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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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2)
"에단 님이시군요..!"
나는 옆으로 바짝 다가와 눈빛을 반짝이고 있는 어린 청년 하나를 바라보았다.
남자 치고는 작은 키에,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할 것처럼 순해 보이는 인상.
조금 커 보이는 사제복이 오히려 잘 어울리는 청년이다.
아무래도 사제들이 많은 만큼 휴식이 잦았고 그때마다 내쪽으로 향하는 꾸준한 시선을 느꼈는데, 그게 바로 이 청년이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데."
"아, 신경쓰이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호세르라고 합니다. 우토 주교님의 아래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있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사제입니다."
"..."
어딘가 들떠 보이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우토의 아래에 있다고 소개한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대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데다가, 애초에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이유만으로 마냥 사람을 싫어할 수는 없으니 몇 가지 이유를 달아두도록 할까.
"내게 말을 걸면, 네 평판만 나빠질 거다."
"괜찮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으니까요."
그의 비교적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인해 주변에서 쉬고 있던 사제와 병사들의 시선이 나와 소녀에게 향하고, 자연스레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이들의 귀가 이쪽의 대화에 기울어진다.
내가 항상 피하고 싶어하는,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상황을 그는 거리낌없이 만들어낸 것이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말했던 건 기억하지만,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방금 건 굳이 말을 걸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 아.. 하하, 주교님께 듣던 대로 솔직하시네요."
우토의 아래에서 배움을 얻고 있다고 했으니 주교라면 아마 그를 말하는 거겠지.
그가 나와 관련해 듣기 좋은 소리를 했을리는 없는데, 과연 어떤식으로 솔직함을 표현했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대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뭔가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내게 말을 걸어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정이 있어 함께 출발하게 되기는 했지만, 따지자면 나와 그들은 같은 일행이 아니니까.
그걸 알텐데도 이렇게 선뜻 말을 걸어온다.
상대의 부담을 고려하지 않는다.
"용건.. 용건... 아, 그렇네요. 모르부스에서 온 난민분들의 치유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별 탈 없이 성양구도 제때에 떠오를 수 있었고, 다른 사제분들이 무리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까요."
"그거 다행이군. 그럼 이제 된 건가?"
마지막 이유는 본인을 생각하지 않는 우둔함이라고 하자.
내게는 인류 배반자라는 지독한 멸칭까지 있는 데다, 바실리카에서는 몇 번씩이나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킨 탓에 대부분의 이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걱정 따위를 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내게 말을 거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다. 게다가 우토의 아래에 있었다면 내가 저지른 일들에 대해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 그 말을 들으니 더 모르겠는데."
"아하하.. 언젠가는 알게 되실 겁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니.
내가 몇 번이고 불쾌할 수 있는 말로 대답을 했음에도,자신을 호세르라고 소개한 이 청년은끝까지 내게 호의적인 얼굴로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자신의 일행에게로 돌아간다.
돌아가서는 자신의 일행에게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뭐하러 내게 말을 걸었냐는, 대충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거겠지.
비식하고 마른 숨이 새어나온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신탁의 용사와 성녀를 찾기 위한 사절이 출발했고, 나와 소녀는 그들을 뒤따라 어느 정도 함께 이동하다가 모르부스의 북문으로 이어지는 가도에서 갈라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저 멀리, 바실리카만큼은 아니지만 높게 솟은 성벽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나는 소녀의 손목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 일행의 선두를 따라잡았다.
앞쪽에는 병사들의 호위 가운데 홀로 말을 탄 이가 보인다.
바실리카에 몇 없는 귀한 말을 타고 있는 건, 당연히 이번 사절에 참여한 한 명의 주교.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지."
"예, 대주교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따로 할 일이 있으시다고요... 당신의 앞길에 축복을, 부디 조심하시지요."
이름 모를 나이 든 주교는 입에는 축복을 담았으나, 나를 못마땅해 하는 시선과 떨리는 눈살 만큼은 숨기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일부로 숨기지 않는 것인지도.
하지만 앞서 상대한 젊은 사제보다는 오히려 이런 반응이 내겐 편했기에 인사차 고개를 끄덕여 주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도로부터 벗어났다.
".. 에단."
"무슨 일이지?"
"사람들, 에단... 싫어해?"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입을 열지 말라고 한 내 지시를 줄곧 잘 따라오던 소녀는, 사절 일행과 완전히 멀어지고 난 다음에서야 내 이름을 불러왔다.
헌데 그 질문이라는 게, 참 대답하기 껄끄러운 걸 물어온다.
나를 싫어하냐니.
저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해야할까?
음.. 너무 뭉뚱그려진 표현인데.
경멸한다고, 아니면 원망한다고 하는 편이 나으려나?
흠...
"... 적어도 좋아하는 이들은 없겠지."
고민 끝에 내놓은 대답은 이거다.
어린 아이 앞에서 내뱉을만한 단어들은 아니라고, 수가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지적해왔을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
"그래도.. 다나 할머니랑, 커다란 사람은..."
다나 할머니에,
그냥 커다란 사람이라니..
소녀에게 보여준 둘의 호의에 비해 너무 성의 없는 호칭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대주교님이나 경비대장님같은 목석같은 표현보다야 나은 것 같아 굳이 정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들은 글쎄... 그냥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사람들일 뿐이야."
굳이 겪을 필요없는 피곤함과 손해를 끌어안고 사는 미련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내겐 이해되지 않는 것뿐이다.
"으응.."
내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발걸음이 늦춰지던 소녀를 보았기에, 내가 잠시 멈춰서자 소녀도 이를 보고는 도도도 하고 옆으로 뛰어온다.
그리고 다시 속도를 맞춰 걷기 시작한다.
"에단, 저사람들.. 용사님, 성녀님. 찾으러가?"
이어진 두 번째 질문은 그리 골치 아픈 건 아니었다. 바실리카의 회의실에서 이미 함께 들은 이야기가 있지만, 단순히 신기하다는 감상에서 재차 물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 왕도 모르부스에는 스폴이나 바실리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 사람들.. 많이.."
트라사도 그리 작은 마을은 아니지만 스폴이나 바실리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오가는 것을 보며 신기해 했던 소녀였기에, 그보다도 더 많이 라는 게 쉽게 상상되지는 않는 듯 보인다.
그 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 됐든, 모르부스는 내가 알기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있는 곳이다.
심판의 날, 용은 공포로 잠식된 대지의 고요를 즐기기라도 하듯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며 아케라에 겁화를 흩뿌렸고, 그때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이들이 반.
불탄 뒤의 검은 대지에서 잿더미들로부터 태어난 마물들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이 또 그의 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부터 아케라의 네 대륙중에서 가장 큰 토지, 가장 많은 국민과 병사를 가진 왕국이었던 베헤멘티아는 그 재앙 속에서도 왕도 모르부스만은 지켜내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들 중에서는, 세상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고 용이 내려앉아 날개를 접은 곳이 남대륙이 아닌 북대륙이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그럼... 사제님이랑, 마법사님은?"
"..."
"엄마한테. 들었어."
두 번째 질문은 쉽게 넘어가는 건가 싶었더니, 첫 번째 보다도 골치 아픈 세 번째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대답을 해주니 물어보는 건가 싶었기에 아예 더 말을 하지 않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지.
"... 그래, 용사 일행은 넷이었지."
용사와 성녀, 마법사, 그리고 사제.
신탁에 의해 선택된 네 명의 이들은 각각 신의 축복을 받게 된다.
용사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전투기술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성녀는 신의 목소리가 전하는 계시와, 가까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기적을,
마법사는 세계를 구축하는 마나의 순환을 느낄 수 있는 여섯 번째 감각과, 이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마지막으로 사제는..
그런 그들을 어둠과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결코 마르지 않는 은총을 부여받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대단한 은총을 지니고도 사제로서의 본분을 다하지는 못했으나, 이 힘이 일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안다.
그렇기에 이를 새삼 깨닫게 될 때마다 나는 신을 원망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런 전능함을 가지고도 직접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그 날로부터 100년이나 지나고 난 지금에서야 신탁을 내려보낸 이유에 대하여.
... 왜 하필 내가 선택되어야만 했는지에 대하여.
"에단...?"
"아.."
대답을 하다말고 금방 또 생각에 잠겨 버린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있는 소녀의 집요한 시선에 못이겨 결국 내가 먼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사는 세상의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높은 탑에 스스로 유폐되었고.."
사제는...
"글쎄, 그 옛날의 사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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