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3. 재가 내리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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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재가 내리는 땅(1)
터벅,
철그렁.
터벅,
철그렁.
터벅,
철그렁.
벌레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에서는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철성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멈칫.
"..."
이 앞은 북대륙.
저주받은 땅.
희망이 지워진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점점 탄내가 짙어지는 것만으로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잠시 멈춰 선 나는, 애써 돌리려 하지 않고 있던 고개를 결국 뒤로 돌리고야 말았다.
"....."
"..."
눈이 마주쳤다.
가깝다고도, 멀다고도 하기 애매한 거리만큼 떨어진 어둠 속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는 희미한 안광이 자리하고 있다.
몸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오히려 나를 멀뚱멀뚱 올려다보는 소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고, 다시 울려 퍼지는 철성 가운데 함께 섞여 들려오기 시작한 작은 발소리는 괜히 이전보다 더 신경 쓰인다.
루파의 딸.
수인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인 루파는, 몸을 파는 수인족 여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아케라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수인들을 배척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노아의 존재 때문이겠지.
노아.
영웅으로 칭송받던 전사.
나의 친우였고, 동시에 우상이기도 했던 그 녀석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역시나 짙은 안개 속에서 힘없이 허우적 대는 기분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영웅의 죽음과 구원의 실패.
갈곳 잃은 증오는 살아남은 다른 수인들에게로 그 화살 끝이 돌려졌다.
노아가 수인이라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멈칫.
노아는.. 수인이었나?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강제적인 되물음.
갑작스럽고 어색하기까지 한 이 간섭에 나는 오히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노아는 수인이었다.
"하하..."
나를 좀먹는 이 계금으로부터 소소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꼬르륵...
"...?"
어느 순간부터 날 뒤따르는 수인 소녀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걷고 있던 내 귓가에 신경 쓰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에도 멈춰 서서 돌아봤다가는 분명 번거로워질 거라는 예감에 나는 늦춰지려던 발을 애써 앞으로 내디뎠다.
금방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
라고 생각하기에는..
마을을 떠나고부터 벌써 얼마나 지났지?
아직까지는 마물과 조우하는 일이 없었다지만, 이미 한참 멀어져 버린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 하지만 그걸 내가 신경 써줘야 할 이유도 없잖아.
멋대로 나를 따라 마을을 나온 건, 저 수인 소녀의 선택이다.
애초에 날 따라오고 있는 게 맞는지도 모르고..
꼬르륵..
"..."
아니, 날 따라오는 게 맞다.
왜 자꾸 회피하려 드는지, 그리고 날 그렇게 만드는 이 상황에까지 불쾌함을 느끼고 만다.
결국 난 다시 한번 들려온 소녀의 배곯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왜 계속 따라오는 거지?"
"..."
내 물음에 움츠러든 작은 어깨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하려던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때 잠깐 손속에 자비를 뒀다고 해서, 내가 널 도와줄 거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거라면..."
"사과."
"...?"
하지만 소녀의 입으로부터 나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다.
"... 아프게 한거. 사과, 안했어."
첫 만남에 목과 손목을 꿰뚫고, 팔의 살점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깨물었던 그거라면.
"네가 날 공격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납득했다. 누구보다 절박했을 네게 굳이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어."
내가 지금 발 딛고 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누가 누구에게 사과를 하고 말 것도 없다.
스윽.
옷자락을 걷어올려 이미 깨끗하게 아물어있는 팔을 보여주었지만 소녀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다시 한다는 말이 이거다.
"... 아팠을거야. 그러니까. 사과, 받아."
... 사과하는 태도부터가 잘못됐잖아.
"사과를 받아주면, 마을로 돌아갈 건가?"
"..."
"...."
역시나,
결국은 골치 아프게 돼버렸다.
마을 입구에서 이미 뒤따라 오는 걸 눈치챘을 때, 훌쩍이고 있는 소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소녀가 나를 뒤따라 오는 걸 방치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나는 이렇게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걸까?
"내가, 돌아갈곳.. 없어."
"..."
이어진 그 말에 나는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텅 빈 잿빛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다.
전부라고 여겼던 것을 떠나보내고, 살아갈 목적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눈동자.
사과.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아마 모친의 가르침에 따라서 내게 사과하는 것이.. 이 소녀에게 있어 눈앞에 놓인 삶의 마지막 목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사과를 받아주면,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 몰라."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그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화가 난다.
저 수인 소녀 때문이 아닌, 나 자신 때문에.
구원은 실패했다.
이 세상은 이미 끝났다.
이제 와서 신탁이 내려왔다고 한들, 대체 뭘 바꿀 수 있을까?
스폴에서 보게 된 신탁의 빛줄기.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오지랖을 부리고,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은 간다.
기대.
그 빛줄기를 본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 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신탁을 기다려왔던 마음속 깊은 곳, 남몰래 품고 있던 기대를...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내게 속죄의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그 기대에..
나는 소녀의 앞에서 성자 행세를 하고야 만 것이었다.
내가 어린 수인 소녀 하나 따돌리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나니, 그래도 조금은 속이 후련하다.
변명의 여지없이 나는 이미 저 소녀의 삶에 관여해 버렸다.
여기서 외면한다면, 그건 내 손으로 저 소녀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겠지.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사슬을 풀고 조심스럽게 관을 내려놓았다.
화르륵...!
성냥 몇 개를 더 버린 끝에 불길이 치솟으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낸다.
내가 짐을 풀고 모닥불을 피울 때까지, 소녀는 나와 멀찍이 떨어진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와."
"..."
가까이 오라는 내 말에 오히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여기까지 쫓아와서는.. 이제 와서 경계를 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흉터처럼 새겨진 불신은 그리 쉽게 걷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배낭에서 음식을 한 움큼 꺼내쥐었다.
말린 과일일 뿐이지만, 북대륙에서는 보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다.
신성한 기운을 양분 삼아 길러낸 과일이라고는 해도 바실리카의 성양구에 비하면 작은 등불 수준이기에 단맛은 그리 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건 후각이 예민한 수인 소녀에게 걸려들지 않을 리 없다.
꼬르륵...
"자."
손을 내밀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모닥불에 비쳐 다양한 색을 내비치는 말린 과일을 향한다.
"..."
아무리 그래도 먹을 걸로 저만한 경계심이 해소되지는 않으려나...?
라고 생각하며 다른 방법을 생각하던 차였다.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내 쪽으로 다가오던 소녀는,
"...!"
나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크게 한걸음 물러선다.
"흠..."
.. 되는 건가?
말린과일을 든 손만 소녀가 있는 곳으로 내민 채 고개는 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다시 슬금슬금 기척이 가까워진다.
"..."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유혹을 겨우 참아내니 결국은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소녀는, 내 손 위의 말린 과일들을 낚아채듯 하여 다시 뒤로 물러나 모닥불 건너편에서 허겁지겁 자신의 입에 그것들을 털어 넣는다.
시선은 여전히 내쪽으로 고정한 채,
손에는 흙이 지저분하게 묻어있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제대로 씹지도 않고 일단 삼켜 넘기던 소녀의 눈에 한 순간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스친듯했지만 그건 잠깐이었을 뿐, 급하게 배를 채운 소녀는 다시금 내게서, 눈앞의 모닥불로부터 슬금슬금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사이 모닥불은 소녀의 모습을 밝혀주었고,
"..."
그 덕분에 나는 피로 흥건한 소녀의 발을 볼 수 있었다.
맨발로.. 그 험한 산길을 여태 쭉 따라왔던 건가.
"아...!"
풀썩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녀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넘어져 버리고 만다.
"... 윽."
물론 금방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안그래도 불편한 발로 오랜 시간 걸어왔기에 후들거리는 다리와 통증 때문인지 곧 다시 주저앉고 만다.
"가만히 있어.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
덕분에 소녀의 두 발목을 손쉽게 붙잡을 수 있었던 나는 곧장 치유를 감행했다.
발이 아물어가며, 박혀있던 나뭇조각과 상처 사이에 섞여들어간 흙이 바깥으로 밀려나와 떨어져 내린다.
"... 아파.."
그 과정에서 소녀는 고통을 호소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치유를 끝마치는 편을 선택했다.
발이 완전히 아물고, 오랫동안 맨발로 생활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듯 두껍게 씌워진 굳은살이 드러난다.
꿈뻑 꿈뻑...
고통이 멎어가자 아직 남아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치유의 기운에 소녀의 눈이 힘없이 감길 듯 말 듯 하며, 고개가 휘청인다.
나를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는 게 보였지만 결국...
풀썩.
눈이 감기고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려던 걸 팔로 붙잡은 나는, 소녀를 모닥불 근처에 눕혀주었다.
급하게 배를 채우고 발에서 아른거리던 고통이 사라지고 나니,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것으로 보인다.
"새근... 새근.."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소녀의 앳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괜히 이상한 기분에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빛과 음식 냄새를 따라 찾아온 마물들을 처리해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