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3. 재가 내리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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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재가 내리는 땅(2)
소녀는 제대로 된 꿈을 꿔본 적이 없다.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춥고 배고픈 가운데 엄마를 꼭 껴안고 오직 서로의 온기에 의지하며 불편한 잠자리를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소녀는, 지금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을 푸른 하늘,
끝없이 펼쳐진 들판 위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주변이 온통 향기로 가득하다.
"..."
하늘 높이 유독 밝게 빛나는 동그라미가 떠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눈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자신의 눈 위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에 뒤늦게 반응해 정신을 차렸다.
"아..."
그건 새하얀 양산이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든 여인이 어느새 소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눈부시지는 않니?"
마치 자신의 엄마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소녀는 눈을 비볐지만 눈앞에 남은 강렬한 빛의 잔상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태양은 처음 보나 보구나."
"태.. 양...?"
저 밝게 빛나는 동그라미가 바로 태양...
엄마에게 이야기로 들은 것처럼 이 넓은 세상을 환하게 비춰줄 만큼 밝은 빛이다.
"귀여운 아이네. 이름이 뭐니?"
"... 실비아."
평소 같았다면 처음 보는 이에게 이름을 가르쳐주는 일은 없었겠지만,
어째서인지 저 나긋나긋하고 평온한 목소리에는 마음이 놓여, 이름을 말해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이름이네. 잘 어울려."
"... 너는..?"
소녀는 눈앞의 여인을 올려다보았지만 밝은 태양의 역광과, 눈앞에서 여전히 아른거리는 빛의 잔상 때문에 여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 내 이름 말이니? 나는..."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한다.
때마침 눈앞에 아른거리던 잔상이 희미해지고, 여인의 입이 보인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달싹인다.
"..."
그리고...
"...!"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주변을 경계하며 품속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꺼내 쥐려 했다.
하지만 몇 번을 재차 더듬어도 자신의 품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늘은 다시 어두워져 있었으며,
향긋한 꽃향기도...
아니... 하늘은 원래 어두웠지.
".. 이제야 일어났군."
"...!"
다 꺼져가는 모닥불 옆에서 일어난 소녀는 낯선 목소리로부터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이걸 찾는 건가?"
꿈을 꾼 걸까?
어떤 꿈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무척이나 따뜻하고... 기분 좋은...
"흐음..."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소녀는, 자신을이상하다는 듯이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이제야 모든 기억이 되돌아온다.
엄마의 무덤을 만들고, 자신은 어째서인지 그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엄마가 자신을 떠나간 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자, 주변에 가득한 피 냄새도, 눈앞의 남자에게 자신이 숨기고 있던 비수가 들려있는 것도 더 이상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 사과."
그러고 나니 자신이 그를 따라왔던 이유도 떠오른다.
이유는 단순하다면 단순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아프게했어. 미안해."
"..."
그가 사과를 받아주면 이제 마음에 걸리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사과만 하고 나면...
하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마을로 돌아가서...
집으로..
이젠 나를 기다려주는 이 없는 집은, 과연 돌아갈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네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어."
"...?"
그는 사과를 거절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어째서..?"
애초에 소녀가 사과를 해본 대상이라면 자신의 엄마 뿐.
때문에 사과를 거절당해 본 적은 없었던 소녀는, 생각지도 못했던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건.. 흠.."
".....?"
뭔가를 고민하던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비수의 날끝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그래, 말뿐인 사과로는 부족하다는 거지. 일단은 너는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가진거.. 없어."
병원에서 그 여자가 떨어뜨린 비수를 습관처럼 챙긴게 그나마 유일하게 자신이 가진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들어버린 사이 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난 그런 너에게 음식을 주고, 다친 발도 치유해 줬어."
"아...?"
소녀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욱신거리던 두 발은 이제 아프지 않다. 게다가 발에 감겨있는 이 하얀 천은...
다시 고개를 들자 비수를 들고 있는 그의 한쪽 팔 옷소매가 반대편 보다 짧아져 손목이 드러나 있는 게 보인다.
"따라와서 괜히 빚만 늘어난 셈이지. 이제와서 말뿐인 애매한 사과가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본 소녀는 깨어날 때부터 진동하던 피 냄새의 원인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 마물."
몸 여기저기가 찌그러지거나 비틀려 있는 마물들의 시체가 모닥불을 기점으로 둥글게 널브러져 있다.
저 많은 마물들을 어떻게? 라는 의문 보다도, 먼저 떠오른 의문은 어째서 였다.
"이상해."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그의 물건을 빼앗기 위해, 기습하여 급소를 공격한 자신을 한 번 살려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수인인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이런 도움을 준 것일까.
"하지만... 네 의사와는 관계없이 전부 내가 멋대로 도운 것 뿐이니 빚 운운할 것도 없으려나."
남자는 소녀의 사과를 거절한 것 치고는 사과자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래도 네가 꼭 갚아야 겠다고, 사과를 해야겠다고 느낀다면 너도 네 멋대로 갚으면 되는 일이겠지."
남자는 소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여태 오지랖을 부려왔지만 결국 선택은 자신이 아닌, 저 수인 소녀가 해야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해?"
무기력함 뿐이던 소녀의 눈동자에 잠깐 이채가 서렸던 것같다.
그리고 이어진 소녀의 질문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가진 게 없다며?"
툭..!
남자는 배낭을 들어올려 소녀의 발치에 던져 주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배낭을 소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그 몸으로라도 갚아야지."
"..."
"무슨 의미인지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 응."
소녀는 이 형편없는 몸으로 과연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걸로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치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은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배낭을 주워드는 소녀를 보며, 남자도 몸을 일으켜 다 꺼져가던 모닥불을 짓밟아 꺼트렸다.
"힘들어지면 도망쳐도 상관은 없지만, 아마 멀리 가지는 못할 거다."
"도망. 안가... 꼭.. 사과, 할거니까."
그는 관을 들어 올려 등에 이고는 저 멀리 불길한 검붉은 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선심이라도 쓰듯 중얼거린다.
"... 그래. 갚을 걸 전부 갚은 다음이라면, 사과도 받아 줘야겠지."
*
"그래...! 내가 봤다니까? 스폴의 금란 상단에서 발행한 통행증에, 바실리카의 통행 허가증까지..!"
"누님 말대로면.. 그 음침한 놈이.. 바실리카에서 스폴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겁니까? 그것도 매년?"
"그 통행증들이 가짜가 아니라면, 그렇겠지."
"... 관 같은 걸 매고는.. 대체 뭘 하러 오는 걸까요? 그리고 그놈, 마을을 나가서는 저주받은 땅 쪽으로 갔답니다."
"관심 없어. 중요한 건 그 할 일이라는 걸 끝내면 스폴로 다시 돌아갈 거라는 거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주변을 둘러봤을 때에는 약에 취해 맛이간 머저리들이 바닥에 쏟아진 마연에 머리를 처박고 혓바닥으로 바닥을 닦아내고 있었다.
늑대 수인 둘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스폴과 바실리카의 통행증까지도... 마치 약에 취해 본 환각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저주받은 땅에 들어갔다가 멀쩡히 살아돌아올 정도면, 건들어서 좋은 꼴 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무기도 없는 사제 한 명한테 왜 겁을 먹어? 마물을 쫓아내 주는... 그래, 성양교의 성물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나 보지."
"그럼 설마 그 관이...?"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되잖아, 마물들이 득시글 거리는 땅에 맨손으로 다니는 게 어디 제정신인가?"
여자는 마을에서 힘 좀 쓴다 하는 사내들을 전부 불러 모은 상태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실리카까지 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손에 한번 들어왔던 스폴 행 티켓을 그녀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머저리들 이외에도 믿는 구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이 변두리 마을에서 교단으로부터 공급받은 마연을 팔아 대가로 받은 귀금속이나, 부모를 잘못 만나 마연 한 주머니에 노예로 넘겨진 아이들을 교단에 상납하는 말단 중의 말단이었지만, 교단에서 달마다 찾아오는 수송책을 통해 조력을 요청할 수는 있었다.
말단의 요청이 받아들여질리 없다는 건 알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당시에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 기억한다.
자신이 잘못본 게 아니라면 허가증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은 바로 얼마 전 교단에서 알려준 척살 대상들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