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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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1)
화르르르륵....!
어두운 하늘 위를 쏘아지듯 날아가는 한 가닥의 화염은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불꽃을 휘날린다.
빠른 속도로 어둠을 가로지르던 화염은 도중 갑작스레 한 쌍의 날개를 펼쳤고,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아래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새였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새.
평범한 새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크기로 불타오르고 있는 화염의 새는 가벼운 날갯짓과 함께 암청색의 털로 뒤덮인 커다란 손바닥 위로 내려앉으려 한다.
화르르륵.. 툭.
당장 손에 불이 옮겨붙을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손바닥에 닿기 직전 산화하여 하나의 종잇조각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크르르르..."
화염으로 이루어진 새의 모습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익숙한 듯, 오히려 불만이라는 것처럼 작게 으르렁거린 거구의 로브인은 곧 종이를 구겨버리고 바닥에 내던졌다.
화륵...
종이조차 곧 불타올라 그 재가 잔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로브인은 뒤돌아 자신을 따르는 동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동포들, 일어나라. 갈 곳이 정해졌다!"
".. 오래도 걸렸군. 형제여."
"덕분에 준비는 끝마쳤지."
"..."
뚝... 뚜둑. 뚝..
로브인의 반대편 팔은 붉은 빛으로 온통 뒤덮여 살점섞인 찐득한 핏물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의 피가 아니었다.
누구의 피인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그의 뒤로 섬뜩하게 비추어지는 참혹한 학살의 현장.
인간들의 시체 조각들이 즐비한 그 모습을 보고도 그를 형제라고 부른 또다른 로브인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질문했을 뿐이다.
"... 목표물은?"
"그때 만나지 못한 반가운 얼굴을 보러 갈 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르부스로 달려가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바실리카로부터 인류배반자 에단의 다음 목적지를 특정해왔다.
또한, 다음 목표이기도 한 바실리카의 거슬리는 결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그를 저지해야 한다고 하니..
"우리는 베헤멘티아 남부의 대삼림으로 간다."
*
술집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온 나와 딜런은 예상대로 혼이 빠진 얼굴로 바실리카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던 대주교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녀를 고개 숙여 사과하도록 하고, 약속까지 한 다음에나 둘을 함께 돌려보낼 수 있었다.
수인 소녀를 찾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었을 테니, 나이가 지긋한 그녀가 홀로 힘겹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찾아 헤맨 것이 보였던지 소녀도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 보였다.
대주교님이 처음 소녀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건넨 말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걱정과 안심이었기에 더더욱, 소녀는 마음 속 가책이란 걸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후우..."
다 타들어간 연초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작은 불똥이 튀며 마지막 발버둥을 쳤지만, 주변은 태울 것 하나 없는 차갑고 단단한 돌바닥 뿐이다.
나는 그 무의미한 작은 불씨를 굳이 짓밟아 끄고 성벽에 세워놓은 그녀의 관 옆에 마찬가지로 등을 기대었다.
서늘한 기운이 벽을 타고 올라와 등골을 찌른다.
이제 곧, 그러니까 다음 성양구가 떠오를 아침. 대삼림을 목적지로 삼은 여정은 시작될 것이다.
바실리카로 돌아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은 오히려 편한 건 어째서일까.
"흠..."
그건 그렇고, 어제는 참 흔치않은 하루였지.
소녀의 결심에 따라 내 결정은 번복되었고, 깊고 어두운 숲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하게 되었다.
나는 그 의지를 존중한다.
드물게도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표현해온 소녀에게 관심이 생겼을 정도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소녀는 내게 하나의 눈에 담을 수 있는 여러가지 색채를 보여주었다.
처음 본 그 진회색 눈동자에 담긴 것은 절박함.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제 모친을 살려야겠다는 한가지 생각만으로 내게 생선가시 따위를 들고서 달려들었다.
망설임 없이 내 목과 손목을 꿰뚫었던 그 날카로운 것의 감촉을 나는아직기억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목적은 분명 숭고한 것일지 모르나, 그걸 위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북대륙이었고, 자신도 맞찔려 죽을 각오 또한 있었을 테니, 내가 문제 삼는 그 기준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러한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친은 죽었고, 홀로 남겨진 그 잿빛 눈동자에는 그 어떠한 것도 담기지 못했다.
이미 썩기 시작한 시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그 모습에 괜한 참견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
억지로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고, 만들어진 의지를 빌려주었다.
그리고 지금 소녀는 바실리카에 도착해 있다.
신탁의 빛줄기로부터 생겨난 내 변덕이 여기까지 이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꽤나 흥미가 생긴다.
마지막은.. 그래, 바로 어제 소녀가 보여준 그 은회색 눈동자다.
당돌하게도 내가 있는 곳에 찾아와서는, 내 결정에 반대하고 이를 번복시켰다.
그때는 내 시야 위로 지저분하게 번진 피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덜자란 송곳니 대신 날카로운 강철을 이빨삼아 그 괴물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던 그 때에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 자유의지를 나는 언제까지나 존중할 것이다.
"..."
물론, 이번의 위험한 여정에 있어 소녀가 날 따라온다고 해서 내가 덜 힘들거나 덜 아플 거라고는 장담하기 힘들다. 오히려 내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생하게 되는 상황이 벌써부터 예상이 된다.
하지만 이미 한번, 나를 구하기 위해 공포를 이겨내고 단검을 휘둘렀던 소녀 덕분에 보다 긍정적인 결과로 상황이 이어지는 것을 나는 직접 한 번 겪었기에 이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딱 잘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골치아프고도 기대되는 이 기분이란, 마냥 싫다고는 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다.
"... 왔군."
그렇게 다음 순간, 무채색의 눈동자가 이렇게나 다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준 장본인이 어느새 이쪽으로 발 아래의 그림자를 들이밀고 있었다.
"..."
"늦지 않았네, 배낭은 꽤 줄었고."
저 멀리 대성당으로부터 아직은 조그마한 성양구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서늘한 새벽의 때.
어제 헤어지기 전에 한 약속에 따라 성문 앞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 수인 소녀, 실비아였다.
"응, 옷을.. 많이뺐어."
"... 옷?"
"수 언니가... 옷, 많이줬어."
스폴을 떠나는 길, 배낭에다 뭘 그렇게 채워 넣은 건가 했더니.. 그게 다 이 소녀의 여벌 옷이었던 건가?
내가 데려온 그녀를 꼭 꺼려 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주제에, 헤어질 때에는 본인이 더 아쉬운 것처럼 뭘 그렇게 많이 챙겨준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왜 하필 옷인 건지는..
"그런데.. 어째 신발 말고는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소녀는 언제나처럼 후드로귀를 감추고긴 망토를 둘러꼬리를 숨기고있었기에, 그나마 보이는 거라고는 망토자락 아래로 슬쩍 드러난 저 신발 하나 뿐이다.
저 신발은 수가 소녀를 달래주기 위해, 그 엉망인 재봉 솜씨를 발휘한 결과물인데..
왜냐고 이유를 물으니 잃어버린 선물을 대신할 물건이니 꼭 직접 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왔었지.
굳이 그러는 이유를, 애초에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사용된 고급 재료들에 비해 모양새가 엉성하기 그지없는 누더기 신발은 꽤나 소녀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옷은...
"으응... 그게.. 전부, 너무.. 색이 많고.. 그래서."
색이 많다.
설마하니 옷을 본인 기준대로 골라준 걸까?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평소 옷차림을 떠올려 본다면저 반응도 이해는 된다.
옷들은 그럼 대주교님께 맡겨놨을 텐데,누군가 옷장을 열어보기라도 했다가는 곤란하겠는데.
"흠.."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생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어제 잠깐 들었던 의문이 지금에 와서야 문득 떠오른다.
"아,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네가 어제 날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냄새라고 했었지."
"... 응."
그래, 난 저게 여태 납득되지 않았다.
"나한테서 다른 이들과 구분할 수 있는 냄새라도 난다는 건가?"
내 질문에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 내가 모르는 체취 같은 게 있는 걸까?
굳이 씻지 않고서도 정화의 기운을 통해 대체로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만약 아니라면...
"에단한테서, 수 언니.. 냄새가 나."
"..."
"조금, 옅어졌어. 그래도 찾을수있어."
"... 그렇군."
애써 무표정하려는 낯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괜히 물어봤구나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마침 대성당으로부터 아침예배의 종료를 알리듯 성양구가 떠오르고 있다.
그 빛 덕분에 소녀의 관심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 하얀 하늘."
바실리카의 밝은 하늘은 이미 한 번 본 것이겠지만, 성양구가 떠올라 하늘 위에 걸리는 것은 처음 보기 때문인지 신기한듯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본다면 분명 신기한 광경이기는 하겠다.
"...."
줄곧 검은 하늘만을 봐 오다가, 불길하기 그지없는 붉은 하늘을 보고, 이번에는 바실리카의 하늘이다.
그것도 벽 안에서 올려다보는..
새로운 것을 보게된 감상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 바로잡고 싶은 게 있다.
"아니, 잘 봐. 흰색이 아니라, 칙칙한 잿빛이니까."
저 신성력의 구체가 아무리 밝다고는 해도, 그 너머로 만연한 검은 하늘을 전부 빛으로 가릴 수는 없다.
조금만 유심히 바라본다면 저 너머로 언뜻 비치는 검은 하늘이 더럽혀지기 쉬운 하얀 빛을 칙칙하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 응."
고개를 끄덕이며 눈이 아프지도 않은지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녀.
그 칙칙한 빛에도 나는 슬슬 눈이 부셨기에, 조용히 돌아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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