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55화 (55/137)

〈 55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5)

"부디 당신들의 앞길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보살핌과 지혜의 가호가 늘 함께 하길."

상냥한 연녹색 눈동자가 우리를 바라보며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주고 있다.

당장 어제라도,

아니..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주한 적이 있는 얼굴이다.

"... 이번 적극적인 조력과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세레스티아님."

나는 보기 드물게 고개를 숙인 레베카를 따라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원로회의 일원으로서 어린 엘프들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바, 여러분들을 따라나서 도울 수 없다는 게 죄송할 뿐이에요. 최근에는.. 또 새로운 이웃이 늘어나서요."

"세레스티아님이 사과하실 이유는 없어요. 금서고의 출입 권한, 그리고.. 미스텔테인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세레스티아님의 도움 없이는 힘들었을 테니까요."

레베카가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은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갈색 빛깔을 띠고 있는 평범한 외형의 나무 지팡이.

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견고한 대지의 가호를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선조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맹약은 한 가지 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이 보답은.. 잊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해드리겠어요."

"후훗, 네."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하이엘프 여성, 유일하게 나서서 우리를 도와준 엘프의 원로를 바라보며 가슴 안쪽의 어딘가로부터 따스하게 울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를 믿고, 레베카에게 그들 일족의 비밀과 보물을 주저없이 건네준 것이었다.

"그럼..."

하지만 들뜬 발걸음을 채 한 발자국 떼어내기도 전에

나는 안면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느낌과 함께,

주변의 광경이 뒤바뀌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화르르륵..!!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

숲을 잡아먹은 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을 사람의 몸뚱이를 태우고 있다.

온통 뜨거운 공기로 호흡조차 힘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안면의 피부를 끓일 듯 정면으로부터 느껴져오는 격이 다른 열기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내 눈앞에 보인 것은..

"..."

불타오르고 있는 세계수.

그들을 보호하고 하늘을 떠받들어주던 세계수의 가지는 불타 끊어져 하늘로부터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뚜두둑...! 뚜둑..!

그 두껍고 무겁기까지 한 커다란 가지들이 화염의 꼬리를 길게 만들어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면, 그 아래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깔린 엘프와 수인들은 비명을 지르다 옮겨붙어오는 불에 순식간에 집어삼켜진다.

"아.."

수천 년간 침입자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던 거목들은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활활 타오르며 지금은 오히려 그들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는 감옥의 철창이 되었다.

쿵.....!!

떨어져 내리는 세계수의 가지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내 눈앞에서 잔해에 깔려버린 밝은 금발의 엘프 여성을 보았다.

몸의 절반이 완전히 짓이겨져 입에서 터뜨리듯 토해낸 피가 솟구쳐올라 내 얼굴에 튀었다.

이미 열기로 달아오른 안면에 튄 그 붉은 것이 데일듯 뜨겁다고 느끼며, 떨리는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불은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몸에 옮겨붙었고,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현실과 환각, 과거와 현재, 불안과 의혹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뒤섞여 내 의지를 흐릿하게 지워간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 해봐도, 다리를 움직이려 해봐도, 심지어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철그렁...! 철컹..!

익숙한 철성이 내 귀를 울려온다.

"...!"

절대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절대 열리지 않도록.

등 뒤로 묶어놓은 관이 단단한 사슬과 그 무게로 나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옭아매고 있다.

눈앞의 그녀를 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생명이 불속에 완전히 집어삼켜지는 것을두 눈 뜨고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피부가,

상냥함을 담은 연녹색 눈동자가,

믿음을 이야기하던 입술이,

녹아내리고 허물어지고

불타 사라져간다.

".....!!"

이를 견디지 못한 내가 결국 두 눈을 감고 말았고,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열기에 의아해하며 슬며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는 또 다시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아니..

장소는 바뀌지 않았다.

무릎까지 재가 쌓인 황량한 대지 위에는, 이곳에 세계수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겨우 말해주듯 불타 비틀린 흉측하고 새까만 뼈대만이 남아있다.

두 다리만이 재 속에 깊게 파묻혀 있을 뿐 나를 옭아매던 사슬도, 관도 사라져있다.

주변으로 그 어떠한 거목들도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것을 본다.

대삼림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로 뒤덮인 황량한 땅이 되어있었다.

이곳에는 이제 그 어떠한 생명도 남아있지 않다.

어두워야 할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땅 역시 쌓인 재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나는 다시 한번 이미 죽어버린 세계수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잿빛공간 속, 고통에 몸부림치듯 비틀려있는 그 뼈대는 마치 내 목을 움켜쥐려는 위협적인 손모양처럼도 보인다.

나는 재를 헤치고 발걸음을 옮기려다,

툭.

발끝에 걸리는 단단한 무언가에 몸을 숙이고 내 앞으로 쌓인 재의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어내었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황금색 십자가 문양.

사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녀의,

그리고 그의..

관이다.

사슬에 감겨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관의 덮개로부터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나는 중심을 잃고 잿더미 속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아래로,

아래로..

저 깊고 어두운 무저갱 속으로.

".... 허억....!"

목구멍을 찢어버릴 것처럼 서늘한 공기가 폐를 타고 들어와 두 눈을 번뜩 뜨이게 한다.

"허억... 헉...! 허억..."

잿빛으로 가득하던 시야를 대신한 은은한 어둠이 계속해서 차오르려 하는 숨을 안정시켜주고 있다.

"허윽...... 헉.."

악몽.

하지만 차라리 안도하게 된다.

몸이 온통 불쾌하게 축축해진 이유는, 분명 식은땀 때문이겠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 내고 나서야 드디어 정신이 돌아오고, 흉한 몰골로 소란을 피웠다는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돌려 건너편의 침대를 바라보려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 내가... 왜..?"

분명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을 나는 어두운 방안, 두 발로 서서 이비가 잠들어 있을 침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깨어나 있었다.

하얗게 변했을 정도로 힘주어 틀어쥔 주먹을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털어내자, 이제야 피가 통하며 욱신거려 온다.

"..... 설마 또.."

아니,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바실리카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에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지만, 겨우 마음을 다잡고 눈앞의 시야에 집중하자비어있는 침대가 보인다.

이비는.. 어디로 간 거지..?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내 옆에 놓아두었을 관으로 시선이 향한다.

사슬도 풀리지 않았고, 내가 잠들기 전 옆으로 밀어놓은 그대로.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절로 움직일리 없는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서있었는지 다리가 저려왔기에 그 감각에 겨우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계금은 찾아오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아직까지도 생생한 그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세계수의 불탄 잔해에 깔려 죽은 수많은 수인과 엘프들.

불타버린 대삼림과 세계수.

재로 뒤덮인 땅과, 잿빛의 하늘.

단순히 내 불안이 가져온 환상일 뿐일까.

아니라면..

"후우..."

피로가 조금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다시 잠자리에 들 기분도 아니었고 이렇게 땀에 흠뻑 젖은 채 다시 누울 수도 없었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이비가 누워있어야 할 침대 위로 다시 시선을 향했다.

자던 도중 내 기척에 깨어나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하기에는 이불이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어딜 간 건지.."

끼이이익..

누군가 발목을 잡아끌고 있는 것만같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일단 바깥으로 나왔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식은땀을 식혀주며 시원한 느낌을 준다.

"..."

닫혀가는 문틈으로 집안의 바닥에 말없이 놓인 관이 잠시 눈에 걸렸지만, 나는 끝내 문을 닫고 차가운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밖으로 나오게 되니 자연스레 빛무리가 모인 호수 쪽으로 시선이 간다.

잠들기 전 보았던 호수의 빛은 분명 이보다 밝고 화려했었는데..지금은 마치 잠에 들어 조용히 코를 골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수정들은 옅은 빛을 깜빡거리며 잔잔한 호수 위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어둠 속에 떠오른 은은한 빛의 향연에 홀린 듯 호수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내 발치에서 언뜻 눈길을 끄는 하얀 무언가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 이건.."

끈이 달려있는 얇은 천 조각,

그리고 그것은 조금 더 큰 천 조각 위에 깔끔하게 개어져 놓여 있다.

무슨 물건이길래 바닥에 놓여있는 걸까 하고 조금더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려던 순간.

내 귓가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

주르륵.. 뚝... 뚝..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호수의 잔잔한 수면 위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은은한 빛은 수면 위에 부딪히고, 다시 반사되어 수면 위 누군가의 물기 젖은 몸을 매끈하게 비춘다.

빛을 흩뿌리는 호수를 뒤로 두었기에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긴 은발이 물기를 머금고,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래로 물방울을 연신 떨어뜨리고 있다.

뚜욱.. 뚝...

주변이 어두운 탓에 오히려 더 눈에 띄는 그녀의 하얗고 뽀얀 나신이 내게 훤히 드러나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엘프답게 가녀린 몸은 그 잘록한 허리를 중심으로 정결하고 순결해 보이는 곡선으로 수려하게 여체를 그려내고 있다.

".. 어라?"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은발 사이로 튀어나온 그녀의 뾰족한 귀끝이 살짝 흔들렸고, 곧 나는 뒤돌아본 그녀의 푸른 눈동자와 정면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

순간 당황한 탓에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굳어있는데,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없이 조용조용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딱히 가릴 생각조차 없는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이쪽을 향해온다.

맨발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단순히 걷기 위해 움직이는 매끈한 다리와 골반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아담한 가슴이 물결치며 흔들리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가녀리고 무결한 나신이 내게로 곧장 걸어와, 팔을 뻗으면 당장 손끝에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고 나서야 나는 숨을 내뱉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 거기 제 속옷이랑 수건 좀 건네줄래요?"

"... 아.."

부끄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는 것처럼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는 내게 물기 젖은 손을 내밀어 온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무엇을 보고 멈춰 서게 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였지만이 천조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손을 뻗었음에도 끝내 닿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

뚝.. 뚝...

그러나 시야 위쪽으로 언뜻 보이는 그녀의 물기 젖은 맨발과 얇은 발목 주위로, 물방울들이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지며 재촉하듯 소리를 내고 있었기에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고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본의 아니게 그녀의 군살 하나 없이 완벽에 가까운 나신을 다시 한번 두 눈에 담고, 수건과 옷가지를 건네주었다.

이를 건네주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그녀로부터 뒤돌아서서, 그녀가 수건으로 물기 젖은 머리와 몸을 닦아내고 옷을 입는 사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있었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도 한참을 지났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하지 않아서도 안되는 상황이다.

"... 미안."

"음.. 그렇네요, 처녀가 밤늦게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게 그리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죠."

"..."

"고의는 아닌 것 같았는데..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이유는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대로 곧장 고개를 돌렸다면야 실수로 넘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

솔직히 말도 안되는 핑계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반사적으로라도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당황과 동시에 벙져서는 그게 실례라고도 생각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침묵이라면.. 제 마음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요?"

"그게..."

내가 그녀의 추궁에 말문이 막혀있는 때,

어째서인지 옷을 다 입은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는다.

그대로 호수를 바라보며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게 말해온다.

"으후후, 생각보다 많이 당황하니 놀랍네요. 괜찮아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으니까."

여태껏 그녀가 보여준 가볍고 가벼운 언동들과는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 챌 수 있는 차분하고도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나는 안심하면서도 어색함을 느꼈다.

"자, 앉아봐요. 호수가 예쁘잖아요."

"..."

".. 무방비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었던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털썩.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거부권은 없어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옆에 주저앉기는 했지만, 사람 한 명이 사이에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는 두었다.

이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내가 앉는 것을 확인 한 그녀는 다시 호수로 시선을 돌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 제가 실비아만한 키였을 때는 말이죠. 밤에 몰래 나와서 보는 호수의 모습이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어요.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정겨운 울음소리를 내고.. 수면 위로 그 수많은 불빛이 그대로 반사되어 율동하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말없는 내게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낮에 보았던 그 푸른 호수와 햇빛이 부서져 눈부시게 비치던 그 풍경이 참 그리워요."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처음 느낄 수 있었던 감동은 마모되어버리고 말아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요?"

"... 글쎄."

".. 이상하죠?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해서."

"아니."

"..."

"..."

이상하다고 본심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기에 아니라고 하자, 그 짧은 대답을 끝으로 잠시 대화는 끊어졌고 그 고요한 가운데 나와 이비는 말 없이 잠든 호수를 바라보았다.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그리고 문득,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해 온다.

악몽을 꾸었냐고.

"...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음, 분명 하루 정도는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일어나서요.. 그리고.. 으흠..."

... 그렇게 눈치 주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다.

왜그렇게 생각하냐고 그야 내가 묻기는 했지만.. 식은땀을 뒤집어쓰고, 자다가 일어나서는 그림자가 축 늘어진 얼굴로 걸어 나왔으니 말이다.

"사실 저도 그래서 목욕을 하고 있었거든요. 호수랑 집이 가까워서 정말 좋아요."

"..."

그녀도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서는 몸을 씻으러 나온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후우.. 재미없는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저는 이만 먼저 들어가 볼게요."

갑작스러운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로 이야기를 서둘러 끝맺은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인다.

"아, 에단 씨도 씻으셔도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훔쳐보지는 않을 테니까요."

"..."

기어이 가기 전에 한 번 멈춰서서는 신경 써주는 것처럼 민감한 부분을 찔러온 그녀는 상당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점점 멀어져 간다.

"... 후우.."

나는 그녀가 떠나고도 여전히 주저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분명 시원하기야 하겠다만, 그리 속 편한 성격은 아닌지라 손바닥을 들어 올려 이마에 가져다 대고 정화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왜 그렇게 심란한 상태로 밖으로 나왔는지 잠깐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을 정도였기에, 지금은 내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진정되어 있었다.

지금 들어가면 내 쪽이 불편할 게 틀림없으니..

적어도 그녀가 다시 잠에 들 때까지는 이곳에 더 있다가 들어가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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