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13. 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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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4)
지혜의 줄기 원로회의 선대 수장 엘리시우스라고 한다면,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원로회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하이엘프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그때를 위해 느긋하게 인생의 황혼을 준비할 시기임에도 수장직을 내려놓지 않고 어린 엘프들을 이끈 훌륭한 자이다.
그리고 대화재 당시, 숲에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용의 불을 막아내기 위해 어머니의 품에 안겨 그 일부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마나를 모두 희생하여, 처음으로 흙 속에 묻힌 하이엘프이기도 하다.
푸르기스는 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 아버지.'
'슬퍼하지 말거라, 어차피 가야 할 몸. 하나라도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지.'
대화재로 절반 정도가 소실된 대삼림이지만, 그 나머지 절반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희생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삼림에 엘프들 이외에도 많은 수인들과 다른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외면하지 못 한 것이다.
다만, 바깥에서 일어나 번져오는 불길에 쫓기느라 이 희생을 깨닫고 감사하는 이들은...그의 희생을 지켜본 엘프들 뿐이었지만 말이다.
'너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거라. 생명의 이름 앞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없도록.'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께 선택받은 것은 유약한 심성을 지닌 세레스티아였다.
원로회의 수장이라면 응당 엘프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함에도,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이제는 살 곳까지 내어달라는 수인들의 요구에 우유부단하게도 끌려다니던 그녀였지만..
자신은 그런 그녀의 곁에서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모든 선택은 나 자신이 아닌 엘프들을 위해서였다고 말이다.
'모든 불의 계약은... 계약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돼요.'
나의 욕망?
처음에는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동족을 위하는 이 마음가짐에 욕망이라는 사사로운 것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러나 몸을 빼앗겨, 그가 요람 내부에 능숙하게 분란의 씨앗을 뿌리는 모습을 보며 뒤늦게 느끼게 된다.
오로지 엘프들을 위한다고 해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한 것은 분명 내 욕심이 틀림없구나..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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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엘은 자신의 어깨에 틀어박혀 있는 단검을 잡고 그대로 빼내었다.
"후우.."
치이이익...
그러고는 이내 문양이 내뿜는 열기로 달구어진 칼날을 상처에 가져다 대어 출혈을 멈춘다.
벌어진 상처가 지져지고 있었음에도 눈 하나 깜짝안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눈앞의 고양이 수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수인에게 마나 장악을 통한 제압이 효율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럼에도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칭찬할 만하다.
"이 땅속에서도 아직 무뎌지지 않은 칼날이 있었습니까? 안타깝게도, 제 몸 위로 쌓여가는 먼지를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니.. 제가 손수 파묻어 드리겠습니다."
화르르르륵!!!
그는 그저 제자리에 서서 왼손을 위로 까딱였을 뿐이다.
"큭..? 윽!!!"
하지만 그의 발끝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검붉은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 시야를 반으로 가를 만큼이나 크게 일어나 수인을 덮쳐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일어난 그 불길은 뒤에 있는 엘프들에게까지 닿기 직전에야 사그라들었고,
바닥에 검은 색의 기다란 상흔을 남기고 손등의 문양에 흡수되듯 사라진다.
쿠르르르륵... 화륵, 콰르륵..
"호..."
".. 어디서 갑자기 저런 괴물 같은 게... 윽.."
그리고 서로의 반응은 동일하게도 놀라움이다.
물론 그 이유는 서로 달랐다.
분명 단번에 죽이기 위해 손을 쓴 것이었지만, 불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위험을 눈치채고 뒤로 뛰어올라 곡예처럼 거꾸로 한 바퀴를 돌아 착지한 그녀는 옆구리에 열기가 스쳐 새까맣게 탔을 뿐이었기에,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것이었다.
"헹겔 님..!"
"크흐으... 아흐극.."
얼마나 상대가 위험한지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헹겔은 옆에서 들려오는 이비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옆구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허억... 윽.. 허윽.."
뱃속에 불이라도 번진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뜨겁게 데워진 숨이 목구멍을 타고 오간다.
"엘프와는 다르게, 수인을 해치는 건 조항 밖이라서 말입니다. 하지만 박탈당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나름 수인들의 대표를 맡았던 당신이니 마찬가지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죠. 누구든 제게 다시 달려든다면 요람의 수인 모두를 재로 되돌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처럼 주변을 억누르던 마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제서야 몸이 자유로워진 엘프들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헹겔을 위해 나서주는 이들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헹겔 님,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카마엘은 손발이 자유로워졌음에도 여전히 가만히 있는 엘프들을 노려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은 없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나섰다가는 수인들을 모두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을 떠안아야 하니 함부로 나서지 않을 명분도 있다.
누구 하나 상대가 되지 않는 사악한 이의 손에 '불가피하게' 수인들이 사라지면 오히려 지금의 소란도 종식될 테니 어느 쪽이든 그들은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비는 그런 엘프들을 벽 삼아 비틀거리는 헹겔을 뒤로 끌고 와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당장 상처 부위의 온도를 내리고, 타버린 살갗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잠깐 봉합해두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헹겔님도 오셨네요. 일단 저놈이 나쁜 놈인 건 아시겠죠?"
"그래.. 아파 죽겠으니까.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설명하자면 길어요. 하지만, 저놈을 이대로 가만둬서는 안된다는 건 알아요."
"... 그거면 됐어."
헹겔은 다시 만나게 된 이비의 태도 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유일한 의견과 합치했기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부탁해온다.
".. 한 번이라도 좋으니 시선을 돌려주세요."
"뭘 어떻게 하려고."
"할 수 있겠어요? 그것부터 대답해 줘요."
저런 상대를 앞에 두고도 무언가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비를 보며 헹겔은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애써 눌러 참았다.
"... 한 번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좋아요. 대신 위험하다 싶을 때는, 제 뒤로 와야 해요."
"그건 왜?"
"으으.. 마찬가지로 설명하자면 길어요. 저자는 엘프들을 해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저만한 힘을 가지고도 그의 주변 엘프들이 상처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점.
조금만 더 치솟았다면 자신을 집어삼켰을 그 날카로운 불길이 정확하게 엘프들에게 닿기 직전 사그라들었다는 점.
그녀의 기억속 단편들은 이비의 말이 터무니없는 헛소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깐, 그럼 나도 생각이 있어."
둘의 그 짧은 모의에 카마엘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타닥!
옆구리를 움켜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수인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던 카마엘은, 곧 그녀가 취한 당황스러운 행동에 의해 표정을 굳혔다.
"...?"
양팔에 한 명씩, 방금까지 자신의 든든한 벽이 되어주고 있던 하이엘프 원로 둘을 꽉 끌어안은 헹겔은, 그대로 카마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헹겔..! 이게 무슨 짓입니까?!"
"히익...?"
어쩌면 수인들 모두의 목숨이, 어쩌면 무고한 이 원로 둘의 목숨이, 그리고 자신과 이비의 목숨이 달려있을지도 모르는 이 판단을 따라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그리고 이 행동에 대한 카마엘의 미묘한 반응을 지켜본 그녀는 자신이 고른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옆구리에서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어금니가 깨져라 악물고 그를 향해 원로들을 집어던졌다.
카마엘은 아마 자신과 비슷할 당황스러운 표정의 얼굴로 날아들고 있는 두 하이엘프를 반사적으로 쳐낼까 주의하며, 뒤늦게 헹겔의 움직임을 쫓았다.
"어디 봐?"
주변 마나에 대한 장악까지 풀어놓았던 탓일까?
처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어느새 자신의 뒤를 잡고 있는 기척을 느낀 카마엘이 반사적으로 뒤돌아, 막 불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그래도 되겠어?"
"...!"
그는끝내들어 올린 손을 휘두르지 못했다.
등 뒤에 나타난 것은 고양이 수인 한 명뿐이 아니었다.
두 원로를 사정없이 집어던지고, 시야를 방해한 그 짧은 순간에 이비를 안아들고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중상을 입었다는 티가 나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쿨럭.."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할 일을 마치고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헹겔과, 몸을 내던지고 있는 이비.
그녀가 몸을 내던지고 있는 곳은, 카마엘이 자신의 어깨에 박힌 것을 빼내어 아직까지도 손에 쥐고 있었던 헹겔의 단검이었다.
"...!!"
그제서야 카마엘은 이 어린 엘프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를 눈치챘다.
스스로 칼에 찔려 조항 위반을 통해 계약을 깨뜨리려는 것이었다.
"..."
짧은 순간이었지만, 카마엘은 정말 오랜만에 분노라는 감정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예상하지 못한,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그의 본래의 분노와는 성질이 조금 달랐지만, 이 어린 엘프가 자신을 자극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심기가 뒤틀려 온다.
그녀가 칼날 끝에 닿기 전에 열기를 일으켜 이런 단검 따위,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워서야 그럴 수도 없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이 영악할 엘프도 이렇게나 가까워지는 대담한 수를 둔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꽈직...!
"...!!"
단단한 무언가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과 함께, 이비는 생각지도 못 한 이 변수에 눈을 크게 떴다.
풀석!
그에게 안겨들듯 몸을 내던져 자신의 복부에 정확히 단검이 꽂혀들어가기 직전, 단순히 그의 악력만으로 손안에서 단검이 우그러져 칼날이 크게 휘어지는 소리였다.
".. 이건 예상 못 했나 봅니다?"
"..."
자신의 품에 꼴사납게 안긴 꼴이 된 이비를 내려다보며, 비웃음과 함께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비의 눈빛을 본 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환희에 찼다.
이 엘프는..
아직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예상 못 했지만... 최후의 수는 생각해 뒀지."
"...?"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어린 엘프에게 강한 관심을 느끼게 된 카마엘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이비의 팔에 힘이 꾸욱하고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얍."
그리고 이비의 입에서 나온 그 고저없이 평범한 기합과 함께,
둘은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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