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2. 늑대 소녀는 주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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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늑대 소녀는 주인을 찾는다(3)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 오래, 때문에 중간중간 끊어져 희미해진 가도를 그저 기억과 방향감각에만 의존한 채 걸어나가던 나는 곧 눈에 익은 높은 언덕 하나를 더 지나고 나서야 다음 목적지로 삼았던 마을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트라사.
지금은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리는 북대륙으로 건너가기 전, 우리 일행이 마지막 휴식을 위해 들른 적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비록 그 아름답다던 석양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인간과 수인이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친절한 이들의 마을이었다.
가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옛날의 기억이 점차 선명해져 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리가 실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살이 잘 오른 생선구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주민들. 마을 주민들의 환호소리가 귓가에 들리는듯하자 역시나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그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지만,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주변의 모든 곳이 원형도 알아볼 수 없게 파괴된 잔해가 되어버린 가운데, 그나마 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2층짜리 폐허로 다가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여관.
두통과 함께 머릿속으로 짙은 안개가 들어차 눈앞을 가리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그곳으로 걸어나갔다.
끼이이이이이익.... 끼기긱...
문틀과 제대로 들어맞지도 않는 문짝을 잡아당기자 경첩이 다 떨어져 나가며 비명을 지르는 괴로운 소음과 함께, 이를 들은 덩치 좋은 남성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한다.
이곳의 주인이 이번에는 바뀌지 않았다.
"..."
나를 알아봤는지 그는 내게 말없이 한쪽 손을 내밀었고, 나는 이번에도 마연이 든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북대륙에서는 화폐나 다름없이 쓰이고 있는 마연. 게다가 이건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금란 객잔의 마연이다.
주머니를 열어 그 내용물을 확인한 남자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더니 벽에 기대져 있던 커다란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2층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 한 방 앞에 서게 된 나는, 두 남녀의 숨 헐떡이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을 듣고 문의 한쪽으로 물러섰다.
쾅! 쾅..!!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몇 번 들려온다 싶더니, 곧 약에 취한 남녀가 황급히 도망 나와 일층으로 뛰쳐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후 조금 더 기다리자 비릿한 냄새로 가득한 침대 시트를 말아들고 방에서 나온 그가 문 앞에서 비켜주며 내게 눈짓했고,마찬가지로 1층으로 천천히 걸어내려간다.
방금 전까지도 격렬하게 관계가 이루어진 이곳은 추잡한 냄새가 방안 가득 들어차 질척이고 있다.
깨진 창문을 대신한 판자를 내려두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바닷바람이 불어닥치며 기억 속의 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 에단."
"...!"
바람과 함께 불어온 희미한 목소리에 당장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얀 사제복을 입은 그녀가...
지끈...!
"... 윽...!"
안개가 짙게 들어찬 가운데 기억의 파편이 날아들어 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나는 이를 잡기 위해 손을 내뻗었지만,
예상대로 찾아온 두통은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붙잡아 이를 움켜쥘 수 없게 막아선다.
고통에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는 굳게 닫힌 방문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마지막 추억이 잠든 이곳에서도 여태껏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적도 많았으니까.
철썩! 철썩!
"하으읏...! 하응!"
"허억.. 헉... 헉..!"
바로 옆방에서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남녀의 신음소리에 나는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장소에 더러운 얼룩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불평할 수 없다.
이는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사실 더 떨어져 내릴 나락은 내게 있어 존재하지 않았다.
"..."
연초를 태우며 지독한 연기를 폐부에 가득 채워 넣으니, 몽롱한 느낌과 함께 머릿속이 비어간다.
동시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두통도 사라져 간다.
"후우우..."
연초 한 갑을 꼬박 다 태우고 나서야, 나는 여관을 나설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북대륙으로 향할 때였다.
철그럭..!
쇠사슬이 헐거워지지는 않았는지 어깨를 털어 확인을 마치고, 왔던 대로를 따라 마을 밖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여태껏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예고가 감각 안에 걸려들어온다.
"...?"
전조를 깨닫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작고 민첩한 기척이 내 쪽으로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수는 고작 하나.
이에 반응해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내 머리 높이까지 뛰어오른 작은 인영이 코앞까지 가까워져 그림자를 드리운 후였다.
"...!"
푸욱...!!
목에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틀어박힌다.
불쾌한 이물감에 반사적으로 내뱉은 신음은 목에 새롭게 생겨난 구멍에 의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흩어져 버리고, 기도에 차오르는 핏물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겠지만 나는 오히려 나를 공격한 녀석의 목을 잡아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쾅!!
"케헤윽....!"
돌바닥이 부스러져 그 파편이 튀어 오를 정도로 세게 내던져진 상대는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숨넘어가는 신음을 내뱉는다.
푸우욱.
나는 이 누더기를 뒤집어쓴 녀석의 목을 여전히 꽉 움켜쥔 채로, 내 목에 틀어박혀 있던 무언가를 뽑아냈다.
"가시..?"
빠르게 피가 멎어가는 것을 느끼며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바라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커다란 생선의 가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돌려주도록 할까.
녀석의 목에 똑같이 가시를 쑤셔넣여줄 심산으로 날카로운 부분을 눈앞으로 향하자 저항이 더 거세지는가 싶더니 결국 녀석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고 만다.
펄럭..!
"...?"
후드에 눌려있던 늑대의 귀가 드러나고,
잿빛 머리칼 사이로 앳된 소녀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순간적으로 가시를 든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게 조그마한 돌멩이를 건넸던 그 소녀의 모습이 이 수인 소녀의 얼굴 위로 잠깐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푸욱...!!!
하나가 아니었던지 이번에는 목을 쥔 내 손목에 가시를 박아 넣은 소녀는 굳어있던 나를 거칠게 밀쳐내고 폐허 잔해 사이로 도망쳐버린다.
"... 허."
영문도 모른 채 먼저 공격당하고, 놓쳐버리기까지 했으니 헛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다.
... 잠깐.
뭔가 께름칙한 느낌에 나는 안주머니를 확인했다.
없다.
남은 마연 주머니는 물론,
스폴의 통행증, 바실리카의 통행 허가증까지 사라졌다.
설마.. 마지막에 일어나면서 날 밀쳐낼 때?
살아서 도망치는 것만 생각해도 모자랄 그 상황에서 물건을 훔쳐낼 생각을 했다니, 제법 독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쯧.
다시 붙잡더라도 찜찜한 마음에 끝을 내지 못할 것을 알기에 굳이 쫓지는 않으려 했건만..
이래서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소녀는 도망쳤다.
등허리에서부터 몸 전체로 찌르르 퍼져나가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분명 목을 깊숙이 찔렀는데도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목을 잡아챘다.
목에서 가시를 빼냈을 때도, 철철 흘러야 정상인 피는 어느새 멎어 금세 자신을 주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각오했던 바였지만 어째서인지 마지막에 자신을 끝내려던 손을 주저한 그에게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천운이 따른 이 기회를 소녀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하악... 학... 하악.."
두 손에 구겨진 종이와 작은 주머니를 꼭 쥔 채로, 소녀가 도착한 곳은 이 마을의 하나뿐인 작은 병원.
병원이라고는 해도, 지금은 싸구려 마연을 파는 장소에 불과했지만 바다 일을 하다 손이 찢어지거나 마물에게 습격당해 다친 이들이 이곳으로 옮겨지던 것을 소녀는 본 적이 있었다.
내부는 여느 곳과 다름없는 불탄 폐허였지만 여기저기 약에 취해 벽에 기대어있는 이들이 여럿 보인다.
그들의 몽롱하고 불쾌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침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엄마와...
그리고 그 앞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는 다른 한 여성이 보인다.
물고기를 얻기 위해 해안가를 전전하던 때, 바다 일을 하는 이들로부터 그녀가 적룡교라는 무서운 무리의 신도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
"어머, 설마 정말로 그 사람한테 다녀온 거니?"
끄덕.
소녀는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몸상태가 눈에 띄게 좋지 않아진 자신의 엄마가 결국 온몸이 불덩이인 채로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엄마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는지 소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뭐, 일단 가져온 것부터 볼까?"
여인은 소녀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먼저 잡아채더니 그 내용물을 확인한다.
"상등품... 정말 스폴에서 건너온 건가?"
"..."
"잠깐 그럼..!"
여인은 황급히 소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아들었고, 곧 스폴과 바실리카의 통행증을..
그리고 선명하게 찍혀 있는 직인들을 각각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수인 꼬맹이는 이 종이 쪼가리가 가지는 가치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조.. 좋아... 자, 여기 약이야. 이걸 먹이면 네 엄마도 더 아프지는 않을 거야."
가진 것도 없는 더러운 루파의 딸이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제 엄마를 업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때만 해도 어떻게 처리하나 골치가 아팠는데, 마침 오늘 마을에 찾아온 그 이방인이 떠올라 슬쩍 말을 흘렸더니 정말로 그가 가진 물건을 훔쳐 올 줄은 몰랐다.
고작해야 밑져야 본전 정도로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대어를 낚았다.
툭..!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연을 소녀의 발치에 전부 던져주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
이것만 있다면 스폴로 떠날 수 있다.
이 다 죽어가는 마을에서 생선 비린내 나는 남자들에게 약이나 팔며 연명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 다급히 몸을 돌린 그녀였지만, 자신의 뒤에 서있던 누군가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히고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어떤 놈이야..! 왜 길을 막고.. 서.. 있....."
키가 얼마나 큰지 발끝에서부터 한참을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나서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을 그녀는 마주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입이 다물어지고 마는 저 섬뜩한 눈동자는, 검고 깊은 바닷속에서 알몸으로 마물들에게 둘러 싸인 것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말없이 내밀어진 그의 손.
돌려달라는 의미인 것도 알고, 저 말에 따르지 않았을 때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알 것 같았지만 당장 손안에 들어온 스폴 행 티켓을 그녀는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품 속에 숨겨둔 비수로 손이 슬그머니 올라간다.
"커헥...!"
하지만 이를 눈치챈 건지, 아니면 더 기다려줄 인내심이 남지 않았던 건지 내밀어져 있던 그의 손에 그대로 목이 붙잡혀 허공에 들어올려진 그녀는 기껏 손에 쥔 비수를 제대로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한참을 바둥거리다 조여오는 숨통에 정신을 잃고나서야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