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6. 여우와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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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여우와 늑대(6)
코끝을 어루만지는 알록달록한 꽃내음.
이마에 얹어진 머리칼을 간질이는 산들바람과, 함께 밀려온 햇살의 냄새에 소녀는 문득 눈을 떴다.
눈앞으로 보이는 건 한눈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디넓은 푸른 하늘.
하얀 구름들이 여유롭게 떠다니고, 태양은 그 가운데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이내 자신이 꽃밭 위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옅은 그림자가 발치에 드리운 것을 보고 누군가 자신의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하얀 원피스를 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양산을 든 여인이다.
소녀는 언젠가 이 여인과 만난 적이 있었다.
"안녕 또 만났구나."
여인이 쓰고 있는 챙 넓은 모자 아래로 짙게 생겨난 음영 때문에 미소 짓고 있는 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실비아.. 라고 했었지?"
"... 응."
"저번에는 금방 헤어져서 아쉬웠단다."
그때는 미처 이름을 듣지 못했었다고, 그렇게 소녀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지끈...!
갑작스럽게 찾아든 두통에 소녀는 크게 휘청이며 일어나려던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 한다.
텁..!
소녀는 다가올 충격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충격은커녕 부드러운 감촉만이 전해져올 뿐이다.
슬며시 눈을 뜨는 소녀.
"괜찮니?"
여인이 늦지않게 붙잡아준 덕분에 소녀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소녀는 여인의 어깨너머로 자신을 잡아주려다 떨어뜨린 듯 보이는 양산이 꽃밭 위를 나뒹구는 걸 보았다.
"... 저거.. 떨어졌어."
"응, 괜찮단다. 이제 아프지 않으니까."
하지만 여인은 소녀를 꼭 껴안아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다.
소녀는 그 따뜻한 품속이, 상냥한 손길이.. 마치 햇살 같다고 생각했다.
"... 으응.."
분명 저번에 만났었는데, 다시 만날 때까지 여인과 푸른 하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될 법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이것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빠져들고 싶을 뿐이다.
여인의 손길이 자신을 쓰다듬을 때마다 두통이 점점 옅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품속에 더욱 깊숙이 파고든 그때였다.
고오오오오오...
장내가 조용해졌다.
원래도 주변은 조용했지만 바람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같은 활기가 느껴지던 소음들마저 마치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고요를 자아내고 있다.
뒤이어.. 시야가 어두워져간다.
여전히 이곳은 꽃밭의 풍경이었지만, 하늘 위로 나타난 먹구름...
아니, 검은 연기는 시야 너머로부터 나타나 점점 푸른 하늘을 뒤덮어 가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걸까?
어딘가 익숙한 검은 연기를 올려다보며, 소녀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여인이 보고 있는 방향, 그러니까 자신이 등진 방향으로부터...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검은 연기를 몰고 이곳에 찾아온 무언가는 직접 보지 않고도 그 흉흉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 뒤돌아보지 마렴."
"..."
자신을 껴안은 여인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 어두운 무언가는점점 더가까워지고 있었고,
소녀는 뼛속까지 저릿해지는 두려움에 여인의 품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이거 너무하네, 내가 저 녀석을 살려줬다는 건 알고 있어?"
".. 그대로 집어삼키려 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여인의 날선 목소리.
"뭐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얌전히 있잖아."
"모습을 드러내놓고 할 말은 아니지."
마음이 놓이던 그 나긋나긋하고 평온하던 목소리에는 어느새 짙은 적대감이 묻어나고 있다.
"야박하기는.. 인사나 조금 할까 했더니, 그것마저 안된다니."
여인이 보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여인이 상대하는 무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음에도,
그게 여자의 목소리인지 남자의 목소리인지,
어린아이의 목소리인지 노인의 목소리인지
전혀 분간되지 않고 불쾌하게 머리를 울릴 뿐이다.
"... 미안하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여인의 손이 자신의 두 귀를 막은 것이었다.
그러자 더 이상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귀 위로 손이 얹어졌을 뿐인데도 시야는 회백색으로 물들고, 온몸으로 가득하던 그 포근한 온기도 점차 사라져 간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희미해져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우린..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다."
흩어져 가는 정신 속,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여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
소녀는 눈을 떴다.
"일어났네?"
소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한 쌍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방금 들었던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 톡톡 쏘는 그 매력적인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인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머리 위로 솟은 뾰족하고 기다란 짐승의 귀.
무엇보다 특유의 털 냄새는 그녀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여우 수인.
정말 예쁘게 생긴 여인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자신은..
머릿속이 멍하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도..
그리고 방금 전까지의 기억도...
... 방금 전...?
"일어났으면 어서 '내' 침대에서 비켜주지 않을래?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했거든."
"... 아."
허리가 불편한지 어떤지 한쪽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받치고 부자연스럽게 서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소녀는 난생 처음보는 폭신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침대로부터 비틀거리며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
"움직이는데 불편한 건 없고?"
"... 응."
소녀는 눈앞의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건 편해 보이는 얇은 옷 한 벌이었고, 이렇다 할 장식 따위도 없었지만 처음 보는 자신에게조차 귀한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천의 윤기와 분위기가 빼어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맡아보는 고급스러운 옷감의 냄새 때문이기도 했다.
이 좋은 침대도 그렇고, 수인이 이렇게나 귀해 보이는 옷가지를 몸 위에 걸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녀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킁킁..."
그리고..
어째서인지, 저 옷감 너머에는.. 그 사람의 냄새로 잔뜩 뒤덮여 있다.
자신이 용서를 받고자 결심한 그 사람.
그의 냄새가 어째서 이 여우 수인에게 이렇게나 선명하게 남아있는 걸까?
"얘.. 얘는 왜 갑자기 코를 들이밀고..."
..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비릿한 냄새.
소녀는 그 냄새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화들짝 얼굴을 떼어낸 소녀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든다.
하지만 먼지와 때로 지저분한 얼굴 때문인지 여우 수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너."
"..."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부끄러움보다 우선되는 본능이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꼬르륵...
소녀의 작은 배에서 배곯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가까이 있었다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소리.
자신이 하려던 말이 겨우 배곯는 소리에 끊겼다는 것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그녀였지만 무구한 소녀의 눈동자를 내려다 보고서는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다.
"그래, 그야 배고프겠지만.. 하아.. 일단 너, 몸부터 씻자."
자신의 목덜미를 살며시 누르고는 가야 할 방향을 인도해 주는 그녀의 손이, 여태까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비해 그다지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조심스럽다고 느끼며,
소녀가 도착한 곳은 수증기가 가득 깔려있는 따뜻하고 축축한 냄새의 방이었다.
"여기 앉아."
찰박.
찰박 찰박.
바닥에 밟히는 물소리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가, 소녀는 그녀의 인도에 따라 물이 얕게 차있는 곳에 발을 담그고 그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두 팔 들고."
휙..!
그녀의 말에 따라 두 팔을 들어 올리자마자 언제 입혀졌는지도 모를 유일한 옷가지가 눈 깜빡할 사이 벗겨져 버린다.
"눈 감아."
옷이 전부 벗겨져 버렸다는 사실에 반응할 새도 없이 뒤이은 그녀의 목소리에 따라 눈을 감자, 이번에는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한차례 쏟아져 내렸다.
"푸하...?"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바구니 같은 게 눈에 들어온다.
"한번 더, 눈 감아."
촤아아악...!
"어푸.."
스윽슥.. 슥슥...
그녀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소녀는, 어느새 자신의 몸에 온통 하얗고 부드러운 거품들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안씻고 다녔으면.. 하아, 말을 말자."
"... 이거.. 뭐야..?"
소녀는 두 손 가득 좋은 냄새가 나는 하얀 거품을 모아 여인에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가늘게 눈을 떴지만, 소녀의 질문을 무시하지는 않고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작은 바구니 안에 다시 따뜻한 물을 담는다.
"깨끗해지는 거품. 알겠으면 다시 눈 감아."
".. 응."
촤아아아악...!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이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거품으로 문질러지고, 몇 번이나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쏟아진 다음에서야 소녀는 그 의문스러운 방을 나와 폭신폭신한 천으로 마구 물기를 닦이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 개운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자, 꼬리에 남아있던 물기가 사방으로 튄다.
"꺅...? 너어.."
소녀를 닦아주다 봉변을 당한 여우 수인은 인상을 한가득 찌푸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고, 머리 위에 솟은 소녀의 두 귀의 안쪽까지 꼼꼼하게 닦아주고 나서 깨끗해 보이는 옷 한 벌을 내민다.
그녀가 입고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좋은 옷감의 상의 한 벌, 하지만 소녀에게는 크기가 커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만큼 한벌 옷으로 충분해 보인다.
"크기가 맞는 게 없으니까, 일단 그거라도 입고 있어."
"... 고마워."
"흥.. 어디 봐봐."
옷을 다 입고 나서야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 보게 된 소녀.
"..."
"왜.. 그래..?"
"뭐어... 씻으니까.. 그나마 봐줄만 하네."
"...?"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인의 두 뺨에어째서인지옅은 홍조가 떠오른듯 했지만,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붉은 색채는 모습을 감추고, 여인은 휙 하니 몸을 돌려 먼저 복도로 나선다.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방으로 돌아가게 어서 따라와."
돌아서고 나서야 놀라움에 참고있던 숨을 소리나지않게 내뱉은 그녀는..데려와도 뭘 저렇게 귀여운 애를 데려온 거람, 하고 마음속으로 몰래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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