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26화 (26/137)

〈 26화 〉 5. 악운의 교차점

* * *

5.악운의 교차점(6)

까맣게 넘실거리는 강의 수면 위,

짙게 깔린 안개 저 너머로 두꺼운 쇠사슬이 길게 이어져있다.

쩔겅..

무겁게 늘어진 사슬길은 배가 다니지 않아도 바람에 흔들려 서로 부딪히고, 이따금씩 소리를 낸다.

항구의 망나니들은 이 소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쩔그럭.. 쩔그럭....

스폴의 어두운 항구, 쓰인지 오래되어 모서리가 썩어들어간 나무 상자들을 의자와 탁상으로 삼아 가운데에는 랜턴을 올려두고 한가하게 도박을 즐기고 있는 두 망나니가 있다.

다만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망나니일 뿐이지 주로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들이 항구에서 경비를 서며 상단연합으로부터 하루하루 늘어나는 빚의 이자를 삭감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단순하다. 허가증 없이 스폴로 발을 들이려는 이들, 혹은 배를 타려는 이들의 목을 베는 것.

그것이 설령 가족, 친구, 노인, 혹은 어린 소녀나 아이를 밴 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스으읍.. 후우... 그러고 보니, 이틀 전 일 소식은 들었나?"

"망나니 둘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일 말입니까?"

"사공도 돌아오지 않았다지."

이곳으로부터 북서대륙 셀틱으로 이어진 세 줄기의 사슬길을 스윽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사이 몰래 밑장을 빼면서, 아무렇지도 않는 척 그가 보는 방향으로 함께 고개를 돌리는 상대적으로 젊은 인상의 사내.

"조만간 사공을 보내서 배를 회수한다고 합니다."

"사공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야 가끔 있었다지만.. 망나니 둘이 함께 사라져 버린 건 조금 꺼림칙하군."

"... 확실히 그렇네요."

망나니들은 이인 일조로 교대해가며 강바람을 맞아 여기저기 녹이 슬어있는 커다란 칼을 들고 사슬길을 지킨다.

만약 그게 누구든 허가증 없이 발을 들이게 했다가는 목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이 될 테니 말이다.

"셀틱으로 갔을 리는 없고.. 마연에 취해서 손잡고 강에 몸이라도 던진 것 아닙니까?"

"허, 그자들한테 마연을 구할 돈이 어디 있다고."

연초를 꼬나 문 나이 든 인상의 사내는 오래 앉아있던 게 불편했는지 허리를 펴 보이고는 힘없는 한숨을 내쉰다.

"뭐 그렇죠.. 자, 그럼 슬슬..."

"장난질한 패는 다시 내려놓게."

"... 윽."

철그렁... 철그럭..

"...?"

"왜 그러나?"

철그럭... 철그럭. 철걱....

아쉬운 표정으로 카드를 내려놓던 사내는 문득 고개를 돌리고 안개가 짙게 낀 강 위를 바라보았다.

"영감님, 오늘 배 나갔습니까?"

"아니."

영감이라고 불린 이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안개 속으로 늘어진 세 사슬길들중 가운데의 쇠사슬이 유독 부자연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들어올 배가.. 있기는 했지."

카드를 내려놓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피던 연초를 강에 던져버린 그는 당장 옆에 기대어 놓았던 칼을 쥐어든다.

이틀간 돌아오지 않았던 배가 이제서야 돌아오고 있는 것은 그다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

이에 따라 젊은 인상의 사내도 함께 칼을 쥐어든다.

쩔겅! 쩔겅..! 쩔껑..!쩔껑..!쩔껑..!!쩔겅..!!

안개 너머로 희미한 빛이 비친다.

하지만 배에 걸어두는 등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하얀 그 빛은, 게다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

쩔겅! 쩔컹! 철껑.!! 철그럭..!!

이젠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요동치고 있는 사슬길을 바라보고 있는 두 망나니는 마른침을 삼키며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철그럭...!!

사슬길의 아래가 아닌 그 위로 달려오고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한 둘은 눈을 크게 뜨고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옷은 여기저기가 다 찢어져 엉망진창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피와 흙먼지에 잔뜩 뒤덮인 큰 키의 사내가 사슬길을 따라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의 두 팔에 안겨있는 작은 어떤 것으로부터 안개 너머로 보았던 그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아니, 그의 손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건가...?

"잠...! 잠깐...!!"

안개를 빠져나온 그의 모습이 조금 더 정확히 보이기 시작한다.

등에 짊어진 커다란 관,

관과 함께 스스로의 몸을 조이고 있는 사슬들.

마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차례 안심하기는 했지만, 도저히 평범하다고는 보기 힘든 그의 모습에 그들은 황급히 일어나 사슬길 앞을 막아섰다.

턱...!!

철그렁..!

쿵......!

흔들리는 사슬 위를 평지처럼 내달려 이곳으로 건너온 정체불명의 사내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 둘의 앞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그는 칼을 들고 선 두 망나니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다.

이내 그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의아함이었지만, 곧 시선을 내려 품에 안긴 어떤 것을 쳐다보고는 급히 발걸음을 서두르려 한다.

그제서야 둘은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의 품에 안겨있던 것이 오히려 그보다도 심각해 보일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는 한 명의 소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고, 소녀가 옷 대신 두르고 있는 누더기에까지 시선이 닿았다.

아무리 봐도 허가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은 행색.

오히려 셀틱의 주민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잠깐..! 허가증이 없다면...!!"

"....!!"

결국 젊은 망나니가 칼끝을 들이밀려한 순간 옆에 있던 이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팔을 붙잡아 제지하고 나선다.

"영감님..?!"

"..."

"....."

젊은 사내는 잔뜩 겁에 질린 그의 눈동자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그의 두 팔이 덜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까지 보고나서야, 자신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떨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앞을 막아서려는 이유는 죽고싶지 않기 때문인데, 그러기 위해 지금 죽어야 한다면 그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내는 눈앞의 피투성이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별다른 위협의 제스처같은 것은 없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그는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꺼먼 강물보다도 어둡고 짙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험악하게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어... 으으..."

아주 조금만 더 칼끝을 앞으로 들이밀었다면 자신은 분명 저 차갑고 어두운 강바닥에 가라앉았을 거라고, 그는 그렇게 직감했다.

타앗...!

"... 어어...!"

긴장감이 교차하던 그 순간, 상대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피투성이의 사내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높게 뛰어올라 건물 위의 지붕으로 내려앉는다.

".... 아..."

그렇게 건물들의 지붕 사이사이를 날렵하게 뛰어오르며 멀리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둘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난처함에 서로를 바라보는 둘.

"... 우리 이제.. 어떡합니까... 영감님..?"

"어떡하긴.. 신고 먼저 해야지. 이틀 전 그 일도 있겠다 우리 목이 곧바로 달아나지는 않을 테니."

"하아.. 정말 그럴까요."

"그럼.. 방금 죽는 게 나았을 거라는 겐가?"

그 질문에는 고개를 젓는 사내였다.

타닥...! 드르륵...!

지붕 너머로 민첩하게 뛰어넘는 한줄기 빛을 그 아래에 수많은 주민들이 밤거리를 다니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의 머리 위로 환하게 밝혀진 거리의 화려한 등불들 덕분이었다.

드르르륵...! 쩍..!

"뭐... 뭐야?"

지붕 위의 기왓장이 밀려 떨어지자 지나가던 행인이 깨져나간 그것에 깜짝 놀라 위를 쳐다보았을 때는 이미 빛은 스쳐 지나간 이후였다.

피투성이의 사내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며칠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리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스폴에서 가장 높은 고급 객잔, 금란객잔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허억... 헉...."

눈꺼풀이 무겁다.

안그래도 흐릿한 시야 속에서 초점도 제멋대로 흔들리는 까닭에 몇 번이나 지붕 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쉼 없이 달려온 탓에 발바닥은 뜨거워져 눅진눅진해진 살갗이 찢어질 듯하고, 다리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부들거리고 있다.

왜 이곳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단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뿐인 건...

아니면, 그저 내 지레짐작 이었던 건가..?

예상과는 다른 스폴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좋지않은 상황이 벌어지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금란객잔에 가야 한다.

휘릭!

텁!

멋들어진 곡선을 그리며 끝이 살짝 들려있는 객잔 각층의 지붕 위를 밟으며, 순식간에 최상층까지 뛰어오른 그는 드디어 창문 너머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집무실의 책상 앞에 편한 가운 차림으로 업무라도 보고 있었던지 성실하게 펜을 움직이고 있던 그녀의 뾰족하게 솟은 귀가 한 순간 움찔한다.

창밖의 소음에 반응한 그녀의 시선이 창문 쪽으로 돌아간 순간.

와장창...!!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그는 그대로 발을 헛디뎌 창틀과 창문을 깨부수며 집무실 안으로 굴러넘어지고 말았다.

".... 에단...?!"

엉망인 모습을 보고도 용케 그라는 것을 알아채고 크게 놀라 벌떡 일어난 그녀는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당장 내달려 쓰러진 그에게로 달려간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

그는 처음 보는 소녀를 품에 안고서 넘어진 채로도 희미하게 빛을 깜빡거리며 치유를 계속하고 있다.

"... 수....."

무어라 이야기를 들을 새도 없이 힘겨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는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다 정신을 잃고 만다.

"... 다행이다.."

그리고, 그의 두 손으로부터 새어 나오던 빛 역시 희미해지며 곧 흩어져 버린다.

풀썩.

"에단...? 에단...!!"

드르르륵...!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뒤늦게 문을 열고 달려 들어온 두 명의 경호원들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가서려 했지만 그녀는 급하게 한쪽 손을 뒤쪽으로 들어 보이며 더 다가오지 말라고 신호한다.

"괜찮아, 아는 사람이야. 그보다 의사, 사제... 누가 됐든 빨리 불러와..!"

"... 그.. 그렇지만.."

"내 말 못들었어? 스폴에 있는 의사, 사제! 모두 데려오라고...! 어서!"

"알겠습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바깥으로 달려가는 경호원들.

"에단.. 대체 어쩌다가..."

그가 몸에 묶어 놓듯 지고 있던 관을 풀어 한쪽 옆으로 밀어두고, 그를 바닥에 눕힌 수는 그의 사제복이 많이 훼손되어 있고 혈흔이 묻어 있을 뿐 눈에 띄는 외상이 없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는 것보다도 먼저 마음깊이 안심했다.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치유하고 있었던 소녀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아보인다.

팔다리는 반바퀴 씩 헛돌아 힘없이 늘어져 있고, 여기저기 살갗 위로 부러진 뼛조각들이 튀어나와 출혈이 계속되고 있다.

중요한 내장기관을 우선해서 치유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겨우겨우 숨만 붙이고 있었던 수준.

이 어린 소녀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크게 다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펄럭.

"..."

우선 치유에 방해될 이 누더기부터 벗겨놓자는 생각에 후드를 젖히자 튀어나온 뾰족한 귀,

그리고 한 쪽 귀 끝의 잘려나간 흉터를 보고 그녀는 잠깐 당황했지만 피로 얼룩진 소녀의 망토를 벗겨내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의 옆에 소녀를 똑바로 눕힌 수는 당장 집무실의 수많은 전시장들 중 하나의 앞으로 가 유리로 된 창을 열고는 황금과 보석으로 된 고가의 장식품들 사이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주변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식품들에 비해 초라한 크기와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서 영롱한 빛깔로 찰랑거리는 액체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 나한테 빚을 지게 되다니. 안타깝게 됐네."

무책임하게 쓰러져버린 그와 수인 소녀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건네며, 병의 마개를 연 그녀는 소녀의 상체를 잠시 들어 올리고는 조심스럽게 그 작은 입 안쪽으로 유리병의 액체를 흘려 넣기 시작한다.

눈에 띄는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유가 멈추자 울컥거리던 출혈이 줄어들었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소녀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져가고 있다는 점은 수가 사용한 액체가 치유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끔 한다.

"나는 상인이니까, 이 빚은 두 배로 받아낼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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