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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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6)
"... 여기까지가.. 제가 확인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에요."
재판은 엘프와 수인들의 생활구역을 나누는 경계에 임시 재판장을 만들고 두 종족이 모두 참관할 수 있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은은한 빛을 머금은 두 눈동자로 이비를 바라보던 세레스티아는 그녀가 한 말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실임을 인정한다.
재판은 마냥 흘러갈 것처럼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판결의 내용에 따라 언제든지 이곳의 주민들이 불복하고 나설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은 구속되어 있지 않고,
이곳에서 나가겠다는 결정을 이미 스스로 내렸다는 게 이전 재판과는 다른 점이다.
"... 조금만 더 발언할 시간을 주셨으면 해요."
"더 전할 내용이 있나요."
"네, 아주 중요한 내용이에요."
이비는 재판장의 주변을 둘러싸고 언제라도 들고일어날 것처럼 불편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수인들과 엘프들에게 한차례 시선을 주고, 다시 돌아와 세레스티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수 초간 이어진 그녀의 침묵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모든 이들의 시선을 그녀에게 끌어당겨 놓기에 충분했다.
"불의 계약이란, 푸르기스 전 원로님을 통해 요람에 혼란을 가져온 적룡교의 대주교 카마엘의.. 이른바 권능이에요."
권능이라 함은 은총이나 마나가 이루는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나 섭리에 한층 더 가까운 힘을 의미한다.
세레스티아가 세계수에게내려받은 저 눈이나, 내가신탁의 선택을 받아 규격외의 힘을 얻은 것과도 비슷하며, 날때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부분은 거대한 힘을 가진 누군가로부터 내려받는 것이 보통이다.
"강한 욕망을 품은 자에게 이끌리는 이 계약은, 대상자가 잠든 사이 꿈을 통해 통로를 만들어내 구두로 진행되고. 그 욕망을 이루어주는 계약의 대가는 언제나 동일하죠."
"..."
"자신의 몸을 계약자에게 넘기는 것. 여기에는 단순히 신체만이 아닌 지식과 기억 또한 포함되기에 그는 계약을 통해 여태껏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지식을 축적했으며, 그들의 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지난 백 년간 아케라를 천천히 혼돈으로 이끌어온 모양이에요."
이비의 말대로라면 북대륙에서만 활동해온 적룡교가 신탁이 내려오고 나서야 남대륙에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내 생각은 틀린 것이 된다.
게다가.. 바실리카 내부에 적룡교의 인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정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이 모든 행동들이.. 지금은 잠들어있는 용을 깨우기 위해서라는 거겠죠."
"...!!"
"용을.. 깨우기 위한 것이란 말이오?!"
계약자의 욕망, 이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세상의 혼돈이 정말로 용의 힘을 회복시키는 조건이라면..
그 카마엘이라는 자는 우리가 몰랐던 훨씬 이전부터 적룡교를 통해 사악한 용을 잠에서 깨우려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 모두가 어머니의 나무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죠.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에단을 다시 성소에 가두기를 원할 거예요."
"..."
"하지만 용이 깨어난다면 아직 스러지지 않은 땅 위의 생명들은 모조리 짓밟히게 될 테고, 어머니가 받아들이게 되는 죽음의 기운은 더욱 짙어질 거예요. 과연 그때에도 에단의 힘만으로 마을을 지킬 수 있을까요?"
이 세계의 주민이라는 것 이외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들에게 들려주기에는 갑작스럽기만 한 이야기일 테지만, 원로들의 반응은 달랐다.
"저 어린 엘프의 말이 사실입니까? 세레스티아 님."
"... 사실이에요. 이비는 금서고에서 현재의 서를 또 한 번 펼친 모양이에요."
"금서고에? 그럼 저 어린 엘프는.."
"..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는 아닌 것 같네요."
영혼의 회랑에서 세계수와 대면한 나를 통해 그녀가 어째서 죽어가고 있는지 알게 된 그들이니만큼, 요람 바깥이 지금보다 더한 상황이 되는 것을 반길 수 없을 것이다.
"이브, 여기서부터는 내가."
이젠 슬슬 입을 열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이비를 부축하여 마련된 의자에 앉혀주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어온다.
아니.. 그냥 평범한 미소였지만, 내가 그리 느낄 뿐이다.
"후우..."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일종의 통보에 더 가까운 성격의 이야기이고,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나 자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사제로서 이들의 앞에 다시 서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기도 하고, 껄끄러웠기에 괜히 초조한 한숨이 나왔다.
구욱...
하지만 내옆에 서서 옷소매를 꼭 붙잡고 있는 소녀의 작은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신뢰는 나를 강하게 일으켜 세운다.
"헤헤..."
그래.. 지금 힘내라는 것처럼 내게 주먹을 꼭 쥐어 보이고 있는 저 엘프의 응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제 이름은 에단."
내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이렇게나 어색할 줄이야.
"이미 한 번 당신들의 믿음을 저버린 배반자이지만, 여전히.. 신탁의 사제이기도 한 자입니다."
나는 인류 배반자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살아왔고, 이를 부정할 생각도 없다.
새롭게 내려온 신탁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 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만큼 원망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 얄궂은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지난 백 년의 대부분을 북대륙에서 생활하며 의미 없이 마물들을 쳐 죽이는 데에 시간을 낭비했고, 비교적 최근 돌아오게 된 바실리카에서는 늘 술과 연초에 절어 지냈습니다."
여태까지의 내 행동이, 반성이나 앞으로를 위한 준비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 비명 소리가..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옵니다. 지긋지긋한 두통과 함께 찾아오는 환각과, 끝나지 않는 악몽에 매일같이 시달립니다.. 그만큼 제 정신이 몹시 불안정하다는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약하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저라도 믿어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도망치지 않고 신탁이 인도하는 길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내 길이라면,
결국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아주 작은 이유라도 좋으니 가슴에 품고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그것이 이들을 구하는 것이 되었든... 이 어린 수인 소녀가 되었든.. 조금 성가신 엘프의 응원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그러니, 저는 이곳으로부터 나가겠습니다. 용을 반드시 쓰러뜨리겠다는 장담 같은 건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 옷소매를 붙잡고 있던 소녀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뒤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이젠 이 일방적인 통보를 마쳐야 할 때다.
"당신들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이 은총을 사용할 겁니다."
"..."
"...."
그 결과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 나타날 거라고.. 나는 그런 막연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한 번 실패했고, 이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 다음이라고 해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건 내 의지다.
태양이 다시 떠오를 내일로 이 소녀가 품은 상냥함을 무사히 전해내어, 세상의 불합리함을 부정하는 것.
유일한 욕망이자 욕심이고, 소망이자 바람이다.
"... 허락하겠어요."
"세레스티아님...!"
"그리고.. 응원할게요."
원로들 중 절반인 넷 정도가 직접 목소리를 내며 반대 의사를 내비쳤지만, 놀랍게도 꿋꿋하게 할말을 마친 세레스티아의 그 유한 눈매가 매서운 선을 그리며 그들에게로 쏘아지듯 향한다.
"수인 아이들이 죽고, 같은 마을의 주민들끼리 분열하고, 서로 창끝을 향하게 된 이번 비극에 대해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점은.. 분명 우리들에게 막을 기회가 있었다는 거예요."
"..."
"그리고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 이브가 없었더라면 저희들은 최악의 결말을 피할 수 없었겠죠."
세레스티아는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눈빛이 다소 날이 서있기는 해도, 타인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묘목을 내어주도록 하세요."
".. 하지만..."
"어머니의 나무가 견디지 못한다면 어린 묘목 또한 이 땅속에서 견디지 못 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에요. 그에게 고작 이 정도의 신뢰도 보이지 못 하면서, 어떻게 대신 용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원해 달라고 할 수 있겠나요."
묘목... 묘목을 건네주겠다고 한 건가?
나는 이들이 내가 이곳을 나가는 걸 막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더이상 얻을 수 없게 된 마지막 묘목까지 내게 건네라는 세레스티아의 지시에 끝내 다른 원로들은 불복하고 나서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묘목은 분명 세계수가 죽고난다면 마지막 남을 희망이라고는 하나, 정말 세계수가 죽는다면 막상 그 상황에서는 소용없어질 것을 알고 있을테니.. 저 결정은 단순히 걱정많은 하이 엘프 원로들의 굴복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물론, 묘목이 내게 가지는 의미는 그 이상이다.
"... 감사합니다."
"늘 따라오던 맹약에 이번에도 따르는 것일 뿐인걸요. 그저.. 어머니와 나눈 또 하나의 맹약, 신탁의 선택을 받은 당신에게 저희는 조건 없는 호의를 보여야만 함에도.. 늘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마네요."
맹약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더라도,원로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엘프들이 소란을 일으킬 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걸로...
저벅 저벅 저벅..
"..."
이 불규칙적인 기척
억지로 절지 않으려는 듯한 이 발걸음은..
"... 에단."
가느다란 허리에까지 핏자국이 번진 붕대를 감고 있는 헹겔이 내 쪽으로 다가와, 다섯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
미안하다는 말은 따로 없었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그대로 허리를 굽히며 내게 머리를 숙인다.
그녀의 그 행동에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수인들의 기척이 으르렁거리듯 몹시 불안정하게 들썩였지만, 이내 고개를 든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에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 지금 이곳에서 화를 내야 한다면.. 그건, 너 일텐데."
"...?"
검고 하얀, 그녀의 서로다른 색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향하고 물어오고 있다.
"아이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광인으로 몰려서, 내게 한차례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고.. 그런 수모를 겪고... 지금도 우리는 핑계뿐인 분노를 네게 토해내려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
"그런데도 너는 우리들의 내일을 위하겠다고.. 말하는구나."
하얀 머리의 고양이 수인은.. 허탈하다는 듯이 힘없는 한숨을 털어놓았다.
".. 말뿐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자각하고 있으려나."
"수모를 겪게 된 데에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의심하며 그대로 포기하려 했던 내게도 분명 책임이 있으니까. 그리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미안..? 아냐, 미안하다기보다는.. 모르겠어. 사실 나는 너보다는 마을의 수인들이 더 중요하니까... 그들을.. 그들의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말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깨문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날 막으려고?"
"..."
그리고 그에 대해 헹겔은 잠시 침묵하고 고민 끝에 답을 내놓는다.
"... 아니, 너를 막지 않는 게 우리들에겐 더 나은 선택이 될 거라고.. 지금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
그녀의 대답은 이렇게 내놓게 되었다고는 하나 수인들의 대표로서의 대답이다.
충분히 다르게 말할 수 있을 텐데도 그녀는 자신들의 이기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저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상처가 덧나기 전에 치유를 받으러 오도록 해."
"미안함이라도 느끼게 하려는 거야?"
"사제의 입장에서 한 말이야. 그리고.. 잘 모르겠다고는 했지만이미 그리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녀는 실비아까지도 피하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곧바로 부정할 수 없었던지 헹겔은 내 시선을 피하며 슬쩍 인상을 구긴다.
"... 목숨 값을.. 빚진 걸로 할 거야."
끝내 인정하지 않고 이 한마디를 남긴 그녀는 왔던 길로 돌아간다.
"..."
헹겔이 떠나간 방향으로 실비아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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