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7. 벽 안의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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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벽 안의 사람들은(1)
"용사를 사칭하는 녀석일 가능성은?"
"글쎄, 내가 들은 건 미담뿐이라서.. 밑작업이라도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며칠 전 스폴을 떠났다니,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네."
"..."
"알아, 그때도 많았지. 신탁을 받았다며 용사를 사칭하고 다니던 머저리들이."
새로운 용사가 수인이라는 바실리카의 공식 발표가 있었음에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때문에 자신이 진짜 용사라고 주장하며 무지한 이들을 속여넘기고 이용하는 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작은 마을에 번듯한 갑옷과 검을 들고 나타나 자신이 마물들로부터 지켜주는 대신 헌금을 받겠다고 하여, 그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재물을 내놓게 한 다음 도망쳐버리는 것이 주된 수법이었다.
절박한 이들을 속여넘기는건 쉽다.
당장 이 힘든 상황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이니만큼 적당한 계기만 있다면 약간의 눈속임과 연기만으로도 충분했겠지.
용병을 고용할 재물마저 모두 도둑맞은 마을의 최후는 불 보듯 뻔했고 말이다.
적룡교가 그렇게나 빠르게 덩치를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어긋난 믿음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래도.. 이쯤 되면 나도 한 번쯤 믿어보고 싶기도 해."
"상인이 할 말 같지는 않은데."
"아후후.. 맞아. 내가 믿는 건 나 자신과 돈, 그리고 에단 당신뿐이니까."
"..."
잠깐 고개를 돌리자 까맣게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는 강 위로, 스폴리아리움의 화려한 불빛과 함께 강의 수면 위로 비치는 불빛이 만들어낸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싸구려 화려함이라고는 하지만, 이 어둡기만 한 하늘 아래에서는 하나뿐인 귀한 경치가 아닐 수 없다.
와삭.
작은 무언가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우물우물."
수가 뭔가를 한가득 챙겨준 탓에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새로운 배낭과, 그걸 매고선 손에 또 따로 든 작은 자루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고 있는 소녀.
"실비아."
"응."
"그건.. 수가 챙겨준 건가?"
"응.. 에단, 먹을래? 배낭에. 더있대."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집요하게 물러서지 않으며 기어이 배낭을 맨 소녀는, 생각보다 쉽게 그 커다란 배낭을 들어 올려 나를 당황케 했다.
그나저나, 헤어지기 전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던 이유는 저 쿠키 때문이었던 건가.
설탕이나 소금같은 것들이 귀한 이 시기에, 달콤한 쿠키는 바실리카에서도 구하기 힘든 고급 디저트였다.
"아껴서 먹도록 해, 구하기 쉬운 음식은 아니니까."
"응, 에단은?"
쿠키 하나를 집어 내 쪽으로 내민 손을 아직도 들고 있던 소녀.
"... 난 됐어."
소녀의 짧은 보폭에 맞춰, 발걸음을 늦췄다.
스폴을 떠나 바실리카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한동안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는 의외로 이 어두운 여백을 성실하게 채워주고 있다.
내 거절에 들고 있던 쿠키를 자신의 입속에 쏙 집어넣은 소녀는, 쿠키가 들어있던 자루의 입을 끈으로 묶어 배낭 옆에 걸어놓는다.
열심히 우물거리던 소녀는, 옆에서 걷고 있던 내게 문득 이런 말을 해왔다.
"수 언니, 서운해했어."
"어째서?"
"... 에단이 떠나서?"
왜 의문형일까?
대답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소녀의 조용조용하고 살짝 어눌한 저 목소리는 이 고요한 길 위에서 이목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단순히 내가 이 소녀와 대화하는 게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 너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아니. 말은, 안했어."
"그럼.."
"그래도.. 알수있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건 상인이 필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이다.
그리고 뛰어난 상인인 수는 당연히 자신의 표정과, 반사적으로 움직이려 드는 귀의 움직임까지 노련하게 제어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꼬리만큼은 제어 범위의 바깥에 있는 모양이다.
웃으며 나를 배웅해 주던 그녀의 꼬리가 그렇게나 얌전하게 늘어져 있는 건 처음 봤다.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불가항력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번에는 너무 오래 있었지.
"..."
내가 미련을 가져서 어떡하자는 건지.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아무리 일관성 없이 흔들리기만 하는 한심한 나 자신이라도 최종적으로 다다르는 것에 이견이 없는 단 한 가지 목표를 위해.
... 나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우선, 바실리카로 갈 거다."
"바실리카..?"
"벽 안의 평화에 취해, 밖에서 부는 절망을 잊어버린 이들이 사는 곳이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분명했지만..
신탁이 내려온 이상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 으응."
"보기에는 밝은 곳이지만, 너에겐 분명 불편할 거다.. 여러 가지 의미로."
"..."
바실리카에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다가는 분명 나까지 출입을 거부당할 게 분명하다. 그게 아무리 어린 소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정확히는 외부인이 아닌 수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하지만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소녀를 데리고 가는 건 아니다.
다나를.. 대주교님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도 없다.
신탁이 내려온 지금 이 시점에서, 바깥에서 많은 일들을 겪고 온 내 정보는 이전처럼 정기적으로 보고하던 것과는 그 의미와 가치 면에서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수 덕분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용사로 추정되는 이의 외형과 행방에 대한 정보까지 얻었다.
물론 이건 그 자의 목적지가 나와 같은 바실리카일 때, 내쪽이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애로사항이 있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가진 정보들은 그들에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것일 테니..저울 위에 올릴 것으로는 충분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바실리카도 신탁이 내려온 이상 이대로 영원히 문을 닫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
"크르르륵... 크윽..."
분에 못이겨 신경질적으로 으르렁대는 소리가 좁은 공간 안을 울리자 긴장되는 분위기가 다수의 침묵과 함께 맴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았다.
자신이 따르는 이가, 화를 참을 수 없다고 해서 자신들에게까지 이빨을 드러낼 이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그것만으로 이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단 한 명,
단 한 명의 로브인만이 붕대를 들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지크, 상처가 심해."
로브인의 말대로,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날카롭게 베어져나간 상처에서는 끈적거리는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흘러내리고 있었다.
탁!
"..."
암청색의 털로 뒤덮인 두꺼운 손등에 얻어맞고 저 멀리 떨어져 내린 붕대는, 매듭이 풀린 채 도르륵 굴러가 길게 늘어지며 보는 이들을 무안하게 만든다.
그는 치료도 아니고 약간의 응급처치를 하겠다는 손길마저 거부했다.
하지만 그건 괜한 오기에서 비롯된 투정은 아니었던지 상처와 상처 사이가 꿈틀거리며 스스로 맞붙고 있는 게 보인다.
로브인 역시 그걸 보고선 별다른 말은 더 하지 않는다.
"크륵.. 크으... 몇 명이나 희생됐지?"
"교전에서 둘이 죽고, 셋이 남아서 놈을 막기로 했다."
"발터..!! 어째서...!!!"
"그래야만 했으니까."
남들의 배가 되는 덩치를 가진 만큼 내장까지 울리는 커다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로브인의 태도는 변치 않는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열이 뻗친 듯 괴인이 내뿜고 있던 흉흉한 기세가 더욱 강해진다.
"크르륵...!! 어째서 끝까지 싸우지 않은 거냐..!!! 꼬리를 말고 도망쳐서는 안돼! 투쟁에서만큼은 우리는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해..!!"
꽈꽝...!!!
우스스스...
후두둑.. 투둑..
바닥을 내려친 주먹에 돌바닥이 비스킷처럼 부스러지며 파편이 튀고, 먼지가 치솟았지만 로브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네 생각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는 여전히 너를 따르고 있어. 형제여."
"그렇다면..!"
"하지만 우리들은 네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그 세 명도 그걸 알기 때문에 자진해서 그 자리에 남은 거고."
"..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한 거냐."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당장이라도 덮쳐올 듯 경고해오고 있었음에도로브인은조금도 기죽은 기색 없이 대답한다.
"그래. 그 말대로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동포들 모두가 통감했겠지. 듣던 대로.. 용사의 검술은 매섭더군.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을 보면 너도 네가 어떤 상태였을지는 짐작이 될 텐데."
"... 제길..."
"널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헥터와 도라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가서 한 번 봐주도록 해."
로브인이 돌아서자마자 그는 분에 못이겨 바닥을 더 세게 내리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 리 없다.
동포 다섯이 희생되었다.
그게 자신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그 말은, 자신이 그들에게 늘 강조하는 신념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놈 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피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핑계 따위, 투쟁의 결과 앞에서 약자의 비굴함 밖에는 되지 않는다.
변명의 여지 없이 자신의 약함이 동포들을 죽인 것이다.
"죽여버리겠어..."
약육강식
투쟁이야말로 모든 생명이 태초부터 살아남기 위해 저질러온 자연스러운 섭리.
힘의 원칙만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부술 수 있다.
고쳐쓰기에는 이미 썩어버릴 대로 썩어버린 고목의 뿌리는 이미 아케라의 대지 깊숙이 뿌리내렸기에, 몸통을 불사르고 뿌리를 힘으로 뽑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약자에게는 강자의 포악함을,
강자에게는 더 강한 힘의 도전만이 있을 뿐.
반드시 동포들의 희생을 놈의 피와 고통에 찬 비명으로 갚으리라.
"그래, 피와 비명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