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29화 (29/137)

〈 29화 〉 6. 여우와 늑대

* * *

6.여우와 늑대(2)

몸을 씻는 시간보다도 그저 떨어지는 물줄기를 받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시간이 더 길어져 버린 것 같았지만, 슬슬 나가보기로 했다.

달칵.

문을 열고 나오자 그 앞에는 들어갈 때는 없었던 수건이 내가 놓아둔 사제복 위로 곱게 개어져 있다.

수가 다녀간 모양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세심한 배려는 그녀가 나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고, 그녀가 수선해 준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른팔의 소매는 어깨 아래로 완전히 사라져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집무실로 돌아오자,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무언가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옳지 옳지.."

소녀의 몸 이곳저곳에 감겨있는 피가 말라붙은 붕대를 떼어내고, 상처 부위에 새로 연고를 발라주고 있다.

"내가 할게."

"괜찮겠어? 당신 이제 막 일어났는데..."

".. 괜찮아."

소녀의 몸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다.

몸을 지탱해 주는 뼈가 큰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면서 그 날카로운 조각들이 살갗을 뚫고 나오고, 내장을 찢어발긴채 그대로 틀어박혀 버린 것이 치유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의 몸은 여기저기 보이는 외상 이외에는 크게 문제 될 곳 없이 말끔하게 잘 치료되어 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그녀가 힘써준 덕분이겠지.

성양문을 외울 필요도 없이 소녀의 이마 위로 손을 얹자 흘러나온 치유의 기운은 가녀린 몸 위로 즐비하던 수많은 상처들을 깨끗하게 씻겨내린다.

"새액... 색.."

소녀의 호흡과 표정이 한층 더 편해지고, 이제서야 정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대단하네."

"글쎄."

새로 감아주려던 걸 내려놓고, 피 묻은 붕대를 풀어놓은 것들을 모아 한쪽으로 치워놓는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소녀의 숨은 분명 끊어졌었고,

나는 그런 소녀의 입안에 저주의 기운으로 가득한 피를 흘려 넣었다.

만약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뛸 수 있었던 이유가 용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지금은 그녀의 몸으로부터 나와 같은 저주의 기운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지 의문이다.

정말 기도가 통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에단, 당신 나한테 빚진 거야?"

정리를 마치고 상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검지 끝으로 내 어깨를 쿡 찔러오는 그녀.

"그래, 알고 있어."

"당신이 허가증도 없이 데려온 이 꼬맹이 때문에 두 사람 목이 날아갈뻔한 건 알아?"

"그때.. 그 망나니들인가."

이제서야 기억났다. 날 막아섰던 그 둘.

"뭐, 나야 상관없지만~? 당신이랑 이 꼬맹이한테는 신경 쓰일까 싶어서 손은 써뒀어. 괜한 참견이었을까?"

".. 고마워."

혹시나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배려하여무심코 지나갈 법도 한 문제들을 이렇게나 빠르게 대처해 준 그녀를 보면, 확실히 저 자리에 앉아있을만 하구나 하고 느낀다.

"응? 아직 고맙다고 말하기는 이른데."

"...?"

"스폴의 의사, 사제들을 전부 데려와서 이 꼬맹이를 보게 한 치료비,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크기의 빈 유리병 하나를 들어 내 쪽으로 보여주며 말을 잇는 그녀.

"대주교가 직접 축복을 내린 이 귀한 성수도 써버렸단 말이야. 사실 이게 가장 값비싸지."

".. 성수?"

상처 치유와 더불어 해주와 정화에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성수는 바실리카의 대주교가 매일같이 신실하게 기도에 참여하여 일 년에 고작 세 병, 많아봐야 다섯 병 정도가 나온다는 귀한 물건이다.

나야 이전에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던 물건이지만.. 바실리카가 문을 굳게 닫고 벌써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바깥세상에 남아있는 수량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아후후후."

하지만 그녀는 성수가 담겨있던 걸로 보이는 비어버린 유리병을 들고서도 크게 아까워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대가 없이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이 꼬맹이는 아니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대로 갚아주길 바랄게?"

성수... 성수라.. 또 예상치 못한 게 튀어나왔다.

저주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지금에서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되살린 용의 저주가 다 퍼지기 전에 성수의 효과로 정화된 거라고 한다면..

"에단, 듣고 있지?"

"... 듣고 있어."

"그래서.. 어떻게 갚을지는 조금 생각해 봤어?"

나 역시 그녀에게 고마움을 갚고 싶다는 마음은 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거라고는...

"으흐흥.."

주저하는 내게 장난스러운 콧소리를 흘리며 슬그머니 다가오는 수.

반쯤 감은 두 눈에 금세 야릇한 색기를 담아내고, 빨갛고 뾰족한 혀를 슬쩍 내밀어 윗입술을 핥는다.

그 일종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내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당연히 옆에 잠들어 있는 소녀에게로 향한다.

"... 잠ㄲ..."

그러나 내게 주저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곧장 내 품 속에 풀썩 안겨든 그녀의 상냥한 체온을 느끼며, 밖에서 내리는 비 때문에라도 서늘함을 느끼고 있던 내 몸과 정신은 그 따뜻함을 반기고 있다.

그도 그럴게, 그만한 일들을 겪고 난 뒤 혹사당해온 감각기관에 처음으로 주어진 부드러운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난 내 침대 위에 나랑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이 올라와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도 여자가."

"수.. 잠깐만."

여자라니, 얘는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고..

그리고 아무리 이 아이의 치유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당장이라도 주변에 수상한 낌새는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항구마을을 파괴한 그들이 단순히 스폴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친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무너뜨리기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이라면...

"에단, 당신이 무슨 걱정 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마물이라면 모를까 적룡교가 스폴을 건들 이유는 아직 없으니까."

"그게 무슨..."

일종의 확신이 담긴 그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몸을 내 얼굴에 바짝 들이밀어 내가 그녀의 깊고 부드러운 가슴골에 파묻히게끔 할 뿐이다.

시야가 부드럽게 뒤덮이며, 안면 가득 느껴지는 온기와 함께 저 너머로 그녀의 심장 고동이 전해져 오고 있다.

빠르고, 격하게 두근거리고 있는 그녀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코로 잔뜩 스미는 여체의 달콤한 향기에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는 게 점차 힘들어지는 것을 느낀다.

"설명.. 제대로.. 들을 테니까...."

"응, 그러니까..."

머릿속을 온통 그녀의 향기가 스며들어 물들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힘없이 뒤로 넘어가 드디어 그녀의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그제서야 살짝 떨어지며 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준 그녀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며 한차례 귀를 쫑긋거린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만 보고, 나만 느끼고, 나만 신경 써.. 알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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