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3. 재가 내리는 땅
* * *
3.재가 내리는 땅(3)
"..."
작은 언덕 하나를 넘을 때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때마다 수인 소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멈춰 서서는 가만히나를올려다본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
나는 이 적당한 거리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무심코 소녀의 삶에 관여해 버린 나였지만 그 이유를 깨닫고 난 지금, 같은 실수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 기대를 품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곳에서 일을 마치는대로 스폴로 데려가 수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녀라면 분명 이 소녀를 모른척하지 않겠지.
그 이유는 비록 투박하지만 삶의 의지를 보여준 이 소녀에게 사과의 대상이 되어주는 것.
나는 그 이상으로 관여할 생각이 없었고, 이 소녀가 나에게 관여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사과라니.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축복받은 일이다.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더더욱.
가슴을 옥죄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습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엄마가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도, 그런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것도, 그 결과 소녀가 이 희망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에는 내 책임이 있다.
그러니 오히려 사과해야 하는 건 바로 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짊어진 죄는 겨우 이 수인 소녀 한 명에게 용서받고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이제 와서 내게 사과란 그저 비겁하게 나 스스로가 위안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행위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사과할 수 없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게 내 끝나지 않을 속죄의 방식이었다.
"...?"
소녀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묻어난다.
"... 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아직도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홀로 생활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인지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쉽게 생각에 빠져버리고는 했다.
좋은 버릇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쉽게 고쳐지지는 않겠지.
할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아래로 드디어 커다란 협곡의 모습과 함께,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거대한 다리의 형상이 검붉은 하늘 아래 불길한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다.
북서대륙 셀틱에서 저주받은 땅으로 이어진 세 개의 다리 중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곳.
다리의 시작점에는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가까이 다가가면 협곡저 아래에서 강물이 빠른 속도로 흐르며 바위를 깎아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을의 모습은 트라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폐허였지만 조금 다르다면, 이곳에는 사람을 대신한 돌무덤들이 즐비해 있다는 점이다.
소녀가 제 모친의 무덤 위에 돌을 쌓아올린 것과 비슷한 돌무더기들을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와중에는 들개가 시체를 파먹으려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어지럽게 흩어져내린 돌무더기들도 있다.
쿠구구구구.......
협곡 아래에서부터 들려오는 물소리 이외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기척도 들려오지 않는 마을의 대로를 걷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묘한 이질감을 준다.
두두둑...
"...?"
어서 다리를 건너야겠다고 생각하던 도중 돌무더기가 넘어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숨어있던 마물을 내가 놓치기라도 한 건가 하고, 손을 들어올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방금 내가 지나친 무너진 돌무더기 앞에 쪼그려 앉아 이를 쌓아올리고 있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색하게 들어올려진 왼손을 내려놓았다.
"..."
그 조막만한 손으로 돌덩이를 집어 탑을 쌓고 있는 소녀를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요령도 없이 위로 돌을 쌓으려고 하다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있던 것까지 같이 굴러내린 모양이다.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는 돌탑을 다시 쌓아올려준 소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쪽으로 걸어온다.
"..."
이 주변은 위험하다고, 이렇게 말없이 떨어지면 목숨은 장담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한마디를 하려다 나는 결국 그만두었다.
다만 질문했을 뿐이다.
"누구를 위한 무덤인지는 알고?"
"... 아니."
"그럼 뭐 하러."
궁금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마물과 한두 번 마주친 것도 아니고, 위험하다는걸 알면서도 나와 떨어져 그런 행동을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엄마 무덤... 이렇게 되면. 나, 슬플 거야."
그러니까..
"...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슬퍼할까봐?"
"응, 이상해?"
아니..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보고 지나친 내 쪽이 이상한 거겠지.
하지만...
"저 다리를 건너가면, 그때부터는 저렇게 망가진 무덤들이 지천에 널려있어. 네가 앞으로 남은 일평생을 돌탑만 쌓으러 다닌다고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 그게, 왜?"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일단 보호해 주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내 시간을 지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내가 말하고도 우습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한게 누구인지, 가진 거라고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뿐인 내가, 누군가에게 내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고 할 줄이야.
나는 유치하게 이 대화에서 이기고 싶기라도 한 걸까?
고작해야 돌무덤 하나.
그리고 그 무너진 돌무덤 하나를 신경 쓰는 것조차 이 소녀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위험한 일이다.
언제 어디에서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이 다리 너머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름 없는 돌무덤들이 마물들의 무심한 발아래 짓밟혀 무너져 내려 있다.
그러니까 나는,
... 그녀가 나처럼 무시하고 지나갔어야만 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문제를 전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 작은 선의는 기만이, 그리고 위선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소녀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는 내 한심한 생각으로 말이다.
소녀의 행동은 옳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미안..."
결국은 내게 사과를 건네는 소녀.
사과를 받아냈지만 마음은 괜히 더 복잡하다.
하지만 소녀의 사과는 그저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사과였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였으니까."
"..."
"가는.. 길만이라면.. 괜찮아?"
눈앞에 보였으니까.
이 말은 단순히 마음속 짐을 남기지 않기 위한 합리화이며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이다.
한 발 양보해서, 하나고, 열이고, 어떻게든 백 개까지 이 소녀가 해낼 수 있었다고 치자,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죽음에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시체도 온전히 구하지 못한 상태로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이런 돌무덤들이 과연 아케라에 얼마나 있을까.
그녀가 구할 수 있는 건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숫자에 불과하다.
가는 길에 보이는 무너진 돌무덤만이라도 원래대로 만들어 준다.
그들의 잠든 자리만큼은 부디 편안하기를 바라며, 죽은 이들을 존중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는 것.
이토록 순수한 선의에 대해서는 감탄한다, 대단하다고 여긴다.
정말 이소녀가 셀틱에서 자라온 게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이다.
"... 그런 걸 해봤자, 누구 하나 너에게 고마워하지 않아. 애초에 이곳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남아있는지도 모르는데.."
"꼭.. 알아야 해?"
"..."
소녀의 반문에 나는 멍하니 그 의문섞인 잿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이 대화. 분명 어디선가...
"이상해.. 꼭, 떼쓰는거. 같아."
"..."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어디에서였지?
누구와의 대화였지?
내가 직접 한 대화였나?
아니면 우연히 옆에서 들은 것뿐이었나?
'네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그놈들이 네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성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는 두 손이 보이고 있었다.
굳은살투성이의 두 손바닥.
쩍쩍 갈라진 굳은살 사이로 살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의 손목을 꼭 붙잡고 있는 건...
내 손이다.
"아..."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이유를 알았다.
내 목소리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목소리였다.
내가 화를 냈다니,
그 이유는... 어째서였지?
"... 괜찮아?"
탁...!
나는 내 옷소매를 붙잡은 작은 손을 무심결에 쳐내고 말았다.
"아."
누군가 날 부르지 않았다면, 기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의미한 의문과 함께 분명 또 홀로 생각에 빠져들어 두통의 연쇄를 불러왔을 테지만... 고맙게도 나를 정신 차리게 해준 소녀는 손등을 얻어맞고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어느새 소녀는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전보다 좁혀진 거리.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야 말았다.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소녀에게 다른 이유는 필요없었다.
다른 복잡한 걸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소녀는 그저 목적없는 깨끗한 선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내가 졌구나.
"... 기다려 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허락이 떨어지자 망설임 없이 다음 돌무더기로 향하던 소녀는, 잠시 멈추고 뒤돌아 보더니 끝내 내게 이런 말까지 해버리고 만다.
"고마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