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5. 악운의 교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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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악운의 교차점(3)
이번 여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도망치듯 떠난 장소에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두 어깨로 느껴지는 관의 무게는 처음 바실리카를 나섰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목적이 생겼기 때문일까 평소만큼이나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을 늘어뜨리지는 않았다.
이 선택이 이후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을 구원한다?
자신의 트라우마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주제에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한다는 건지, 웃음이 나온다.
포기와 외면으로 일관해온 지난 시간들을 모른 척하고 손바닥이라도 뒤집듯 그리 간단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게 그런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단순히 조금 더 간절하게. 죽고 싶어진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검은 연기를 걷어내고, 내게 죽을 수 없는 저주를 내린 용과 마주해야 한다.
신의 축복과 선택이라는 휘황찬란해 보이는 이름 아래, 구원의 족쇄를 차게 된 불쌍한 이들을 도와... 어긋난 삶을 마무리할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육신과 마르지 않는 은총을 지녔으니, 이것에는 그 어떠한 필사의 각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제 몸을 혹사시키며 여태껏 이어온 태만에 대해 속죄라도 하는 척 자기 위안에 빠지려는 추악한 욕망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그렇게 무사히 끝의 장소에 다시 도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도와 간악한 용을 찢어 죽이고, 마침내 이 저주를 벗어던진다.
빼앗겼던 것을 모두 되찾는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등 뒤의 관을 열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이기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아,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원하고 나 역시 원하는 이야기의 끝일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나를 원망할 만한 단 한 사람이 방금 막 떠올랐지만.
그 녀석이라면 분명 내가 마무리 짓지 못한 것들을 해결해 주겠지.
그런 녀석이니까..
"..."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난 정말 구제불능의 쓰레기구나.
".. 하하."
지금 내 기분만큼이나 지독한 탄내를 풍기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나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
새어 나온 웃음은 금세 말라버려, 연기를 타고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그제서야 연기를 의식하고 눈을 깜빡이자 뻑뻑한 눈가로 눈물이 스며들어 따갑던 안구를 적신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닥불을 바라보며 얼마나 오랫동안 이 한심하고 위대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싶다.
모닥불의 연기 너머로,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있는 수인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새근... 새근..."
산길로 들어선지 이틀이 다 되어가는 때까지 나와 소녀 사이에 대화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고맙다고까지 말해준 소녀에게, 그어놓은 선을 보여주며 다가오지 말라고 말한 것은 이쪽이었고, 나는 그에 따른 고요와 편안함을 얻고 만족하고 있는 중이다.
주변이 트여있는 장소를 발견하고, 내가 멈춰 서면 소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땅바닥을 쓸어내고 썩은 나뭇가지들을 주워와 한곳에 쌓아둔다.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고, 자리에 앉아 마물의 고기를 구워 식사를 마친 다음 먼 걸음에 지친 소녀는 잠에 들고, 나는 앉아서 홀로 시간을 보낸다.
타닥. 탁.. 타닥...
대강 기다란 나뭇가지가 불씨에 먹혀들어가는 것을 다섯 개 정도 보고 있으면, 소녀는 일어났었다.
후둑... 투둑,
탁...
그리고 방금 막, 자신의 몸을 전부 불사르고 반으로 부러져 넘어지며 쌓여있던 불씨를 일으킨 것이 바로 그 다섯 번째였다.
".... 으응.."
정확하다.
몇 번 더 꼼지락 대는가 싶더니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일어난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스폴로 향하는 배를 탈 항구마을까지 작은 산등성이 하나만이 남아 있다. 저곳만 넘으면 곧바로 마을이 보일 것이다.
스윽.. 슥....
모닥불을 끄는 소녀의 인기척을 들으며, 나는 나아갈 방향에 미리 서서, 소녀가 오기를 등지고 기다렸다.
유일한 불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소녀가 내 곁에 있음으로써 몸은 조금 편해졌을지언정, 마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다리 위의 흔적, 트라사의 참변.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인지 이틀간 마물의 습격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 조차 신경쓰인다.
이미 시작된 강물의 커다란 흐름을 내 빈약한 손으로는 막아세울 수 없겠지만, 이것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막연한 두려움만을 어깨 위에 싣는다.
내 주위로 가로질러 들어오는 악운의 사이사이를 여태 운 좋게 빠져나갔다고 해도,
아주 조금만 시간이 이르거나 늦었다면 분명 정면에서 맞닥뜨렸을 사건들이다.
믿을만한 이에게 소녀를 맡기고, 나는 떠난다.
잠깐의 변덕으로 시작된 인연이니 그 정도가 알맞은 결말이다.
소녀는 내 옆이 아닌 뒤로 걸어와 발걸음을 멈춘다.
그래, 스폴에만 도착하면 이 이유 모를 감정도...
"..."
파박!
팍..!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한 그때, 썩은 나뭇가지가 거칠게 부러지며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내 시야 위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검붉은 잔상을 보았다.
이 어둡고 적막한 산길 위에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색채다.
"...!"
그 불길한 색을 인지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가호를...!!"
퍼걱..!!!
챙강!
팔의 혈관을 전부 갈기갈기 찢어놓을듯 급하게 끌어올려진 보호의 기운이 소녀의 몸 주변으로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
내뻗은 내 팔이 어깨채로 뜯겨져 나가 눈앞으로 떠오르는 것과,
보호막이 힘없이 깨져나가며 소녀의 허리가 옆으로 꺾어지는 것을 보았다.
"케욱...!"
산산조각 난 보호막의 파편 사이로 소녀의 입에서 울컥 피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잠깐이었지만 나는 시간이 느려진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내 대처가 늦었다.
눈앞에,
적어도 내 옆에만 있었더라도 제때 반응했을 것이다.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쐐애애액..!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다.
쾅!!!
후두두둑 쿠구구구궁....!
힘을 버티지 못한 그 작은 몸은 그대로 날아가 썩은 나무를 박살 내며 주변으로 먼지구름을 일으킨다.
"아....."
남은 왼팔로 이미 잡을 수 없는 소녀에게 뒤늦게 손을 내뻗었다.
양손 그 어느 쪽에도 잡히는 것은 당연히 없다.
그 잠깐의 기다림도 주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두 번째 살의였다.
쐐애애애액...!
뻗고 있던 나머지 팔을 마저 날려버리기 위해 어깨 쪽으로 비스듬히 날아오는 노골적인 적의가 느껴진다.
불쾌했다.
"... 너희들은."
신성한 기운이 왼팔로 모여든다.
마르지 않는 은총은 멈추지 않고 왼팔로 격류한다. 한계의 한계까지.
막아놓은 둑이 터질 듯 울렁거리고, 수면 위로 넘실거리며 당장이라도 넘쳐 흐를 듯 요동친다.
쩌적... 쩍..
둑에 금이 가기 시작한 그때.
우드득...!
꽈직...!!!
나는 팔을 휘둘렀다.
꿍......!!!!
내게 달려들다 되려 머리를 얻어맞은 검붉은 로브는 디디고 선 땅이 크게 울릴 정도로 그 몸뚱어리를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박았다.
머리에 담아두던 끈적한 피를 전부 꺼내 둥글게 튀기며 한쪽 다리를 덜덜덜 떨다가 이내, 축 늘어진다.
우드드득... 우득.....
내 왼팔 역시 발치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늘어진다.
"어째서..."
불쾌하다. 몹시 불쾌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서는
내 악운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일까.
셋.
"와드득 와즈득...! ㅈ. ㅈ. ㅈ. 죽었다..!"
"ㄱ. ㄱ. ㄱ. 강하다.....!"
방금 머리가 터져 죽은 하나.
내 시야 옆에 서 있는 하나.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하나.
하나같이 검붉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
"... 물어볼 필요도 없나."
이 빌어먹게도 익숙하고, 손끝이 저리는 불길한 느낌.
적룡교인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다만 저런 놈들은 만나 본 기억이 없다.
단순히 공격을 쳐낼 생각으로 휘두른 왼팔이 머리에 맞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서있는 놈이 입에 물고 있는게 뜯겨나간 내 오른팔이라는 것.
손에 무기 하나 들지 않고, 이빨로 공격을 해오고 앉았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적룡교에서 개새끼를 기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뚜욱.. 뚝... 뚝..
나무 위에 올라서 있던 놈은 어두운 로브 아래로 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ㅇ. ㅇ. 인간. ㅁ! 먼저!"
... 굶주린 건가..?
한쪽 팔은 힘없이 늘어뜨리고, 나머지 한쪽 팔은 저쪽에서 뜯어먹히고 있다.
내게 공격을 한다면 지금 해야겠지.
당연했지만, 내 오른팔을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는 놈은 그 당연한 동료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카아아아악...!"
우지끈..! 쾅!!!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도약만으로 나무를 박살내며 홀로 내게 날아들어 온다.
"..."
말투, 행동을 보면 지능은 떨어져 보이지만, 저 상식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만큼은 확실히 위협적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멍청하지 않을 때에 말이다.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달려드는 놈의 앞으로 나는 이미 사라진 오른팔을 내밀었다.
이미 동료의 입에 물려있는 오른팔에 별다른 위협은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들던 놈의 눈 앞으로 내 저주가 그 지독한 모습을 드러낸다.
드드드득...!
놀랍게도 사라진 오른팔에서는 순식간에 뼈가 솟아났다.
푸욱!!
"ㄲ. 꺽....!!"
다 자라나지 않아 아직 끝이 날카로운 뼈는 크게 벌리고 있던 놈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대로 머리 뒤를 뚫고 나온다.
그에 따라 후드도 거세게 젖혀지며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ㄲ. 꺼윽.. ㄲ. 끅...."
칵! 칵. 칵. 칵.
머리를 꿰뚫려 힘이 빠진 상태로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려대면서도 이빨을 맞부딪히며 내 뼈를 씹으려는 놈의 얼굴은, 짐승과 인간의 어느 불쾌한 중간.
눈 아래쪽으로 부자연스럽게 털로 뒤덮여 입과 턱이 튀어나오고 날카로운 이빨들을 가지고 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열심히 이빨을 맞부딪히는 놈.
꾸즈즈즈즈즉...!!!
하지만 먼저 내 뼈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한 징그러운 근육 조각들은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덩치를 불렸고, 원래 내 팔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과 함께 놈의 관통된 상처를 강제로 넓혀버린다.
"게헤윽....!"
꾸드득...!!
이 정도로 죽을 몸이라면, 진작 불속에 뛰어들었겠지.
팔의 부피를 못이기고 턱이 부서져 허물어진 놈의 얼굴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뜯어내 바닥에 집어던졌다.
꽈직...!
재생된 오른팔에 두어번 힘을 주어 제대로 움직이는지를 확인하며, 발밑에서 덜덜 떨고 있던 놈의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
이제, 남은 건 하나.
콰득... 콰직... 우드득..!
그러거나 말거나 그 사이 내 팔을 뼈째로 씹어삼킨 놈은 두 손에 묻은 피마저 아까운듯 혀를 내밀어 빨아먹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내 신체를 뜯어먹는 모습을 보는 건, 직접 느끼는 고통보다도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털로 뒤덮인 커다란 두 손과 날카로운 검은색 손톱을 보면, 놈 역시 짐승과 인간 사이 어중간한 무엇처럼 보인다.
주변에 다른 놈들은 더 없는 건가?
...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놈을 빠르게 처리해야..
찌지지직....
"...?"
"ㅇ. 아직..!, ㅂ! ㅂ. ㅂ. 배고파...!!!"
부스러졌던 왼팔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단번에 처리할 생각으로 두 다리에 힘을 싣은 그 때였다.
찌직.. 찌지직...!!
꾸드드득..! 꾸득...! 꽈드득...!!
순간 놈에게서 느껴지던 불길한 기운이 급격하게 요동치는가 싶더니 덩치가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검붉은 로브 위로 꿈틀거리는 근육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다 힘에 못이겨 찢어지고, 고작해야 평범한 성인 남성 체구였던 놈은 어느새 나보다도 훨씬 덩치가 커져, 오히려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가 되어있었다.
찌지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아아악...!!"
주변의 대기를 울리는 영락없는 짐승의 커다란 울부짖음과 함께, 몸에 걸리적거리는 로브조각을 아예 찢어던져버린 놈은...
"... 대체..."
나 역시 문헌으로만 보았던, 순혈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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