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12. 불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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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불의 계약(2)
이비가 처음으로 위화감을 느낀 건 지혜의 줄기로부터 호출을 받아 푸르기스 원로를 만나게 되었을 때였다.
수인 아이들이 죽게 된 바로 그날이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을 맞이한 푸르기스 원로를 보며 그녀가 위화감을 느낀 건 정말 별것 아닌 이유에서였다.
세계수의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마을 사이의 경계에 만들어둔 결계와 같이, 그들의 능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마나의 섬세한 운용능력과 활용에 독보적인 재능을 보이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높은 자존심이 이를 쉽게 허락할리 없는 만큼 세레스티아를 거치지 않고 이렇게 직접 자신을 부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안부를 묻고, 나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이비는 푸르기스 원로의 말투나 눈빛에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한다.
애초에 그 의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것같다.
하지만 그저 한 명의 외부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에게 있어 나는 흉흉한 멸칭까지도 가지고 있는 분명한 악인이었으니, 푸르기스 원로의 그러한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것 없다.
애초에 이비는 그녀의 입으로 푸르기스 원로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고 했으니까.
"아, 그런데 에단 씨 잠걸음은 확실히 심한 편이더라고요. 혹시 몰랐어요? 심리불안에 따라 불면증이나 악몽... 잠걸음까지 나타난다고 듣기는 했지만.. 자다가 일어났는데 어두운 방 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걸 볼 때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
"물론 첫날밤에 저를 덮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따로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에단 씨의 저주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것과 잠걸음에 대해 말씀드리니 반가워하시더라고요."
"....."
그리곤 푸르기스 원로는 그녀에게, 사제인 내게도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 구속구의 제작을 의뢰한 것이었다.
그곳에 준비되어 있었던건 목과 팔, 다리를 구속하기 위한 다섯 개의 마나 구속구.
그녀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지만 구속구에 부여된 그 작고 복잡한 마법진을 수정하는 것은 신중하고 섬세한 마나 운용능력이 필요했던 만큼, 시간과 집중이 소모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푸르기스 원로님은 이런 협조적인 증언을 기대하고 저를 부른 건 아니었을 거예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뭘까요?"
푸르기스 원로가 이비를 지혜의 줄기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에 부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
"하나는 에단 씨의 곁에 있던 저를 떨어뜨려 놓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범행시간동안 제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구속구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너는... 왜 그렇게 그자에게 집착하는 거지?"
그녀의 말에 대꾸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저 목소리에 괜히 흔들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내 동요를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확신을 담아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셀렌 님 이외에 원로회를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사람 뿐이니까요. 에단 씨는 모르겠지만 원로회의 차기 수장으로 꼽히기도 했고... 수인들의 거처에 대해 여러모로 말이 많았을 때에는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기도 했고요."
"..."
그녀가 어디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것인지는 알겠지만 아직까지 그 원로에게 의심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억측이라는 느낌이 지금은 더 강하다.
그리고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비는 서두르지 말라는 듯이 손짓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후 또 다시 위화감을 느끼게 된 건, 작업을 마치고 지혜의 줄기를 나서다 사건에 대해 전해 듣게 되었을 때였어요."
수인 아이들 다섯이 살해당하고, 수인마을의 대표인 헹겔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죽인 범인으로는 내가 지목이 되었고 말이다.
"맨정신이었든 아니었든, 제 집에 얌전히 누워있었던 에단 씨가 수인 마을의 한가운데로 향해 아이들을 목 졸라 죽였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이상하지만,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다른 엘프들이나 경계를 지키던 엘프 경비들조차도 그 누구도 에단 씨를 본 엘프는 없었다는 거예요."
"..."
창고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나를 보았다는 수인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엘프들 중에서는 단 한 명도 나를 봤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었다.
요람의 정중앙이라고 할 수 있을 세계수의 바로 근처에 위치한 이비의 집에서 수인 마을에 있는 그 창고 뒤 공터까지, 그리고 다시 이비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것뿐이지, 나는 이것들이 모두 그녀의 괜한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 왜 그렇게까지 나를 믿으려 하는 건데? 범인에게 왜 들키지 않았냐고 묻는 건 이상하지 않나?"
"뭐어.. 엘프들에게만 들키지 않았다는 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죠. 마법에는 재능이 전혀 없는 대신 수인들의 오감은 엘프보다도 우월하니까요."
이에 대해서 만큼은 순순히 인정한 이비였지만 아직 할 말이 더 남아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 아이들이 있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의식이라고 해서 모르는 걸 알게 해주는 건 아니잖아요. 잊고 있던 걸 떠올리게 해주는 거라면 모를까."
"... 그건.."
"그리고 왜 아이들만을 죽인 걸까요? 단순히 미치광이의 살인 행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효율적이지는 않나요?"
".. 효율적?"
아이들의 죽음에서 효율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순간 나조차도 그녀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녀는 말실수가 아니라는 듯 그대로 말을 이어간다.
"이곳 생명의 요람에서 가장 목숨을 빼앗기 쉬운 약한 존재인 수인 아이들이 한자리에서, 그것도 다섯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어요. 아이가 아닌 성인 하나 둘 정도가 그렇게 살해되었다면 가장 먼저 그들의 주변인들을 조사하고 원한관계부터 살폈겠죠. 하지만 아이들의 죽음은..? 백 년간을 함께 이 땅속에서 살아오며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요. 같은 수인들이 이 절망적인 시기에 힘겹게 얻게 된 후세에게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도, 고고한 엘프들이 이런 광기어린 짓을 벌였을 거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그야말로.. 상식밖의 범행이에요."
"..."
"그렇게 되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범인은..."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고 내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온다.
이미 정해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외부인인 나 하나가 남겠지."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래서,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 아니잖아."
내가 범인이 될 수밖에 없는 범행이라면, 단순히 내가 아이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이들이 눈 먼 광기에 희생되었다는 건.. 타인의 입장에서 속편하게 말하는 것에 불과해요. 사랑하는 자식을 잃게된 부모들의 앞에서 과연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요?"
억울하게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죄없는 자식의 죽음의 이유조차도 광기의 희생양이었다는 그 성의없는 대답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뒤에서 이번 일을 꾸민 자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이득을 얻게 되는 게 누구인가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없었어요. 수인 아이들의 죽음으로 그 어떠한 이득도 얻게 되는 이들은 없어요.. 모두에게 슬픈 일일뿐이죠. 그래서 한 때는 정말 에단 씨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
"하지만 이번 재판과 그 판결까지 지켜보고 알았어요. 제가 알게 된 건... 꼭 아이들이 죽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 이번 사건의 목적은 하나였어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나를 가리켜 온다.
"죽지도 않고, 마르지 않는 은총을 지닌 당신을 이곳에 가두어 어머니의 나무가 영원히 힘을 잃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가 그 영원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나 스스로가...
이 형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조차 목적이라고..?
"여기서 위화감이 드는 거죠. 그럴 거였다면 차라리 수인들에게도, 엘프들에게도 모두에게 에단 씨의 그 잔혹한 범죄를 보여주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뭐...?"
"왜요? 만약 정말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고, 이 감옥같은 요람 안에서 뒤에서 일을 꾸밀 능력이 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에게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더 좋을 텐데요?
"..."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내 이기적인 본성이, 이번에는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이 형벌로부터 벗어나려 할까 봐.
한 번 떠오른 의문과 의심이 커져, 스스로 형벌을 받아들이는 데에 실패할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 보여줘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수인들에게는 괜찮지만.. 엘프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그런..."
그녀의 말을 계속 듣고있으니, 저 아래 깊숙이 숨겨두었던 위화감을 느낀 기억들이 주제를 모르고 고개를 내밀려고 한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 저건 전부 그녀의 추측일 뿐이다.
애초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세레스티아가 푸르기스 원로를 추궁했을 때, 그는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자신은 그 어떠한 일도 꾸미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이 모든 추측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제가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릴까요?"
"...?"
이비는 뜬금없이 자신의 발주변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나뭇조각들을 몇 개 집어 들고 자신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 위의 나뭇조각들 더미 위로 가볍게 한 번 손짓하자...
두국...
두구국...
나뭇조각들이 저절로 떠올라 합쳐지더니 인간처럼 몸통에 팔다리와 머리가 달린 형상을 이루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두 발로 높이 뛰어오르기까지 하고 나서야 그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이비는 다시 시선을 돌려왔다.
"간단한 플로팅 마법이에요. 인간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제가 그 움직임을 세부화시킨 것뿐이죠."
"너... 설마.."
"물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생명체에게 이 마법은 쉽게 통하지 않아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려 들면 그야 당연히 저항하려 할 테니까요. 수인이라면 단순히 근력만으로, 엘프는 마법으로 금방 파훼해버리겠지만... 힘없는 아이들이라면.."
후두둑 투둑..
그녀는 씁쓸한 눈빛으로 나무 인간을 허물어뜨리고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시체라면 어떨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