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5. 악운의 교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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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악운의 교차점(5)
"끄으으..."
온몸이 당장이라도 부스러질것같은 고통에 눈이 뜨였다.
방금 들려온 소리는 이를 악문 채 무의식 중에 내뱉은 내 신음이었던 모양이다.
시야 바로 위로 느껴지는 어두운 얼룩에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뜨자, 따끔거리며 피 섞인 흙먼지가 떨어져 나간다.
"후윽.... 후으.."
한쪽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 힘겹게 고개를 비틀어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로 자욱하게 깔려있는 연기가 둥글게 퍼져나가 잠시나마 검은 하늘을 드러냈고, 그 주변으로는 마치 어둠에 먹혀들듯 빛이 서서히 흩어져 가고 있는 게 보인다.
폭발직후의 후폭풍이 몰아치는 모습은 아직까지 진행중에 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치이이이이이익...
"...?"
아까부터 거슬리던 이 소음에힘겹게 다시 고개를 틀었더니 손등 위로 피어오르는검붉은 연기가 보인다.
다름아닌 내 오른손으로부터 들려오던 소리였다.
"끙..."
맨몸으로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져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다.
이는 몸뚱어리는 물론 신경까지 재생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겨우 잠깐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바로 깨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신성폭발의 매개로 삼았던 오른손 만큼은 겉모습은 재생이 되었어도 아직까지는 감각이 없다.
신의 은총에 의해 먼지가 되어버렸던 만큼 저주의 효과가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겨우 이 정도에 나를 놓아줄 리 없는 지독한 용의 저주는 그만큼 집요하게내 오른손에몰려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 끄윽..."
독기를 뿜어대며 덜렁거리고 있는 오른손을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무릎과 허리에 힘을 주어 기어이 몸을 조금 일으켰다.
두 팔을 늘어뜨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듯한 자세로, 나는 흩어져 가는 빛무리를 지켜보았다.
"...."
그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은, 겨우 발목 즈음 밖에 남지 않은 한 쌍의 발과 적은 양의 핏자국.
암청색의 털로 뒤덮인 짐승의 커다란 발만이 남아 땅 위에 발바닥을 붙이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제 몸속에서 일어난 폭발에서까지 살아남을 만큼 무식한 괴물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놈의 힘과 속도는 한계 가까이 신체를 강화한 나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외관,
분명 순혈자의 모습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것은 마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은...
"으윽..!! 후우..."
결국 바닥을 짚고 두 다리로 일어선 나는, 점차 희미해져가는 하늘의 빛 아래에서 발밑으로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힘겹게 걸어나갔다.
시야가 계속해서 흐릿해져가고, 다리는 위태로이 휘청거린다.
육체가 재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고통이 가져다 준 정신적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 채로 살점과 내장을 씹어먹히는 고통을 인내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다시 감기려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다음 발걸음을 지체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신경이 재생되며 잠깐 번뜩인 그 고통에 겨우 정신을 차린 거지만, 다시 한번 눈을 감게 되면 틀림없이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기어이 몸을 이끌고 멈춰선 곳은, 처참하게 부서진 바닥 위로 고요히 몸을 늘어뜨린 소녀의 앞이었다.
"..."
놈의 팔꿈치에 복부를 얻어맞고 바닥이 부서질 정도로 내리 꽂혀, 그러고도 몇 번을 더 구른 끝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소녀의 여린 팔다리는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있어, 온몸의 뼈가 조각나 부서졌다는 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털썩.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인 사이 시야가 내려앉아 있다.
나는 어느새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소녀의 바로 옆,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함께 떨어져 있는 검은색 단검을 보았다.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는 의미로 돌려준걸, 오히려 날 구하기 위해 들고 달려들어서는 이 꼴이 되었다.
대체 왜, 나 같은 걸 구하려 한 거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인간 같지도 않은 나를.. 그냥 내버려 뒀다면 좋을 일이었다.
굳이 몸을 내던져야할 이유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 그렇게 되어버렸다.
".. 길 잃은 어린 양을 부디.. 외면하지 마시어, 당신의 자애로운 빛으로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시고.."
"..."
"이... 어리고 가엾은... 소녀에게.."
"....."
".... 아.."
치유의 기운은끔찍한 몰골이 된 소녀의 몸 위로스며들거나 맴도는 일 없이 그대로 흩어져 버린다.
미동도 하지 않고 차가운 바닥에 그저 몸을 누이고 있다.
죽은 것이었다.
"... 이 아이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
"왜 이 아이가 죽어야 하는데."
"....."
왜...
왜 이 소녀가 죽어야 하지?
이곳에 누워있는 게, 왜 내가 아니고 이 어린 핏덩이여야만 하지?
북대륙에서 수인으로 살아오면서도 끝까지 잃지 않은 이타심으로,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고 단검 하나를 쥐고 몸을 내던진 소녀에게...
어째서 신은 이런 불합리한 결과를 내놓은 거지?
이 결과로 대체 무슨 의미가 남았지?
...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소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아직 따뜻하다.
소녀가 토해낸 피로 지저분한 입가를 닦아 주었지만 고개가 툭 떨궈지며 입안에 고여있던 찐득한 핏물이 다시 울컥 흘러내리고, 애써 닦아낸 얼굴은 다시 피로 물들었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는 치유의 기운을 소녀의 작은 몸에 계속 흘려보내면서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건 슬픔이 아니었다.
그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이 세상은 왜 이토록 불합리한 운명을 들이밀면서도 믿음을 강요하는 것인가.
오른손에는 이미 감각도 없었지만, 억지로 소녀의 이마에 올려놓고 무리해서 은총을 쏟아내었다.
오른팔에 뭉글거리고 있던 용의 저주가, 팔을 타고 흐르는 신성한 기운에 반응하며 살가죽 아래로 격렬하게 부글거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르지 않는 신의 은총은 내게 있어 축복이 아니다.
이렇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 찬란하게 빛나는 족쇄 때문에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정처없이 흔들리던 눈동자는, 소녀의 이마 위에 얹어진 오른손 위로 피어오르는 검붉은 연기에까지 닿는다.
"영혼과.. 피에 새겨진 저주..."
붉은 용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
홀린듯이 단검을 주워 들었다.
스걱.
주저없이 내 손바닥을 깊게 베어내자 그 위로 검붉은 피가 차올랐고,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저주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
치이이익....
상처는 곧바로 아물었고, 손바닥 위에서 불길한 색채를 띠는 핏물은 은총에 반응하여 점차 연기로 변해 흩어져가고 있다.
"..."
... 포르투나의 강줄기는..
결국 하나로 돌아온다고 했었지.
운명의 종착점이라는 게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은 은총과 저주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내가 그 둘을 모두 이용하여 지금 내 힘으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주르르륵... 툭...... 투둑...
손바닥을 기울이자 소녀의 입속으로 내 피가 흘러내린다.
나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나는 소녀가 내 피를 마시고 목 너머로 넘기게 만들었다.
"제발..."
"..."
"...... 제발."
"..."
바꿀 수 없다는 운명에 기대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악의 수에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소녀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하.. 하하..."
역시.. 가능할 리가 없나.
이런상황에까지 다다르고나니, 오히려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 어린 수인 소녀 한 명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크게 휘몰아쳐 온다.
"..."
오랜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자괴감에 빠져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그때였다.
두근.
"...?"
움찔.
지난 100년간 대답없던 저 하늘 너머에 처음으로 내 기도가 닿은 것일까?
".. 쿨럭.."
".....!"
아주 작은 기침소리를 시작으로, 소녀를 껴안은 두 팔에 작은 고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안될 거라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만큼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로 내 피에 담긴 저주 때문에?
아니면 내가 끊임없이 은총을 쏟아냈기 때문에?
이유야 어떻든 지금 내게 지금 중요한 건, 소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숨이 붙어있는 이상, 내가 살리지 못할 이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녀를 두 팔에 단단히 안아들고, 관을 둘러맨 나는 이 작은 몸에 맞닿은 두 팔에 치유의 기운이 끊기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붙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휘청거리던 두 다리가, 바닥을 힘껏 때리며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
건너려고 했던 그 산등성이를 이제서야 넘어 마을이 있는 곳을 어둠 너머로 바라보았다.
놈들이 온 방향은 바로 저 마을로부터였다.
그 셋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만큼,
도와줄 이가 있는 스폴로 가기 위해서는 저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운명이 정말 정해져 있는 거라면, 두려워할 이유 또한 없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 세상의 불합리함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이 소녀만큼은 반드시 살려내리라 각오하며 제대로 경계를 할 새도 없이 서둘러마을로 내려온 나였지만,
"이건....?"
나는 내가 또다시 환각에 빠져버린 것인지 두 눈을 의심하며 다리를 절고야 말았다.
내가 일으켰던 신성폭발을 수십 번은 더 터뜨린 것처럼, 초토화 되어버린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리 위에서 보았던 그 흔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이 전투의... 아니, 정말 전투의 흔적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광경.
이를 보고 머리를 스쳐지나간 생각에 내 발걸음은 다시금 빨라진다.
"..."
자욱한 먼지로 가득하던 마을과는 달리 항구에 도착하자 옅은 피 냄새가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배를 대어놓은 그 위로, 민무늬 가면을 쓴 뱃사공의떨어져 나간 머리통을 결국은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의 시신이 이미 온기를 잃어버린지 오래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자연스레 어둠 저 너머로 길게 이어진 쇠사슬로 시선이 가 닿는다.
불안은 확신이 되었다.
... 이미 그들은 강을 건넜다.
"... 수.."
당장 품안에도 소녀가 생명의 불꽃을 위태롭게 아른거리고 있었지만,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목구멍 아래에서 덩치를 키워나가는불안에 괜히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북대륙에서 꼼짝 않던 녀석들이 이렇게까지 움직인 것은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나와 소녀를 습격해온 그것들의 정체는 뭔지,
놈들에게 있어 신탁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은..
눈앞만을 바라보고 달려갈 수밖에 없다.
철겅..!! 철그르륵....!
높이 뛰어올라 두꺼운 쇠사슬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붙이자, 묵직하게 출렁이는 사슬의 울림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와 정신을 일깨운다.
내가 상대한 그 정신 나간 괴물이 만약 더 있다고 한다면..
스폴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불길에 휩싸여 사라질 것이다.
"...... 수..."
무사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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