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32화 (32/137)

〈 32화 〉 6. 여우와 늑대

* * *

6.여우와 늑대(5)

치익. 탁.

화르륵.

비 탓에 서늘하고 습한 공기에도 요령 좋게 단번에 성냥에 불을 붙인 수는, 내 입에 물려있던 연초 끝에 먼저 불을 붙여 주었다.

툭.

"어머."

그리고 자신이 물고 있던 연초에도 불을 붙이려 성냥을 가져가는가 싶더니, 마치 실수인 것처럼 비 내리는 창밖으로 성냥을 떨어뜨려 버린다.

"..."

배시시 웃으며 불이 붙지 않은 연초를 문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수.

기대를 품은 눈빛으로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

대충 뭘 의도하고 한 행동인지는 알겠는데..

허술하게 손에 성냥갑을 들고 할 행동은 아니다.

치익,

"헤헤..."

치익,

칙,

"..."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성냥갑을 뺏어들어 손수 불을 붙여주려 했더니, 민망하게 불이 붙지를 않는다.

칙...

화르륵.

".. 됐다."

"쳇."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그녀의 연초에 불을 붙여주고 나서야, 나는 본격적으로 창틀에 몸을 기댔다.

저 정도 여우짓이야 한번 받아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리광이라면 이미 충분히 받아주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다.

"아후후후.."

내 품에 몸을 맡기고 부비적대며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그녀.

몇 시간 동안 쉼없이 이어진 관계 끝에 허리에 힘이 안들어간다며, 걷지를 못하겠으니 껴안아달라는 어리광을 마지못해 받아주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창밖으로, 나와 그녀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과일향 섞인 연초 연기는... 뭉치는듯하다가도 금세 빗방울 사이로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후우.. 비 그칠 때까지 하겠다더니."

아래로 늘어진 그녀의 꼬리가 내 다리 사이를 장난스럽게 두드린다.

"제발 그만 가게 해 달라면서 매달린 사람이 누구였는데. 여기에서 이어서 할까?"

"콜록.. 콜록... 그냥 해본 말이지. 더 했다가는 일어서지도 못 할거야."

가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자 기침을 하며 몸을 비틀어 내 손을 떨어뜨린다.

".. 좋았어?"

"... 응.. 뭐, 허리가 조금 불편한 것 빼고는."

내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듯한 자세이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연신 쫑긋거리고 있는 그녀의 두 귀를 보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을 그 모습이 대충 머릿속에 그려진다.

"후우우..."

흩어져 가는 연기 사이로 스폴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화려하게 거리를 밝히고 있어야 할 등불들은 대부분이 꺼져 있다.

보기 드물게 비어있는 거리,

모두 하늘을 뒤덮은 검댕과 재를 머금고 떨어져 내리는 비 때문이었다.

"그거.. 안물어봐?"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 수가 먼저 말을 꺼내왔다.

내가 그녀에게 물어봐야할 거라고 한다면 아마, 적룡교가 스폴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던 그녀의 이유모를 확신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그녀가 무사하다면 그 이유 같은 건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라면 굳이 무리해서 할 필요 없어."

"혹시 내가 말해주면.. 당신 이야기도 해 줄 거야?"

"... 그건.."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이유라던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내 착각이었다면 미안."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당신..."

스윽.

창틀 위로 놓인 내 손등 위로 그녀의 손바닥이 살포시 포개져 온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거친 손등 위로 내려앉는다.

"아까부터 손.. 떨고 있으니까."

"..."

"아니면, 나랑 이렇게 연인처럼 서 있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걸까나? 아후후.."

대답 대신 길게 이어지는 내 침묵에 재빨리 장난스러운 농담을 던지며 넘어가려는 수.

누가 상인 아니랄까봐, 눈치 빠른 건 알아줘야 한다.

게다가 정확히 비를 이유로 지목해 오니 오히려 내가 너무 티를 냈나 싶을 정도다.

"부끄러워서 당신 이야기를 못하겠다면 뭐, 됐어. 그럼 저 꼬맹이는?"

".. 우연히 만났어."

"헤에~ 우연 말이지, 나 우연은 안믿는데."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내 손등을 간질이며 계속 이야기할 것을 재촉한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야 어려울리 없다.

"처음 만났을 때, 내 목을 찔렀지."

"뭐라고..?"

참 인상깊은 첫 만남이었다.

"모친이 중태였고, 약 값을 구하려고 내 물건을 훔치려 했어. 그 약이 마연이었다는 게 흠이지만."

"아니, 아니. 당신은 괜찮아..? 목을 찔렸다면서..!"

".. 바로 치유했으니 괜찮아."

내게 안긴 채 고개를 돌리고는 내 목 언저리를 걱정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그녀.

날 걱정해주는 그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뻣뻣한 고개로 창밖에 시선을 놔둘 수밖에 없었다.

"당신 목을 찌른 애를 대체 왜 도와준 거야?"

"도와줬다기 보다는.. 모친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준 것뿐이야. 저 아이는 사과하겠다면서 멋대로 날 따라온 거고."

지금에 와서는 그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정말 제멋대로네.."

"그러게."

".. 꼭 당신처럼."

"..."

뼈 있는 그 말에 괜히 연초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뱉어냈다.

"그래도.. 당신을 구해줬다고 했지? 이름은 알아?"

"..."

이름...

"설마 당신 이름도 모르는 거야?"

"아니, 알아."

"이름이 뭔데?"

분명 그때..

"... 시르."

"흐으음..."

미심쩍은 듯한 수의 목소리.

모친이 그렇게 부르는 걸 들은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던가.

애초에 내 이름도 밝힌 적이 없었고.

"다른 보호자는 없었나 보네."

"있었다면 날 따라오지는 않았겠지."

"..."

셀틱에서 살아온 수인 소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편치않은 마음으로 나와 그녀는 잠시동안 서로 말없이 연초를 태웠다.

"사실, 너한테 저 아이를 맡기려고 했어."

"누구? 잠깐, 나..? 누가 들어준다고 그래?"

"부탁하면 들어 줄 거잖아."

"흥.. 잘났어 정말."

내 손등을 꼬집는 수. 그러면서도 거절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도 내가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그녀의 곁에 있으면 분명 안전할 테니까..

수도 지금은 싫어하는 척 하지만, 일단 맡기면 분명 잘 대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맡기려고 했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야?"

"고민하고 있어."

나의 무력함에 무릎을 꿇은 채,생명을 꺼뜨린 그 가벼운 몸뚱어리를 들어안고 나는 생각했다.

그 작은 몸을 내던져 이름도 모르는 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소녀가, 다시 태양이 떠오를 내일을 보았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거라고, 불합리하다고,

나는 죽어 스러지더라도 저 소녀가 품은 이타심은 반드시 내일로 전해져야 한다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 소녀의 선한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그 옆을 지키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내 생각일 뿐이다.

이곳에 남아 같은 수인인 수의 비호 아래에 놓인다면, 적어도 이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걱정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내 옆에 있으면, 또 그런 끔찍한 일들과 마주하게 되겠지.

"후..."

소녀가 단검을 움켜쥐고, 나를 위해 그 괴물에게 달려들기 전까지는.. 충분히 끊어낼 수 있는 관계이고, 정리할 수 있는 빚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심장이 멎고, 다시 뛰기 시작한 그때부터는 더 이상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결국 저 아이의 판단에 달렸지."

이곳에 남을지, 떠날지, 혹은 나를 따라올지.

선택지를 열어놓는 것까지가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선택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부럽네. 나한테는 당신 따라가는 선택지 없어?"

"... 위험하다니까."

"지켜줄 거잖아."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다.

"... 애초에 이곳은 네 삶 그 자체잖아. 여길 두고 어딜 간다는 건데?"

"뭐어, 여태껏 열심히 일해온 내게 주는 잠깐의 일탈.. 휴가 같은 거랄까."

그녀의 성공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 끝끝내 만들어낸 스폴에서 가장 높고 커다란 건축물. 금란객잔은, 평생에 걸친 그녀의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 다음으로 잃고싶지 않을 귀중한 가치인 것이다.

"..."

"아후후.. 농담이야 농담. 하지만내 삶이 시작될 수 있었던 건... 에단, 당신 덕분이니까."

"한순간의 우연이었지."

"말했잖아? 난 우연은 믿지 않는다고."

스폴의 어둡고 칙칙한 골목길에서 뛰쳐나온 어린 수인 소녀와 부딪혀 넘어진 그때를 기억한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다 찢어져가는 누더기로 겨우 몸을 가리고, 끊어진 쇠사슬이 요란하게 질질 끌리는 족쇄를 찬 채 맨발로 달려온 그 소녀를 입고 있던 기다란 사제복 안쪽으로 숨겨준 일이 있었다.

몽둥이를 든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소녀가 도망친 곳을 캐물었고, 이에 내가 엉거주춤 아무런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켜 그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나서야벌벌 떨고 있던 그 소녀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고, 레베카는 그 사이 간단히 손짓해 그녀의 발목에 매달린 족쇄를 풀어주었다.

또한, 소녀가 저 허름한 차림으로 돌아다녔다가는 금방 다시 잡힐 게 분명했기에 약간의 노잣돈과 함께, 내가 입고 있던 로브를 어린 소녀가 입을 수 있도록 아랫단을 길게 찢어내 건네주었다.

"..."

그때 그 골목 앞을 지나다가 소녀가 나와 부딪히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까지 호의를 보일 수 있었을까?

도망치던 소녀의 앞길을 본의 아니게 막아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으니 잠시나마 숨겨주었고, 그렇게 한 번 관여해 버린 만큼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의 책임을 호의라는 형태로 진 것뿐이다.

"당신이 건네준 로브, 나 아직도 가지고 있다? 돈은 다 써버렸지만.."

"그걸 뭐하러.."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호의였는걸."

머리로 내 가슴께를 툭툭 두드리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던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의 그 작은 호의가, 어린 노예 하나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어."

"네가 한 노력 덕분이겠지."

"음~ 그것도 맞아,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당신도 알지?"

"..."

연초를 들어 비 오는 바깥으로 떨어뜨리고는, 몸을 돌려 그대로 내 품에 안겨온다.

"그때.. 날 구해줘서 고마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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