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1.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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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2)
엘로루스 강의 거센 물살에 따라 이리저리 함께 요동치는 다리를 무사히 건넌 나는 육지에 발을 내딛자 마자 더이상 꿀렁거리지 않는 바닥에 감사하며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고 곧장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가 북대륙임에도 내가 정반대편인 남대륙으로 내려온 이유는 이미 북쪽의 다리를 모두 끊어버린 바실리카와는 달리 이곳에는 여전히 북서대륙 셀틱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곧장 오른쪽으로 향하면 오래 걷지 않아도 모습을 보이는 작은 마을이 하나.
여느때와 같이 그곳에서 여행동안 먹을 음식을 조금 구해 볼 생각이다.
돈이 있는 건 아니다.
매일같이 뒷골목의 주점에 눌러앉아 술과 연초에 방탕한 나날들을 보내온 만큼 오늘 아침 외상값까지 모두 지불하고 현재는 빈털털이였으니 말이다.
빈털털이가 무슨 수로 음식을 구할 수 있을까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내가 빈털털이 라는 사실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돈을 받는 걸 꺼려할 것이다.
심판의 날 이전이라면야 분명 말도 안되는 소리였겠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까.
사람들이 그나마 남아있을 왕도 쪽이 아니라면 화폐가 통용되고 있지 않는데다 이는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작은 마을 역시 마찬가지.
태양이 사라지자 대지는 생기를 잃었고 가축들의 번식 속도도 현저히 느려졌다.
거기다 마물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목숨을 위협하니 시골마을에서 제대로된 경제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그곳에 내가 무슨 교환수단을 가지고 이렇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가?
"오셨네 오셨어!"
"어서 오십시오 소테르님!"
말라비틀어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의 조금 안쪽으로 걸어들어가자 여러번 보수되어 지저분한 목책이 세워진 작은 마을이 보인다.
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사람들.
소테르..
성양경에서 처음으로 어두운 하늘을 열고 태양을 가지고 내려온 구원자를 부르던 호칭이다.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심판의 날 고향이 불타고 바실리카로 피난길을 나섰으나, 굳게 걸어잠긴 바실리카의 성문 앞에 절망한 이들이 갈곳 없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의 사정을 알고있는 내가 그들의 조그맣게 남아있는 믿음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나를 소테르라고 부르는 건 애초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내게 책임이 있으니 말이다.
"올해에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테르님."
"감사합니다! 소테르님!"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목책을 지나자 눈앞으로 마을을 뒤덮은 신성한 빛의 결계가 보인다.
이런 작은 마을에 결계가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지만 나는 덤덤히 발걸음을 옮겨 결계를 통과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야 내가 쳐놓은 것인데다, 결계의 수명을 연장시키러 들른 것이었으니까.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길거리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의 얼굴빛이 어둡지 않다.
스무 명이나 될까한 적은 인원,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정도 뿐이다.
게다가 그 대가도 매번 받아가고 있는 만큼 이건 절대 성자의 자비도 구원도,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착각해서는 안된다.
"매년 이렇게.. 정말 이런 걸로 괜찮을지..."
음식과 수통이 들어있을 배낭을 내게 건네는 남성의 표정에는 미안함과 걱정이 담겨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것 뿐입니다."
배낭을 건네 받아 한 쪽 팔에 들고, 마을의 중앙에 자라고 있는 작은 묘목에 다가간 나는 두 손을 얹고 항마의 기운을 끌어올린다.
심장으로부터 꿈틀거리며 기척을 드러낸 신성한 기운이 그대로 내 두 팔을 지나 손바닥으로 뿜어져 나온다.
환한 광채를 흩뿌리며 끝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신성한 힘에 말라가는 듯 보이던 묘목이 생기를 되찾고 결계의 빛깔이 선명해진다.
"오오오오...! 이토록 신성한 기운이라니 역시 소테르님!"
"정말 대단하셔!"
마물의 침입을 막고 땅에 조금이나마 생기를 불어넣는 결계.
이들이 죽으면 거래를 계속할 수 없고 땅이 메마르면 이들은 거래를 위한 음식을 마련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의 필요에 의해 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일일이 감사인사를 들을 이유는 없을 텐데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내 주변으로 몰려와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전한다.
불편한 기분에 나는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고 곧장 발길을 돌렸다. 필요한 물건은 얻었고 그 대가로 할 일도 마쳤다. 더이상 이 마을에 볼일은 없다.
이 자그마한 방해만 없었다면 말이다.
"소테루님! 감사해요!"
이제 서너 살이나 됐을 법한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내 앞길을 막아서더니 내쪽으로 손을 내민다.
그 조그마한 손바닥 위에는 맨들거리는 예쁜 모양의 돌멩이 하나가 올려져 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순수하게 웃고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얘! 소테르님께 그런 걸 드리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
뒤늦게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달려와 그녀를 안아들고 서둘러 물러서며 고개를 숙인다.
"... 괜찮습니다."
"잘가! 소테루님!"
"얘가...!"
아이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던지 따뜻해진 돌멩이의 매끈거리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져 온다.
그 온기에 가슴언저리가 꾸욱하고 눌려온다.
이 핏덩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두운 하늘만을 보고 살아왔겠지.
고개를 젓고 나는 돌멩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떠나간 온기에 손끝으로 아쉬움이 스쳤으나 애써 모른 체 한다.
"후..."
저들을 완전히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기대를 저버리고 책임도 회피한 내게는 이젠 더이상 참회도, 고해도,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으니.. 두 어깨 위에는 내 죄를 짊어지고 그저 발걸음 닿는 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없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않는,
이제는 이름만이 남은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세상의 모두가 나를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 자신 만큼은 절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 할 것임을 알고 있다.
관을 고정시킨 쇠사슬을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며 이내 가볍게 떨리기 시작한다.
당장 내 폐부를 지독한 연초연기로 가득 채워야만 이 답답한 기분이 조금은 풀릴 것 같다.
스폴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러야겠다.
*
스폴리아리움.
짧게 스폴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바실리카와 마찬가지로 아케라의 중앙을 관통하는 거대한 강 포르투나의 가운데 위치한 작은 섬으로, 북대륙과 남대륙의 중간이라는 위치적 특성상 본디 무역업이 왕성했었으나 심판의 날 이후 지상 최대의 암시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바실리카에서 다리를 끊은 이후 현재로서는 남대륙에서 북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유일한 관문으로, 현재 암시장을 운영하는 대형상단들의 모임인 상단연합의 관리하에 놓여있다.
노예매매, 마약유통등 국가의 규제가 사라진 이후 온갖 불법행위가 성행하고 있으며 아마 아케라에서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하지 않나 싶은 장소이다.
그런 이곳에서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이 하나 유독 눈길을 끌었으니, 고대 동양풍의 객잔처럼 생긴 이 건물은 외부에 색색깔의 등불들이 달려 있는 탓에 멀리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금란객잔'
'... 꺄하하하하..'
'.. 으허허허허허허허허...!'
입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취한 남성과 여성의 기분좋은 웃음소리.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술냄새 사이로 짙게 스민 사향냄새를 자연스레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철썩!! 철썩!
'... 아학..! 아학!'
'하으윽 하아앙..!!'
열락에 젖은 이들의 끈적한 신음소리가 가득한 이곳.
술과 음식, 여자와 남자, 뿐만아니라 마약까지도 판매하고 있는 이 객잔은 손님의 그 어떤 취향도 만족시켜주기 위해 수많은 직원들을 아래에 두고 있으며 이곳 금란객잔을 찾은 이들에게 지고의 쾌락을 맛보게 해주어 그들은 항상 만족스러운 얼굴로 밖을 나선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나 요란스럽고 퇴폐적인 이 건물의 가장 높은 층,
그곳만큼은 쥐의 발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짙었던 사향냄새가 더이상 맡아지지 않는다.
'아흐.. 아으흣....!!'
그 조용한 가운데 나지막이 터져나오는 여성의 간드러지는 신음소리.
분명 가장 안쪽의 방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양옆으로 열리는 많은 문들을 지나 드디어 나타난 방안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품들과 그림이 걸려있고 두꺼운 책들로 가득한 책장 몇 개와 책상이 하나, 분명 높은 신분을 가진이의 집무실처럼 보인다.
"으흐읏..."
책상과 의자, 그 뒤로 건너편이 희미하게 비쳐보이는 얇은 커튼이 대충 쳐져있고 안쪽으로 넓은 침대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이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던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꿈틀 꿈틀
그리 밝지 않은 은은한 조명 아래 꿈틀거리고 있는 한 형체가 보인다.
조명의 빛에 비쳐보이는 밝은 갈색의 긴 머리카락.
끝부분에 붉은빛이 언뜻 섞인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이다.
"으흐으으... 하으윽...!"
다시 한 번 숨넘어가는 신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신음소리의 주인이 몸을 한번 뒤척이자 이번에는 땀에 살짝 젖어 맨들거리고 있는 여체가 수려한 곡선을 그리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따금씩 경련하고 있는 육체위로 땀방울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살랑 살랑
머리카락의 색과 동일한 꼬리가 하나 육체의 경련에 맞춰 흔들거리고 있다.
쫑긋
그리고 머리카락 위로 솟아있는 뾰족한 귀가 한 쌍.
아무리 봐도 인위적이지 않은 저 꼬리와 귀는 분명 그녀의 몸에 본래 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우으으으..."
이번에는 또 안타까운 듯한 한숨을 내뱉으며 팔을 허공에 휘젓다 한 손은 자신의 다리 사이 은밀한 곳으로, 나머지 한 손은 자신의 커다란 가슴으로 가져간다.
어지러히 흘러내린 이불의 사이 헐거벗고 있는 여성은 그대로 수음을 계속한다.
찔걱 찔꺽 질꺽...
질척거리는 물소리와 이어지는 신음소리.
금란객잔의 최상층,
그 집무실로 보이는 이곳에서 은밀한 손장난을 즐기고 있는 이 여우수인의 이름은 다름아닌 '수'.
이 건물, 금란객잔의 주인이자 스폴을 관리하는 상단연합에 소속된 대형상단들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한 금란상단 상단주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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