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35화 (35/137)

〈 35화 〉 6. 여우와 늑대

* * *

6.여우와 늑대(8)

새침한 표정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온 수.

그녀가 구태여 강조한 것처럼 얼마 기다리지 않아 문이 열렸고, 검은색 민무늬의 가면을 쓴 시녀들이 하나같이고개를숙인 채 방으로 들어와서는 둥그런 테이블과 의자를 소음 없이 가져다 놓고 테이블에 하얀 천을 깔아 그 위로 다양한 음식이 담긴 접시와 식기 등을 가지런히 놓기 시작한다.

신선한 식자재를 구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조미료의 향으로 잡내를 없애는 방식이 기본이 되면서 맵거나 짠 음식들이 주를 이루는 만큼, 입안에 침이 절로 고이는 자극적인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어색하게 서있던 소녀의 눈동자에도 언뜻 생기가 돈다.

실비아라고 했었지.

트라사의 거리 위에서 처음 마주치게 된 그때,

짧은 머리칼과 비쩍 마른 몸, 때묻은 지저분한 얼굴을 보고도 내가 일말의 의심도 없이 곧바로 소녀라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 나는 지금에서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을 가리고 있던 그 낡고 더러운 누더기 대신 수의 것으로 보이는 잠옷 상의 하나를 원피스처럼 걸치고, 회색빛 머리칼은 처음으로 깨끗하고 따뜻한 물에 씻겨져 향긋한 냄새를 머금고 있다.

헐렁한 상의 아래로 다소곳이 모아진 두 다리의 하얗고 깨끗한 살결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누구나 인정할만한 미형의 얼굴이다.

언젠가 수에 버금가는 미인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선명하고 비율 좋은 이목구비와 조막만한 얼굴, 물론 앳된 소녀의 얼굴을 보고 그 이상의 감정이 들리는 없었지만 굳이 뭔가를 느꼈다면 놀라움이다.

짧기는 했지만 여정을 함께한 소녀가 본의 아니게 숨기고 있던 축복에 대한 놀라움.

물론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서 빼어난 외모를 과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때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던 저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들어맞는다.

약간은 멍한 듯, 하지만 어딘가 올곧은 고집이 느껴지는 신비로운 눈동자는 지금은 테이블 위를 향하고 있다.

".. 셀틱에 있던 애치고는 뼈랑 가죽 말고 살도 좀 붙어있던걸?"

테이블 위로 셋이서도 아마 다 먹지 못할 양의 음식들이 빼곡히 쌓여가는 사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온 수가 넌지시 물었다.

그야 처음 봤을 때는 그랬다.

다만...

"마물 고기를 조금 먹였어."

"... 무슨 고기..?"

자신이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흔치않게 상대의 말을 되묻는 그녀에게 나는 기꺼이 다시한번 대답해주었다.

"마물 고기, 의외로 먹을만해."

".. 아으으.."

그러고 보면 조금은 아닌가?

먹을 입이 둘뿐이었음에도 그 많던 고깃덩이들을 대부분 처리해냈다.

그래봐야 며칠인데 그새 살이 붙은 걸 보면 그래도 역시 수인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어려서인지, 단순히 건강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

꾸벅.

식사 준비를 마친 시녀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소리 없이 문을 닫고 사라지고 나서야 수는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소녀도 내가 먼저 의자에 앉을 때까지 눈치를 보다가 내가 옆의 의자를 가리키자 그제서야 옆의 빈자리에 앉는다.

기대감에 쫑긋거리고 있는 두 귀가 보이고, 당연히 한쪽 귀끝이 잘려나간 흉터도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나 눈에 걸린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딱히 귀를 가리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인데..

같은 수인이 앞에 있기 때문일까?

"..."

내 시선은 자연스레 수의 머리 위로 향한다.

편하게 가운 하나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양쪽 귀 끝에 달린 황금색 장신구만큼은 여전히 떼지 않고 있다.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빤히 바라보는 건 역시 실례겠지.

그리 생각해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 막 시선을 거두니, 마침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그녀와 아슬아슬하게 시선을 빗겨낼 수 있었다.

"보통 이만큼 준비해 주니까, 크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 원래 이렇게 많이 먹는 건가?"

"그럴리가..! 제대로 조절해서 먹고 있거든?"

내 물음에 의자에 앉은 채로도 펄쩍 뛰는 묘기를 보여준 수는 눈을 흘기며 높아진 목소리를 가라앉힌다.

"이렇게까지 준비하라고 말한 적 없어. 나는 그저 식사를 준비하라고 명령할 뿐이니까.뭐 어쨌든.. 스폴에서는 밥그릇이 곧 권력이니, 이 정도는 일인자의 품위 유지에 필요한 사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라고."

"... 수 언니, 나.. 먹어도돼?"

"읏.. 그래."

자신 앞에 놓인 수저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소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금빛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번 양손에 들어 봤지만 역시 어색한지, 혹은 부담스러운지 이내 내려놓으려는 소녀에게 수는 나를 흘겨보던 시선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것들을 써서 먹어야 해. 맨손으로 먹었다가는 당장 쫓아낼 줄 알아."

".. 으응.."

당장 맨손을 눈앞의 고깃덩이로 뻗으려다 멈칫한 소녀는 그 단호한 목소리에 풀이 죽은 채, 양손에 각각 숟가락과 젓가락을 단검이라도 쥐듯 꾹 붙잡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불편해 보인다.

"하아.. 에단 당신이 알려줘.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돼?"

"음.."

결국 소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각각 하나씩 손에 길게 쥐고서는 양쪽에 고기를 두세 개씩 꽂아넣고 있다.

"잘 먹고 있는데 뭘."

"..."

온갖 문화가 모이는 장소였던 스폴을 포함해 베헤멘티아 서부, 과거 셀틱의 남부 정도가 젓가락을 사용했기에, 사용법이 무역로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넘어오기는 했어도 젓가락질을 못하는 이들은 왕도라고 해도 많을 터였다.

그러니 아직 어린아이에게 굳이 젓가락질을 강요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지만, 수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탁..!

".. 그만."

수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방금 전의 그 단호한 목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귀를 찔러들어왔다.

움찔.

입안 가득 음식을 물고 있던 소녀는 이전과는 다른 그 목소리에 크게 움찔하곤 양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눈치껏 천천히 내려놓는다.

"... 잘 들어, 시르."

끄덕 끄덕.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준다고들 하지. 그렇게 틀린말도 아니라, 식견이 짧은 머저리들 대부분은 네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멋대로 네 가치를 평가할 거야."

.. 끄덕.

"네가 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들에게 온갖 박해와 멸시를 받아왔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예절과 품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건 아니야."

"..."

"너는 나와 에단을 보면서, 이 도구를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을 흉내 내려고 노력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여태까지 해온 방식이 있고, 무엇보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야."

분명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지만, 그녀의 말은 단순히 비난에 그친다기보다는 또 다른 감정이 느껴져 온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돼.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네 뼛속에 예절과 품위를 새겨 넣어야만 해. 그래야 불가피한 차별과 무시의 시선 속에서.. 그나마 고개를 치켜들 수 있을 테니까."

"..."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딱히 혼내려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왜 내가 널 혼내겠니? 네가 혼자라면 손으로 먹든 발로 먹든 난 상관 안해. 다만, 그로 인해 같은 수인인 내 평가까지 억울하게 낮아지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야."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녀는 우선 입안에 가득하던 음식 먼저 힘겹게 삼켜내고, 늦었지만 흉내 내듯 젓가락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표정을 풀고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수.

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의 의도는 분명 잘 전해졌다.

그녀의 옆에서 여태 가만히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실비아."

"... 응."

"더 얇고 뾰족한 쪽을 앞으로 해서 잡고, 그 끝부분으로 음식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거야."

"여기로.. 응."

"그냥 손으로 먹으면 손이 더러워지는 데다가, 같이 먹어야 할 음식까지 더러워지니까. 함께있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어."

나는 소녀의 왼손에 들려있던 젓가락을 빼서, 오른손에 고쳐 쥐여주었다.

단검을 잡던 손이 오른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응.. 알겠어."

그렇게 젓가락을 손에 쥐여준 다음, 내 손에도 똑같이 젓가락을 쥐고 몇 번 움직여 음식을 집는 것까지 보여주고 나자..

조금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색하게 움직여 음식 하나를 집는 데까지 성공해 낸다.

그게 입으로까지 잘 들어갈지 나와 수는 잠시 멈추고 소녀를 지켜보고 있는데..

"앗."

철퍽.

"..."

정확히 수프의 정중앙에 떨어져 온통 주변으로 튀기고 만다.

"... 미안.."

"으으.. 일단 오늘은 그냥 숟가락으로 먹으라고 해."

몇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스폴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식사답게 그 맛은 질긴 마물의 고기를 구운 것 따위와는 식감부터가 천지차이였기에 오랜만의 호화로운 식사가 되었다.

소녀 역시 처음으로 경험한 진정한 혀의 즐거움에 식사 내내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분명 만족스러운 식사였을 것이다.

"맛있었어. 수 언니."

"알겠는데, 그 언니라는 호칭 좀 어떻게 안될까?"

"수..... 언니..?"

"... 으.."

그녀의 부탁에 잠시 다른 호칭을 생각해 보는 듯 했지만 끝내 나온 단어는 언니라는 단어였다.

크게 거슬릴 것 없는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별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너무 친근함이 느껴지는 호칭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식사가 다 끝나갈 즈음 눈치껏 조용히 안으로 들어온 시녀들은 잠시 대기하다가 식기들을 치우고 테이블 위의 천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

그러고는 또 어디선가 찻주전자와 찻잔들을 가져와 예쁘게 내려놓고 각각 첫잔을 따라놓은 다음, 마지막으로는 쿠키가 담긴 접시를 가져와 소녀의 앞쪽에 내려놓고, 정중하게 고개 숙인 채 뒷걸음질로 방을 나간다.

발걸음은 물론이고, 식기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서, 꼭 편리한 그림자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쿠키를 왜 저쪽으로 놓은 거람. 내가 좋아하는 건데."

그녀의 그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에 다시 문이 열리고, 몹시 송구스러운 듯 바닥에 고꾸라질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한 명의 시녀가 쿠키가 들어있는 또 다른 접시를 가져와 수의 앞에 내려놓는다.

덜덜 떨리는 손을 반대편 손목으로 붙잡아 겨우 내려놓고는 끝까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방을 나선다.

빠른 응답이 아닐 수 없다.

".. 꽤 두려움 받고 있는 모양이네."

"흥.."

내 말에 대답 대신 새침한 콧소리를 흘린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려 먼저 향을 맡고는 한 모금을 마신다.

달각.

이후 찻잔을 찻받침 위로 살포시 내려놓고 나서야 손을 뗀 그녀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래서.. 에단,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

"말했잖아, 이 녀석이 선택하는 대로 따를 거라고."

"흐응.."

수가 차를 마시던 모습을 따라서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고 있던 소녀는, 나와 그녀의 시선이 한 번에 쏠리자 찻잔을 입에 댄 채로 시선을 올려 우리를 바라보다가,

"웃...!"

무심코 기울인 찻잔으로 인해 뜨거운 차에 혀를 데이고는 잔뜩 시무룩한 표정으로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런 소녀를 보며 화를 참는지 아니면 웃음을 참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수는 다시 나를 바라보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내 의견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지?"

"부탁할게, 수."

"..."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결국 거절하지는 못하는 그녀.

"... 일단, 이 꼬맹.. 시르한테 물어보는 게 결국은 먼저겠네."

"뭐, 그렇지."

차에서는 이미 뜨거운 맛을 봤고, 예쁜 접시 위에서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쿠키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소녀는고뇌에 빠졌다.

접시 주변에 숟가락이나 젓가락 같은 다른 무언가가 없으니 더욱 고민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하더니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온다.

".. 실비아."

"응."

그 멍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기대일까, 아니면 걱정일까.

스스로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치 않아 여전히 복잡한 기분으로, 나는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이후 강을 이룰 첫 번째 물줄기가 될지도 모르는 질문이었다.

"앞으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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