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87화 (87/137)

〈 87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 * *

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5)

"아앙.."

"..."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비탓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고야 말았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핀잔이 흘러나온다.

"참.. 태평하다고 해야 할지."

"기껏 주어진 시간이니까요..?"

소화되기 쉽게 묽게 끓인 수프를 숟가락에 담아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주자 즐겁다는 듯한 눈을 하고는 냉큼 받아먹는다.

"저 바깥이 지금 어떤 분위기인 줄은 알지만, 오늘 저녁에 다시 열릴 원로 재판은... 아니지, 수인 분들도 참여하니 마을 재판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

"어쨌든 일정이 정해진 걸 앞당길 이유는 없으니 그전까지는 제대로 쉬어 둬야죠."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려 열 손가락을 차례대로 꼼지락거려 보는 이비. 아직 주먹이 제대로 쥐어질 정도까지 회복이 된 건 아니었지만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거야."

함께 죽는 것을 각오하고 결계 바깥으로 전이하기를 선택한 이비에게 수프를 떠먹여주며 한 번 더 질책했다.

아무리 잘 해봐야 원로의 몸을 빼앗은 술자에게 이렇다 할 타격도 주지 못하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무의미한 죽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게요.. 죽기 직전에 후회한 걸 보면 분명 무모하긴 했었나 봐요."

하지만 이리도 쉽게 인정하니 내가 더 할 말도 없긴 하다.

수인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존경하는 원로가 더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말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네가 분명 그랬지. 내가 밖으로 나오면 알려줄 게 하나 있다고."

"헤헤.. 그랬죠. 기억하고 있었네요."

비극에 대한 자책과 절망으로부터.. 그 소중한 감정을 내버리지 않고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그녀는 내게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그 방법이란 건 뭐지?"

"안 그런 척하면서도 내심 궁금했나 봐요?"

"..."

놀리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 이비를 보며,먼저 말을 꺼낸 내가 멍청했다고 느끼고 숟가락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그녀가 조금 더 빨랐다.

"음.. 이제 와서 보니 그리 간단하지도 않네요."

"...?"

"사실, 이번에 죽을 뻔한 걸 계기로 저도 생각이 조금 바뀌었거든요."

텁.

숟가락도 제대로 못 쥐는 손으로 그녀는 내 손등을 붙잡아 왔다.

"..."

가녀리고 가벼운 손이 손등 위로 얹어진 것에 불편함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이 행동에 담긴 의미와 그녀의 저 맑고 푸른 눈동자만큼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내가 쉽게 부정할 수 없을만한 말을 해올 것 같아서였다.

"저는.. 여태 제가 사랑한 이들의 떠나간 빈자리를 비슷한 사람들로 채우려 했어요. 가족놀이를 하는 것처럼 상냥한 엄마 역할을 해줄 사람을, 활기차고 책임감 강한 언니 역할을 해줄 사람을..."

"..."

"그리고... 평소에는 제게 관심 없는 듯 묵묵하면서도 내심 걱정을 버리지 못하는 아빠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하는 이들 중 엄마와 언니의 역할을 맡은 이가 누군지,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빠 역할을 맡게 된 이가 누구인지까지도.

"그래서 당신에게는.. 그때 화를 냈던 것 같아요."

그녀가 내게 화를 냈던 그때라면...

아마도 내가 세레스티아의 침대 위에서 깨어났을 때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나는 계속해서 다가오려 하는 이비가 부담스러웠기에 내게서 떨어질 것을 통보했었지.

"수인 소녀를 위해 몸을 내던지던 당신을 보면서.. 아빠 역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들여다보니 오히려 제 쪽에 더 닮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짜증이 났었나 봐요."

"... 너랑 내가 닮았다니.."

거부감에 마냥 내뱉은 말이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비는 내가 꺼리던 그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아온다.

"닮았잖아요? 저희 둘 다 과거의 족쇄에 사로잡혀서, 지금을 낭비하고 있으니까요."

"..."

그 말은 신랄하게 내 가슴팍에 꽂혀들어온다.

"... 그래서.."

"...?"

"그래서, 그 바뀐 생각이라는 건?"

"아.."

내 물음에 이비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처연한 눈빛으로 푸른 눈동자를 채워간다.

"헹겔 님도... 셀렌 님도.. 정말 좋은 분들이지만 역시 제가 사랑하는 가족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어요."

".. 그렇겠지."

"사실 저는 그 사실을 훨씬 이전부터 알고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여태껏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없었던 거겠죠."

이비가 그간 보여주었던 일관성 없는 태도들이 방금의 말을 통해 이해가 된다.

과거,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을 지금에 투영하기 위해 배역을 세우고 연기를 하는 거짓 삶을 살아온 그녀는, 지금에 와서야 이 행동들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 모양이다.

"연기도 못 하는 주제에 잘도 그런 생각을 했네."

"헤헤.. 그 말은 조금 아프네요."

그래도..

".. 그녀들이라면.. 사실을 알고도 그리 기분 나빠하지는 않겠지."

둘의 단점은 명확했지만, 그런 만큼 각자의 색을 뚜렷하게 가진 이들이다.

이 밤의 시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네, 그러니.. 이제는 그분들을 함부로 제 과거와 겹쳐보지는 않을 거예요."

내 손등을 붙잡은 이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당신에게도요."

그녀의 저 푸른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턱끝을 들어올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돈다.

나에게... 나에게도.

"... 그건 다행이네. 네 아빠 노릇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거든."

".. 그 대신, 그만큼의 진심으로 다가갈 거예요."

"헛...?"

한 번 시선을 피했음에도 기어이 나를 붙잡고 고개를 들이밀어 온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새 진한 물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어, 나는 한동안 당황스러움에 입을 열지 못했다.

"낭비하고 있었던 만큼, 다가갈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새로운 인연을 두려워하는 건,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요?"

"..."

새로운 인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당연하게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반발심이 목구멍 아래까지 가득 차올랐지만.. 나는 이를 그대로 토해내기보다는 한차례 눌러 담는 쪽을 택했다.

내가 새로운 인연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 주변에 잃을 게 늘어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잃는 게 두려워 얻는 것을 포기하는 겁쟁이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인연이란 이 안전한 요람 안에 남아있을 이비에게는 다짐이겠지만,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내게는 욕심이라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내가 수를 그 이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거리를 두는 것도, 계속해서 실비아를 내치려고 한 것도...

내 보잘것없고 작은 손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힘껏 움켜쥐면 쥘수록 모래처럼 부서져 흘러내려 버리는 것을, 그 변함없이 비참한 말로를 쭉 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 같았다면 분명 나는 신경질적으로 답했을 거다.

네가 뭘 아냐면서, 나에 대해 뭘 이해하고 있냐면서 말이다.

하지만...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실비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얌전히 구석에 앉아있던 소녀가 기꺼이 내게로 다가온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쫑긋 솟아있는 귀의 감촉을 느끼며 스윽 슥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으응.."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옅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있는 실비아.

이비에게는 충분히 대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나 이비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미 나는 이 소녀를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니, 지금 이비의 이 말을 부정한다면 그건 내 다짐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려고 해. 다만, 천천히."

"..."

"물론 네게도 감사하고 있어. 덕분에..."

"에단.."

기껏 그녀에게 용기 내어 감사 인사를 전하려 했는데, 이비는 이를 도중에 끊고 나를 불러온다.

"어린아이가.. 취향인 거예요...?"

"..."

이 엘프는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그야.. 실비아가 예쁘기는 하지만... 제가 성소를 찾아가서 그렇게 매달릴 때는 눈길 한 번 안 주더니."

".. 그런 거 아니야."

"... 그런 게 아니긴요?"

"장난 그만 치고 입이나 벌려."

"웁..."

한참 들고 있느라 식어버린 수프를 그녀의 입에 강제로 쑤셔 넣으며 말을 끊었지만, 이젠 아예 눈물까지 양 눈가에 하나씩 글썽거리며 잔뜩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장난 같은 거 아니에요! 저는 진심으로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요!"

"...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꺄앗..?"

양 팔은 물론이고, 다리 한쪽도 치유를 마치기는 했지만 제대로 재활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기울였으니 그야 당연히 이렇게 되겠지.

침대 위에 손을 얹고 몸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팔에 힘이 한순간 풀려버리며 그대로 내 쪽으로 넘어지고만 이비 탓에, 나는 들고 있던 수프를 그대로 사제복에 쏟고야 말았다.

그리고 양 팔에 안겨있는 이 조심성 없는 엘프는 덤이다.

달그락 달각!

나무그릇과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며 내 한숨소리에 섞여든다.

"에헤헤..."

"... 네 입으로 날 아빠와 겹쳐보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랬죠. 하지만 어렸을 때, 늘 생각했거든요."

"...?"

기왕 이렇게 됐겠다.

이젠 아예 막나가기로 했는지, 엉거주춤 안겨있던 자세 그대로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온 이비는 내 품 속에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온다.

"나중에 크면, 꼭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하기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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