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61화 (61/137)

〈 61화 〉 10. 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

* * *

10.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1)

"... 아흣?"

나도 모르게 진하게 새어 나온 뜨거운 한숨은 그녀의 얇은 옷감을 그대로 스며들어가 살갗을 데운 모양이다.

독특한 비명과 함께 내 머리를 껴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다급히 물러서는 세레스티아.

평소처럼 사뿐거릴 수 없었던 그 소란스러운 발걸음 탓에 마지막까지 눈에 각인시키려는 듯내 앞에서위아래로 요동치는 그 자극적인 흔들림에, 나는 멀찍이 떨어진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는 것을 보고서야 시선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아.."

"...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이브에게 항상 해주던 것처럼.. 아니, 최근 백 년간.. 더 커져버려서... 아아..?"

횡설수설하며 하지 않아도 되었을 말까지 해버리고 만 그녀는 결국 자신의 그 고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야 말았다.

"괜찮습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아직도 안면으로 남아있는 그 상냥한 감촉이 점차 사라져감에, 내가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나를 당황케 한다.

이브가 무례를 무릅쓰고 그녀에게 안겨드는 이유가 달리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나까지 당황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여전히 세레스티아는 차마 떼지 못하는 입을 오물대며 원로 답지 못한 서투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이래서야 곤란하다.

화제를 돌려야 하나?

.. 그렇지.

그러고 보니 마침 그녀에게 알려야 할 게 있다.

"세계수와 만났습니다."

움찔.

"어머니의 나무를.. 아니, 어머니를 만나셨다고요...?"

그녀가 사랑하는 숲과 엘프. 그리고 존경하는 어머니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예상대로 그녀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아 갔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말이다.

저렇게나 민망해 할 일을 무의식중에 해냈다는 점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증거도 없는 이쪽의 말을 의심도 없이 곧바로 믿고 답해오는 점도 다른 의미로는 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뭐, 이쪽은 쓸데없는 수고를 덜었다.

"숨이 끊어지고.. 어째서인지 세계수 내부의 존재와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세계수의 붕괴를 막을 방법은 없으니 우선적으로 성소를 폐쇄하라고 조언했고요."

"... 성소를 폐쇄하라니.."

"그리고 아마 들은 대로라면 생명의 정수가 하나.."

내게 흡수한 은총의 힘을 빌어 마지막 생명의 정수를 건네주겠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네.. 에단 님이 쓰러지시고, 곧 성소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정수가 탄생했어요."

한 말은 제대로 지켜준 모양이지만, 어째 세레스티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그리고.. 그 마지막 생명의 정수와 함께 에단 님을 회수한 직후, 성소는 저절로 붕괴되었고요."

"... 그렇습니까."

성소라 함은 세계수의 씨앗이 만들어지고, 그 묘목을 기르던 장소.

그런 중요한 장소가 붕괴했다는 것은 곧, 이들 역시 다가온 세계수의 종말을 충분히 체감하고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생명이자 마지막 가능성인 그 하나뿐인 생명의 정수를 아무리 맹약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게 넘겨주려 할 리는 없다.

이는 엘프들의 존속이 걸린 문제였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 상황은 알겠습니다."

내가 되살아나서 오히려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야 인간 하나의 희생으로 마지막 생명의 정수를 얻어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 찜찜하다기보다는 다행이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공로로 인정해주기는 커녕 마음만 먹으면 성소의 이른 붕괴를 내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물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눈앞의 이 유별나게 어설픈 하이 엘프가 그리 두지는 않을 테지만.. 다른 원로들이야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괜찮습니다. 이곳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 이래서야 그 우울한 세계수에게 나만 도움받은 꼴이 되어버린다.

나는 결코 대가 없이 도움을 주지 않으며, 그러한 도움을 받을 생각 또한 없다.

그게 까마득한 태고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조언은 조언일 뿐이니."

텁.

부들부들..

기세 좋게 말하기는 했지만, 침대 아래로 가볍게 내디딘 두 발이 후들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번 일 덕분에 그저 무한하다고 여겨온 은총이 마냥 한계가 없는 편리한 능력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성소로 가는 길은 이제 완전히 막혀버린 겁니까?"

"나무뿌리들이 저절로 움직여 통로를 막았어요. 그냥 통과할 수는.."

"베어낼 수는 있습니까?"

"... 네..?"

하이 엘프의 기나긴 삶에 있어 아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을 내 단순하고 무례한 제안에 그녀는 일순 그 눈동자까지도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성소까지 다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 에단 님이...?"

"예, 붕괴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세계수는 제게 그렇게 조언했죠."

그래. 조언일 뿐이다.

아무리 지혜깊은 현자라고 해도, 그 다 죽어가는 얼굴로 최선의 답을 내놓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세 가지 조언들을 얌전히 잘 따른다고 해서 내가 묘목을 얻어 돌아갈 수 있을 것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물론 그 하나 하나의 조언들이 전부 의미없이 내뱉어진 말들은 아니겠지만 왜인지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고싶지 않다.

"적어도 붕괴를 지연시킬 수는 있을 겁니다. 이대로라면 저는 묘목을 얻어 갈 수 없을 테고, 엘프들은 두려움에 떨며 붕괴를 기다려야만 할 겁니다. 그걸 원하는 겁니까?"

"아..니요... 아니요. 에단 님, 하지만.. 저희 엘프들은 모두 지혜깊은 어머니의 말씀에 거스르는 것을 금기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렇군요.. 그럼, 모른 척만 부탁드리겠습니다."

"... 모.. 모른 척이라니.."

드디어 몸을 일으켜 두 발 딛고 일어서자 발목이 요란하게 삐걱거려온다.

그나마 신성한 기운이 신체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 뼈와 근육을 굳히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요는 아닙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한 번 죽었던 이가 되살아나 곧장 제 발로 걸어나가고 있는 모습에 놀라기라도 한 건지 어떤지, 내가 방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세레스티아는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나를 붙잡지 못했다.

허락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침묵에 대해, 이제부터는 정말 외부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할 때다.

저벅 저벅.

첫 한 발자국이 크게 힘들고 위태로웠을 뿐.

지혜의 줄기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내려가고 있자니, 그제서야 나보다 앞서 뛰쳐나간 이비가 떠오른다.

그녀도 이 길을 따라 씩씩거리며 달려갔겠지.

"..."

그 표정, 말투.

그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서, 또 새롭게 보게된 모습.

건들어서는 안될 부분을 나는 무심하게 건들어버리고 만 걸까.

*

두구국! 투쿠구구구구욱...!

작은 형체가 빠른 속도로 나가떨어져 거칠게 흙바닥을 긁어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으로 피어오른 먼지 구름을 뚫고나온 작은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튄다.

"어서 일어냐라냥, 냐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했다냥."

그리고 그 자욱한 먼지구름 앞에서 뒷발이 하얀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있는 고양이 수인 여성.

후욱!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지 구름을 뚫고 달려나온 것은 다름 아닌 늑대의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 소녀다.

소녀의 손에는 날선 단검 한 자루가 꼭 쥐어져 있고, 그 뾰족한 날끝은 정확하게 고양이 수인을 노리고 있다.

뻐억!

하지만 일직선으로 곧장 달려들어오는 소녀를 하품과 함께 피해내며 등 뒤를 발로 세게 밀쳐내버리는 그녀.

투크그그극!

이에 달려들던 방향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진 소녀는 다시 한번 흙바닥을 긁어냈다.

"일단 한번 공격해보라고는 했는데... 움직임이 너무 뻔하다냥."

"끄응..."

힘겹게 일어나 아직 놓치지 않은 단검을 들어 보이는 소녀.

"날카로운 무기 끝에 망설임 없이 냐를 둘 수 있는 것도, 덤벼들 수 있는 것도, 끝까지 무기를 놓치지 않는 것도.. 다 좋다냥."

"..."

"하지만 그런 건 이 요람 밖의 수인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냥?"

그녀의 평가는 차갑기 그지없다.

"그리고, 같은 수인을 상대한다면 적어도 제 몸이 일으키는 바람보다 빠르지 않고서야 기습은 무리다냥."

후욱...!

목소리가 어느새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고, 반 박자 늦게 바람이 몰아쳐 오자 소녀는 깜짝 놀라 뒤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단검을 휘둘렀지만.

텁!

우두둑!

챙그랑!

"... 아윽..!"

한 손으로 소녀의 손목을 붙잡아 인정사정없이 비틀어버리자 결국 단검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녀의 나머지 한 손에 안겨있는 고양이는 여전히 평온해 보이기만 한다.

..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를 보며, 헹겔은 자신의 오똑한 코를 톡톡 건드리며 대답한다.

"그야 냄새가 다 맡아지니까냥. 그러니 일단 몸을 강하게 단련하는 것도 중요한 거다냐."

"... 으응.... 윽.."

비틀린 손목때문에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면서도 불쾌한 기색없이 그녀의 가르침에 일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어.. 너는 랑족이니 단련만 하면 냐보다 빨라질 수 있을 거다냥."

"... 응.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약하면...?"

빠르고, 쉽게는 강해질 수 없다고 소녀도 분명 생각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단련을 해도 그 공포스러운 존재처럼 될 수는 없을 것 같았기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었다.

처음 목표로 잡은 벽이 까마득하게 높은 것 같았지만,

이에 대해 스스럼없이 한 가지의 답을 말해주는 헹겔.

"으음... 그럴 때는 비열하고 비겁한 수를 쓰면 된다냐. 일단 이기고 살아남으면 그건 똑똑한 게 되니까냥... 물론 그게 강한 거라고도 말은 못하겠지만.."

"비열하고.. 비겁하게..."

"이쪽 손목은 오늘 더 못쓸 테니 이번에는 왼손으로 덤벼봐라냥. 이전에 말한 대로 앙리를 놀래켜 떨어뜨리거나 냐에게 공격이 스치기만 해도 네가 이기는 거다냐."

"... 응!"

발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놓아주니 당장 몸을 숙이고 아직 괜찮은 손으로 떨어져 있던 단검부터 쥐어든 소녀는,

인정사정없이 가까이에 서있던 그녀에게 단검을 휘두른다.

"흐냥?"

이 불의의 기습에도 제때 반응하고 뒤로 물러선 그녀는, 그 와중에도 품속의 고양이는 꼭 끌어 안은 채다.

"... 이렇게?"

몹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는 헹겔.

"냐하하.. 역시 똑똑한 아이다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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