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7. 벽 안의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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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벽안의 사람들은(5)
"와하하하하..!!"
"흐하하하...!!!"
나는 이곳의 변하지 않는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당장 내일이라도 끝나버릴지 모르는 이런 세상에서는,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야말로 정답이다. 다른 답이 있을 리 없다.
"..."
이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내 머릿속의 걱정도 자연스레 잊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이미 오래전부터모르부스는 살아남은 소수 귀족들과 그 사병들에 의해 인간이고 수인이고 할 것 없이 가축 이하의 취급을 받아온 모양입니다.'
바실리카의 문이 열리고 정신없이 뛰쳐들어가려던 그들의 움직임이, 잘 정렬된 발소리가 들려오자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한 명도 빠짐없이 일제히 멈춰 서는 걸 보고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에서 빚어지던 갈등이 모르부스 전역에 갑작스레 돌기 시작한 역병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심화된 탓에 몹시 혼란스러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한다.
'사절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하필 이런 일이...'
'하지만 보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힐타인 왕조나 모르부스의 성당과는 교류가 끊긴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만큼 신탁을 받은 이들을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대삼림으로 향해야 할 내가 지금 뒷골목의 주점에서 이렇듯 현명하게 이 하루의 유예를 보낼 수 있는 이유도 다름 아닌 모르부스로의 사절단을 꾸리는 것에 대한 준비 때문이었다.
역병이 돌고 있는 곳이니만큼 사절단에는 주교 하나와 사제도 여럿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호위할 병사들도 꽤 많은 수가 차출될 것이라 들었다.
사절단과 나의 목적지는 달랐지만, 내가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혼자서 벽 밖으로 나가게 되면 혼란한 시기에괜히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될 거라는 대주교님의 우려가 있었기에 사절단이 움직임에 나도 발을 맞추기로 했다.
'용사님과 성녀님의 행방을 찾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역시, 마법사님에 대해서는 에단 당신에게 또 한 번 부탁을..'
그리고.. 떠나갈 때가 되어서야 대주교님이 당부한 이 부탁이야말로 지금의 과음으로 이어진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새롭게 탄생할 용사와 성녀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여정을 다시금 시작할 것이다.'
신탁의 내용은 예상했던 대로였고, 족쇄는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어쩌면, 기회를 한번 더 준 것인지도.
하하..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이지, 신의 아량과 자비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
주점 안의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술잔에 투박하게 음각된 의미없는 무늬 위로 반사된빛조각들이여러 갈래로 쪼개져 나가며 눈을 어지럽힌다.
비어버린 술잔을 의미 없이 노려보던 나는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지독하고 매캐하기만 한 연기, 수가 피던 고급 연초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구석이라고는 없이 목구멍을 틀어막듯 들어차는 이것이 나는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질식할듯 틀어막힌 숨통에 머릿속이 붕 뜨는 듯한 위태로운 느낌은 취기와 함께 밀려와 나를 등받이에밀쳐내 쓰러지듯기대게 만든다.
"하아..."
주변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나는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걸까.
"..."
테이블 건너편에 놓인 관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힐끗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드를 푹 눌러쓴 그 조용한 소녀 때문에 지금 나는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우습다, 우스워."
아니, 그것조차 아니다.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연초 연기를 들이마셨다.
매캐한 연기가 취기를 감싸고 돌며, 시야을 흐릿하게 먹어들어온다.
"... 후."
그 아이라면 지금은 대주교님에게 맡겨둔 상태다.
바실리카에 내가 지내는 마땅한 거처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하나,
그리고 뒷골목의 술집에 어린소녀를 데려올 수는 없다는 게 그 두 번째 이유다.
망설여하던 소녀에게 그녀라면 괜찮다고 두 귀를 드러내게 했을 때, 대주교님은 예상했던 대로 크게 당황하여 우선 주변부터 살피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게 왜 당연한 반응인가 하면, 이곳 바실리카는 문을 닫은 이래로는 단 한 명의 수인도 찾아볼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아, 이젠 아니지만.
어쨌든, 워낙 포근하고 상냥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이니만큼 이내 여느 어린 여자아이를 대하듯 챙겨주자 소녀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경계를 풀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덜컹!
왜인지 모르게 슬며시 피어오르는 불만에 의문을 가지려던 찰나, 문이 힘차게 열리며 거구의 사내 하나가 안쪽으로 들어온다.
"딸꾹...!"
"...!?"
"... 겨, 경비대장님?"
"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여기 찾아오는게 한두 번도 아닌데 왜 그러나."
바짝 얼어붙은 마스터는 물론, 일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 주점의 손님들에게 괜찮으니 앉아있으라며 사내는 손짓한다.
"아..하하... 늘 찾던 그분이라면 저기, 저곳에 앉아 계십니다."
그 무거워 보이던 전신 갑옷은 벗고 있었지만 그의 커다란 덩치가 두꺼운 갑옷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여전히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덩치로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딜런이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그 역시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지만, 틀린 말은 또 아니라 할 말이 없군."
"하하하, 조금 주제넘었습니까?"
"그런 게 아니야. 거슬리는 건 네가 아니라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날 더러 그렇다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내 건너편에 앉으려는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관에 손을 대려는 딜런.
그 순간 다시 한번 술집 안은 쥐죽은듯 조용해졌고,
"... 흣차."
드르륵, 쿵.
쩔그럭.
무거운 관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벽에 기대어 놓은 딜런은, 자신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내 건너편에 기어이 엉덩이를 붙이고 만다.
".. 솔직히 말해서, 이 관에 손을 댈 때마다 조금 두근두근합니다."
"즐기는 건가?"
"당신과 처음 만난 그날이 떠올라서요."
"...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는군."
슬그머니 손을 들어 마스터를 부르고는, 그가 가져온 자신의 술잔에 자연스럽게 술을 채워 넣는다.
"그래서, 이런 칙칙한 분위기의 뒷골목 술집에는 뭘 하러 왔지? 그것도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네가."
"특별히 이유랄 것 까지는 없고, 당신과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입니다. 앞으로 당신이나 저나 바빠질 텐데, 그 응원도 함께 해드릴까 싶어서요."
가식 없는 웃음을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지어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연기와 함께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덩치 큰 남자에게 응원을 받고 싶어 할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다고 당당하게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
이미 수많은 무덤이 즐비한 재떨이 위에 연초를 비벼 끄고, 나도 빈 술잔에 다시금 술을 따랐다.
그리고 채워진 술을 단번에 들이마시고 나서야, 연기를 비워낸 목구멍으로 참아온 한숨이 길게 흘러나온다.
"후우우..."
한층 더 흐리멍덩해진 시야 사이로, 오히려 깔끔해진 딜런의 얼굴을 보았다.
".. 딜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오, 질문입니까?"
별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나도 그저 눈앞에 사람이 있으니 묻고 싶어졌다.
"신이 정말 전능하다면, 어째서 세상의 구원을 우리같은 미약한 존재들에게 떠넘기는지."
"으음.. 사제님의 입에서 나올만한 질문은 아니네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몸에서 흘러넘치는 이 불쾌한 은총만 아니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전능한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서 말이다.
"으흠..."
어서 대답이나 하라는 내 눈치에 신음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딜런.
대답이 나온 건 그가 깔끔하게 빈 술잔을 내려놓은 다음이었다.
".. 사제님들의 말을 조금 빌리자면, 시련이라는 거겠죠."
"시련..?"
"믿음을 시험받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시련이라고.. 그렇게 떠드는 말을 들었습니다."
"네 생각도 그렇고?"
씩 웃어보이는 딜런.
"아니요, 솔직히 뭣 같습니다."
"... 사제님 앞에서 나올만한 대답은 아니군."
하지만 눈치 보지 않고 시원하게 웃어 보인 그는 자신의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고, 그것을 단번에 입안으로 털어놓는다.
"이건 시련이라기보다는 징벌에 가깝죠. 그 시험과 증명을 대수롭지 않게 타인에게 떠넘겨온 것에 대한 징벌 말입니다."
".. 내 앞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제 생각을 물으셨지 않습니까."
"..."
그는 웃으며 대답을 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하고도 답답한 눈빛을 하고는 자신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지만 딱히 손에 잡혀 나오는 것은 없다.
"자."
내가 건넨 연초갑과 성냥을 보고는 반가워하는 그.
역시 연초를 찾고 있던 모양이다.
"스으읍... 후우.. 우흑, 콜록! 콜록콜록.."
"..."
"바실리카의 연초는 너무 퀘퀘하기만 해서 영 입에 맞질 않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개운해 보이는데."
"커흠, 그건 별개의 이야기죠."
연초갑을 돌려주는 것을 받아 품 속에 넣고,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끝까지연초를물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솔직히 신탁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그것도 바실리카에서."
성양교의 심장이자 성지인 바실리카에서, 신이 직접 전하는 성언인 신탁에 의문을 품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신의 말씀에 잠깐 토를 다는 것 정도로 벼락을 맞을 만큼, 그 전능하신 분의 속이 좁지는 않겠죠."
"... 푸흐. 그래서 뭐가 불만이지?"
"신탁 때문에 다른 이들의 투지가 꺾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무기를 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어째서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고, 그리고 탓할 뿐인지 도무지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
다시 한번 연초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침을 하는 딜런.
그가 기침을 다 할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용과 싸우겠다는 사람이 너 말고도 과연 몇이나 더 있을지 궁금한데."
"아마 그리 많지는 않겠죠."
의외로 쉽게 인정하는가 싶었지만, 아직 그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있을 겁니다. 신탁이라는 구실좋은 핑계에도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을 자들이.. 어딘가, 분명히."
"..."
그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물론 그는 곧 자신이 언제 그런 진지한 눈빛을 했냐는 듯이 연초를 이로 문 채씩 웃어보이며, 날 괜시리 기운 빠지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콜록콜록.. 역시 바실리카의 연초는 별롭니다. 그런데도 끊을 수 없다는 게.. 참 신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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