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51화 (51/137)

〈 51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1)

어린 요정이 끝내 다다른 것은 망집.

터무니 없는 갈애.

*

"하아..."

멋대로 새어나온 한숨은 정처없이 흩어졌음에도, 여전히 가슴 밑둥에는 답답함이 남는다.

원로회가 내게 요구해온 것은 세계수의 정상화.

태고부터 아케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세계수가 힘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는 건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인다.

하루라도 빨리 묘목을 얻어 바실리카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해야 했을 일이지만,잘 될지 되지 않을지는 둘째치고 세계수의 아득한 높이와 그 크기를 보고 있자면 이리도 막막한 기분에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저기요, 저기요?"

내 이런 유쾌할 수 없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뒷짐을 지고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어온 은발의 엘프 때문에 잠시 걸음이 늦춰지고 말았다.

".. 뭐지?"

"셀렌님은 어땠나요?"

비록 큰 짐을 떠안았지만, 안그래도 눈부시게 밝은 데다가 답답하기만 하던 회장에서 빠져나왔기에 이제야 막 한숨 돌리려던 내게 뜬금없이 들려온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엘프, 계속 세레스티아에 대해 언급했었지.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건데."

"좋은 분이시죠? 그렇죠?"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고 있는 주제에, 저 푸른 눈동자에서 언뜻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집착의 감정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뭐.. 내 꺼림칙한 느낌이야 어쨌든, 대답하기 전까지는 물어보는 걸 포기할 것 같지 않다.

세레스티아.

굳이 말하자면 능력자체는 충분해 보였지만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도 아홉 명이나 되는 원로들 사이에서 의견차이로 논쟁이라도 벌어지면 그 가운데에서 몹시 피곤하게 대처할 것 같은 성격으로 보였다.

"능력은 있어 보이지만, 그 자리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정말이지, 무심코 그 품속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나요?"

...?

고민끝에 내놓고 있었던 대답을 간단히 끊고 들어온 새로운 물음에 나는 잠시 입을 마저 다물지도 못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 뭐?"

"...?"

이 엘프,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타 종족의 수장을 대상으로 저급한 농담같은 걸 나눌 생각은 없어."

"네..? 저도 그럴 생각 없어요. 셀렌 님은 자상하고 온화한 어머니 같은 분이신 걸요."

"..."

어머니..?

.. 그런 이야기였나.

아무리 그래도 타인의 품속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걸까?

"셀렌님만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고 피곤한 회의 시간같은 건 금방 지나가 버리거든요."

"후..."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머리가 지끈거려 오기 시작했다.

내 반응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내비치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더더욱 골이 당겨온다.

나와 소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그녀의 옆에서 벗어났을 거다.

그래.. 은인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로 가는 거지?"

애초에 원로회의 내용을 제대로 들었는지도 의문인데,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일단 따라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저만 따라오세요. 이번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귀여운 분에게 안내해드릴 테니까요."

"그건 또 무슨.."

"아아, 오늘은 정말 많이 걷는 것 같네요. 피곤해라, 피곤해라."

제 할 말만 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일일이 두통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면아무래도이쪽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이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 건가?"

적룡교를 상대할 때의 그녀는 전이마법을 몇 번이나 남발하고도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괜찮아 보였기에 든 의문이었다.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이쪽 경계는 나가서 사용하려고요."

"그건.. 주변으로 쳐진 결계 때문인가?"

"아, 눈치채셨나요? 이 결계는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나를 붙잡아놓는 기능을 하고 있거든요."

처음 경계를 지나올때 그 방향에 대해 잠깐 의문을 가졌었는데, 아무래도 세계수의 약화를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한 대처 중 하나로 보인다.

물론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기에 내게 부탁을 한 거겠지만..

그런데,

".. 꽤 자세히 알고 있군."

보통 세계수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일반 주민들에게 알리지는 않을 텐데, 원로도 아닌 그녀는 이미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 제가 쳐둔 결계니까요?"

"네가..?"

전이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이만한 범위에 걸쳐 펼쳐진 결계를 자신이 쳐 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물론, 세계수 아래에서 자라며 마나의 친화력을 타고나는 엘프들은 긴 수명마저 가지고 있기에 재능과 탐구의 학문인 마법과는 그 연이 깊다.

실제로 과거 신탁이 엘프를 마법사를 지명해온 적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은발머리 엘프는..

레베카는 정말 자신의 후계라도 만들어 두려고 한 걸까?

그녀가 제자를 들일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나는 여태 이비가 멋대로 그녀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켜보고 있자면 이 엘프는 마법의 종족이라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원로회의 수장인 세레스티아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만약 여기에서 전이를 사용한다면.."

"사용한다면..?"

"글쎄요, 아마 반은 전이되고 반은 이곳에 남겨질 것 같은데.. 윽, 상상했더니 조금 오싹하네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얼빠진 표정으로어깨를 움츠리고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한차례 떤 이비는 말한 대로 경계를 나서자마자 나와 소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그렇게,

"얍."

또 한 번 들려온 성의라곤 없는 어설픈 기합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어색하게 흔들리고 뒤섞이다 시야가 뒤바뀌어, 어느새 나무뿌리가 튀어나온 토벽과 맞닿아 있는 요람의 외곽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이제는 그녀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좁은 앞마당에 패어놓은 장작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자그마한 오두막집.

덜컥.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벌써 문앞으로 달려가 노크도 없이 당당하게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이비의 모습이다.

그 당당한 행동거지에 처음에는 그녀의 집인 줄 알았더니, 안쪽의 누군가에게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아, 이분은 요람에 거주하는 수인 분들의 대표이신 헹겔 님이세요."

거기다 한술 더 떠 평범한 이의 집도 아닌 것 같다.

"흐우으... 늘 똑같다냥.."

안쪽에서 들려온 것은 한 여성의 힘없이 늘어지는 목소리.

그런데...

냥..?

세계수를 중심으로 에워싸듯 모여있는 거주구역과는 한참을 떨어진 외곽 벽면에 위치한 이 조그마한 집에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인들의 대표라는 아담한 체구의 고양이 수인 여성 하나가 허름한 소파 위에 몸을 늘어뜨린 채로 손님을 맞았다.

"오늘도 재미없고~ 지루하고~ 텁텁한 흙냄새가 냐를 짓뭉개고 있다냐아..."

짧은 반바지에 맨 다리를 다 드러내고, 상의 대신 가슴 부근에 때가 탄 붕대를 조여둔 그녀는, 어깨 위로는 흙먼지가 쌓인 외팔 견갑을 집안에서도 벗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몹시 어질러져 있는 집과, 마찬가지로 먼지가 쌓인 채 한쪽의 넓은 벽면에 빼곡히 걸려있는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자아내는 분위기 때문에라도 오히려 그녀의 이런 차림새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그 말투는 여전하시네요. 귀여워요 헹겔님."

"알고 있다냐,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치러 온 거냥?"

언제 마지막으로 기름칠을 한 건지,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끼릭 끼릭 소리를 내는 견갑을 의미 없이 까닥이면서 성의 없는 대답을 하던 그녀는 내가 현관 안으로 첫 발을 들였을 즈음에나 드디어 몸을 뒤집고 제대로 이쪽을 바라본다.

"장난이라뇨~ 제가 헹겔님에게 항상 장난만 치러 오는 줄로 착각하겠어요."

"흐우우웅냐아.. 장난이 아니라면 귀찮은 일을 떠넘기러 온 게 분명하다냥..."

고양이 특유의 자세로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보이며 기지개를 켠 그녀는 이비의 예고 없는 방문이 그리 달갑지는 않아도 익숙한 것처럼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꼬리를 흔들어 손짓을 대신한다.

"엄청 귀여우신 분이죠? 제가 말했잖아요."

"..."

이 엘프는 정말이지.. 특이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원로회의 수장인 세레스티아를 셀렌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리고 이제는 수인들의 대표라는 이에게까지.

대하는 태도가 일관되게 불성실하고 가볍기 그지없다.

실제로 막역한 사이라 하더라도 외부인을 소개하는 상황이니만큼 회의장에서 보였던, 혹은 처음만났을 때 보였던 그 어딘가 멍한 차분한 모습의 절반이라도 보이는게 맞을텐데,

그렇다고 그게상대를 무시하거나 모욕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 보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모습은...

수천 년도 전에 정해진 종족의 규율에 따라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긴 세월동안 자연과 같은 순리의 흐름을 중시하는, 어느 종족보다 성실하고 청렴하다고 흔히 알려진 엘프의 모습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음.. 혹시 귀여운 거 안좋아하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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