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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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4)
호숫가의 조그마한 나무집에 사는 어린 엘프에게는 은밀한 취미 하나가 있었다.
달이 밝게 떠오른 군청색의 밤하늘 아래, 몰래 집을 빠져나와 고요한 호숫가를 홀로 거니는 것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달과 별이 호수의 수면 위로 비치며 만들어지는 은은한 빛의 전주와 잠든 숲의 코골이를 듣는 것이 그녀는 정말이지 좋았다.
"이브...! 이브!"
그리고 분명 이 어린 엘프가 이런 은밀한 취미생활을 좋아했던 건 비단 아름다운 호수의 밤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브...! 또 여기에 혼자 나와서는.. 무서운 일은 없었니?"
"이비~이! 또 엄마가 걱정하셨잖아! 얼른 이리 와, 잡히면 간지럽혀 줄 거야?"
장난기 많고 멋대로인 자신에게도 다그침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상냥한 엄마.
자신보다 고작 주먹 하나 더 큰 키지만 자신과는 달리 항상 똑 부러져서 의지가 되던 언니.
"... 어서 돌아가자. 또 이렇게 말도 없이 나왔다가는 밖에 못 나가게 할 거다."
그리고.. 안 그런 척하지만 저 멀리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가, 엄마와 언니가 자신을 데려오는 걸 확인하고는 먼저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던 아빠.
철없는 어린 엘프는.. 이런 방식으로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항상 확인할 수 있었기에 혼이 나면서도 줄곧 밤의 호수를 구경하러 나온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이어질거라 생각한 그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일상은,
해가 모습을 감춘 어느 하루, 시커먼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불덩이가 호수의 수면을 진동시키며 숲에 떨어져 내리는 것으로.. 완전히 부서져내리고 말았다.
어린 엘프의 작은 몸이 충격만으로 붕 떠올랐을 정도로 어마 무시한 충돌이었다.
잠들어 있던 숲은 갑작스레 찾아온 재앙에 눈을 뜨고 가지를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지 전조였을 뿐이다.
어린 엘프는 어두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불덩이들을 보면서, 떨리는 다리를 재촉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가장 처음 떨어져내린 그 불덩이가 향한 곳이 다름 아닌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을 나무집의 방향이었기 때문이었다.
".... 아!"
수풀을 급하게 헤치고 나오다 넘어지고만 어린 엘프는 고개를 들어 나무집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불덩이가 떨어져 내린 건 집과 그리 멀지 않은 앞마당이었다.
어린 엘프는 한쪽 신발이 벗겨진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마당 앞에 생겨난 거대하고도 섬뜩한 구덩이와 아직까지도 타오르고 있는 흙바닥을 조심스럽게 피해 집 안으로 향했다.
"... 언니..?"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집안은 고요하다.
마당에서 세차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이 일렁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 불빛이 창문을 통해 비춘 집안에는 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엄마...? 아빠.....?"
지금 이 시간이라면 모두가 잠들어있어야 했다.
아니, 마당 앞에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불덩이가 떨어져 내렸으니 깨어나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걸까?
이런 늦은 밤에.. 이들이 집 밖에 나갈 이유 같은 건...
"....."
순간, 어린 엘프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쿵...
숲의 주변으로 불덩이들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들이 들려오며 땅을 울려온다.
하지만 어린 엘프는 알았다. 지금 이 소리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는 자신의 심장소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답답함에 속을 게워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지만...
어린 엘프는 기어이 현관을 열고,
마당에 생겨난 거대한 구덩이에 가까이 다가갔다.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당장이라도 온몸이 데일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다가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어린 엘프는 불타오르는 깊은 구덩이의 안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
"..."
연초를 피우며 이유 없이 다리를 떨다가, 이를 의식하면 멈추고, 다시 다리를 떨기를 반복했다.
챙겨온 연초 세 갑을 한자리에서 전부 피웠을 만큼이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지만 매캐한 연기로 머릿속이 진정되기는커녕 타고남은 꽁초만 늘어날 뿐이다.
"후우.."
결국에는 당장 물고 있던 연초를 떨구고 짓밟아 불씨를 꺼뜨린 나는 다시 나무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은발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
벌써 나흘째.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지금 시점에서는 치유도 완벽하게 끝난 상황이지만 아직 이비는 일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아직 이곳 생명의 요람에서 벌어진 사건들 역시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저 잠깐의 유예.
나를 다시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람의 주민들을 지금도 필사적으로 막아세우고 있는 세레스티아와 헹겔이 있었기에 생겨난 작은 유예였다.
"... 에단."
그때, 깊게 후드를 눌러 쓴 작은 체구의 인영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은밀한 기척에도 그게 누구인지 알았기에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 실비아, 헹겔은?"
"..."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나는 다른 이유로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화상으로 입은 상처는 사제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치유 마법도 잘 듣지 않는다.
당시에는 여유가 없었지만, 그나마 내게 유예기간이 주어진 지금이라면 찾아와 치유를 받고 제대로 나을 수 있을 텐데도..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사제로서는 두고 보기 어려운 미련한 행동이다.
어리숙한 속죄의 개념으로 고통스러운 화상의 상처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라니, 괜스레 화가 났다.
그리고 내가 지금 화가 나는 이유는, 그 미련함이 나를 똑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와서 앉아."
"에단, 헹겔은..."
"... 내가 직접 가볼 테니 걱정 말고 있어."
세레스티아에게 당시의 일들에 대한 설명은 들었다.
하이엘프 원로의 몸을 차지한 또 한 명의 적룡교 대주교...
그 자는 불의 계약을 통해 요람의 혼란을 꾀했다고 한다.
"카마엘... 그리고 불의 계약이라."
원로의 마지막 숨이 내뱉어지기 전, 내게 불길한 재회를 약속한 자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불의 계약.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이비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신도조차 만나기 어려운 적룡교의 대주교를 둘이나 연달아 만나게 되었다.
단순한 우연이나 불운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나도.. 사제로서의 이 앞길을 대비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의미겠지.
".... 으.. 으으.."
"...!"
깊게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일깨운 미약한 목소리.
이비가 옅은 신음과 함께 팔다리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흘 만에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인 것이었기에 나는 손안에서 무의식중에 굴리고 있었던 돌멩이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흐.. 으.."
하지만 이 반응은...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고.. 몹시 슬퍼하고 있다.
"이비...!"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이름을 불렀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신성한 기운을 부드럽게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려보내자, 인상이 다소 풀어지며 숨소리도 고르게 변한다.
그리고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노력끝에 거칠어진 숨이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을 때.
"..... 아..."
그녀는 눈을 떴다.
악몽 탓인지 이미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는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일단 정신을 차렸지만 어떤 후유증이 남았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비.."
"..."
"이비...?"
내 목소리에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와 내 모습을 시야에 담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인지장애나 기억상실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기에 확인을 위한 몇 가지 질문을 건네려다, 이내 문득 든 생각에 그보다도 먼저 다른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이브."
"... 네에.."
이브라고 부르자 그제서야 힘없이 웃는 낯을 만들어내며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맥이 풀리는 느낌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리 무겁지는 않은 한숨이다.
"악몽이라도 꾼 건가?"
"... 악몽.. 으응, 아니요."
분명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아니라는 그 대답이 의문스러웠지만, 그런 내게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오랜만에.. 옛날 꿈을 꿨어요. 가족들의 얼굴이.. 목소리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선명해진 기분이에요."
"..."
"이브.. 라고, 한 번만 더 불러줄래요?"
과거의 기억을 악몽의 형태로 꾸게 된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그 악몽 속에서 그리운 가족의 기억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녀가 그리 받아들였다면, 악몽이 아닌 거겠지.
"이전에도 말했지만, 어렵지 않아. 이브."
"헤헤... 역시 에단은.. 아빠랑은 목소리가 조금 다르네요."
"그야 그렇겠지."
"... 그런 거겠죠.."
영문모를 혼잣말을 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던 이비는, 이젠 완전히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생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맑게 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도 역시, 저는 당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