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