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34화 (34/137)

〈 34화 〉 6. 여우와 늑대

* * *

6.여우와 늑대(7)

"에단..!"

여인을 따라 자신이 깨어났던 그 방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 소녀는 앞서 들어간 그녀의 얼굴에 본 적 없는 반가운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다녀왔어?"

"네 예상대로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막 창문을 닫고, 물기 젖은 신발과 함께 등 뒤에 이고있던 관을 옆으로 내려놓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

그를 보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었고, 자신이 어쩌다가 정신을 잃었는지.

희미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한다.

지끈..

재가 내리는 땅.

피로 물든 마을.

엄마의 무덤.

지끈..!

검붉은 로브를 두른 이들.

동족의 냄새.

하지만 그건..

동족의 탈을 쓴... 괴물.

"저 애는?"

".. 보면 몰라? 당신이 데려온 꼬맹이잖아."

"... 뭐?"

"나 놀리는 거야 지금?"

손에 쥐고 있던 사슬을 내려놓고 이제서야 이쪽을 바라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 눈동자.

저 눈동자를 처음 마주한 것은 바닥에 내던져지고 눈앞으로 뾰족한 가시가 들이밀어졌을 때였다.

아득히 깊은 바닷속 어둠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지만,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가차없이 목숨을 끊으려던 손이 멈칫하며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망설임은 자신과 엄마를 함부로 대하던 수많은 타인들..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를 보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덩치가 커다란 괴물에게 짓눌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그의 모습과..발치에 떨어져 있던 단검 한 자루였다.

"..."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서 벗어나 그에게로 달려갔고,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서 등 뒤로 숨는다.

자칫 여인이 소녀에게 뭔가 해코지를 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그 모습에..

"... 저.. 저 꼬맹이가..!"

"...?"

"나, 나 아무짓도 안했어..! 씻겨준 것뿐이거든?"

억울한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여인과,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됐는지 멍하니 서있는 남자.

"킁킁..."

이 우습게도 과열된 상황은 소녀가 남자로부터 크게 뒷걸음질 치는 또 한 번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대충 무마될 수 있었다.

"... 으우.."

소녀는 냄새를 털어내듯 자신의 코밑을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그의 몸은 온통 여인의 냄새로 가득하다.

일부러 묻히기라도 한 건지, 물론 같은 수인이 아니고서야 느끼기 힘들겠지만 그의 몸 구석구석에 영역 표시처럼 남아있는 강렬한 냄새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걸 보고 나서야 표정을 풀고, 이유 모를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인.

"아후후.."

"수..?"

"엣흠.. 흠.. 아무것도 아니야."

수라고 불린 여인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서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소녀에게 다가갔다.

"반가워. 난 이곳 스폴리아리움의 대표, 상단 연합회 회장이자 금란상단의 상단주, 수 라고 해. 네 이름은?"

"..."

"분명.. 아, 시르라고 했었나?"

한글자의 이름 앞을 수식하는 긴 단어들의 배열에 소녀는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전부 하나같이 처음 듣는 모르는 단어들 투성이었지만, 분명 마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높은 사람인 게 틀림없다.

그런 사람이 먼저 이름을 밝힌 것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가진 것 하나 없기에 뭔가 대가를 치를 수도 없는 자신에게침대도 빌려줬고, 몸도 깨끗하게 씻겨주고, 옷까지 입혀준 걸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 실비아."

"실비아? 시르가 아니고..?"

"그건... 엄마가. 부르는.. 애칭."

".. 윽."

소녀의 모친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 들었던 만큼, 그녀는 뾰족한 물건이라도 밟은 것처럼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소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쁘고, 또 그만큼 슬프다.

두 상반된 감정이 부딪히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한 가지만 있을 때보다 마음의 동요가 컸다.

타인에게 그 이름으로 불릴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눈가가 시큰거려온다.

소녀의 시선이 고개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고 슬픈 기색이 표정 아래 드러나기 시작하자 수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더니, 에단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 상황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그의 귀에 대고 소리 죽인 내적고함을 늘어놓는다.

".... 에다한..! 어쩔 거야..! 애 풀 죽었잖아...!"

"왜 나한테.."

"당신이 쟤 이름 시르라며..!"

"..."

말없이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수는 작게 혀를 차고는 서둘러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도 제대로 안물어보고 도대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를 따라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서 겨우 눈높이를 맞춘 그녀는 일단 물기 젖은 소녀의 두 눈동자와 마주할 수는 있었지만, 부모 잃은 아이를 위로하는 법 따위는 조금도 알지 못했기에 선뜻 입술을 떼지 못한다.

"그.. 엄마랑, 헤어졌다면서."

"응."

"... 으으.."

가슴께에 꼭 모아진 두 손, 가볍게 안쪽으로 말린 시무룩한 꼬리와 축 처진 귀를 보며, 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 뛰어난 머리로도 해답이 금방 나오지 않자 이마 부근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의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 괜찮아."

"뭐라고?"

괜찮다고..? 괜찮다니?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 정도로 끝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앞의 소녀가 셀틱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 왔다.

죽음이란 건 의외로 가까이 있어서,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와, 잊어버릴 때쯤이면 눈앞에 그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죽음이 어떤 건지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 엄마와 마지막으로 하던 그 약속들이..

전부 지켜지지 못할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 엄마. 이제는.. 아프지않아."

"..."

소녀는 얼굴을 아는 이들의 죽음을 몇 번이고 두 눈으로 봐왔다.

자신의 엄마를 루파라고, 자신은 루파의 딸이라고 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폭행과 폭언을 일삼던 이들.

딱히 그들이 죽었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들의 죽음을 일부러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어느 날,

항상 지나던 길 위에 비쩍 야위고 창백한 안색으로 그들은 말없이 쓰러져 있었다.

날벌레가 꼬이고, 구더기가 들끓기 시작해, 심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면 소녀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비가 세 번 정도 쏟아지고 난 다음이면 다시 그 길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의 일이었다.

굶주림과 병마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어느 순간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닷일을 하다 마물에게 당한 사내들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어왔지만, 소녀가 직접 보고 겪은 죽음은 대강 이 정도.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엄마의 차례였을 뿐.

그저 그뿐이었다.

오래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엄마였기에, 사실 언제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헤어지고 나니 홀로 남겨진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속 살아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이대로 차가운 땅바닥 위에 누워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을 것처럼 고독했다.

가슴속이 텅 비어버려서.. 숨을 쉴 때마다 숨이 거꾸로 차오르는 듯한 답답함과 괴로움에,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그나마 그 아픔이 덜했다.

그저 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자신도 곧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목표라는 게 생기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기운이 두 발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목표라는 건.. 그가 말한 대로 멋대로 용서를 받는 것이었다.

잘못을 했을 때는 반드시 사과하고 용서를 받겠다고,

엄마와 그렇게 약속 했으니까.

"시르라고.. 불러도. 괜찮아."

".. 아니, 애칭이라며? 역시 나는 그냥 실비아라고..."

"..."

"내가 왜 네 애칭 같은 걸..."

"...."

겨우 일어날 듯 움찔거리던 소녀의 귀는 다시 축 처지고 말았고, 이에 여인은 지끈거리는 머리 한쪽을 부여잡고 마지못해 백기를 올렸다.

"... 알겠어.. 알겠다고, 시르."

"나는.. 수 언니, 이렇게... 부르면 돼..?"

"뭐..? 안돼! 절대 안돼..! 제대로 회장님이나 상단주님이라고..."

추욱..

"아.. 아아! 알겠어. 네 맘대로 부르던지..! 하, 참."

쫑긋.

자신이 왜 이 작은 소녀에게 휘둘리고 있는지 괜히 열받아 한숨을 내쉬는 수.

"하아... 누가 여우인지 모르겠네.. 당신은 뭐하고 있어? 아직 얘한테 이름도 말 안해준 거지?"

"뭐,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는 무슨... 자."

허리를 부여잡고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앞에서 몸을 일으킨 수는 우두커니 서있던 그의 등을 떠밀었다.

"...."

"..."

조명 때문에 생겨난 음영을 얼굴에 가득 끼고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단.

그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실비아.

서로의 키 차이 때문에 더더욱, 말없이 마주보고 있는 이상황은 어색하기만 하다.

분명 느끼고 있을 그 어색함을 애써 티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들었겠지. 에단이라고 한다."

".. 응."

"그리고 우선.. 네게는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지."

"...?"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드러내는 소녀.

"날 구해주려다 크게 다쳤잖아. 단검 한 자루 들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서는.."

"..."

"치유는 다행히 잘 된 모양이지만, 너무 무모했어."

"... 응.."

추욱..

"... 그래도 덕분에 그녀의 관도 무사하고, 나도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응.. 나도. 고마워."

"..?"

"낫게 해준거. 에단이니까."

쫑긋.

기운을 되찾은 소녀의 귀를 옆에서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던 수는,

에단이 쓰러진 사이 대체 누가 의사와 사제를 불러모아 치료를 시키고 귀한 성수를 쓴 건지도 모르고 자신에 대한 고마움이 없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 자존심 때문에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 상황으로 입술을 불퉁이며 괜히 그 사이로 끼어들어 자연스레 둘을 갈라놓았다.

"꼬맹.. 아니, 시르 너 배고프다고 했지. 에단 당신도 그럴거고, 금방 준비시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

"금방 올테니까..!"

쿵..!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발소리가 꽤나 요란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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