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89화 (89/137)

〈 89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 * *

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7)

잔잔한 호수의 물빛은 첫날 본 것과 전혀 달라진 것 없이 은은하게 빛나며 눈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발목까지 오는 얕은 물가에서 찰박거리며 물소리를 내고 있는 실비아를 바라보면서,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귀를 쫑긋 거리며 내 쪽을 돌아보는 소녀에게 나는 그녀를 부른 게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어주었다.

걷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재판장에서부터 업힌 채로 이곳까지 와, 지금까지도 내게 업혀있는 이비에게 물은 것이었다.

"... 글쎄요?"

그녀의 그 애매한 대답에 살짝 약이 오른 나는 그대로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양팔에 힘을 풀었다.

"꺄앗..?"

내 목에 감고 있는 양팔과 허리에 감은 두 다리에 힘을꼭주며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그녀를 보니, 걷기 힘들다는 건 역시 어떻게든 내게 업히려는 핑계였던 모양이다.

"으으.. 에단은 사제 아닌가요? 환자를 다루는 태도가 너무하잖아요."

결국 힘이 빠져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내려선 그녀에게 잡으라는 의미로 한쪽 팔을 내어주자 언제 툴툴댔냐는 것처럼 금방 들러붙어온다.

... 부축해 준다는 의미였을 뿐인데..

아니지, 이 녀석은.. 알고도 이러는 거겠지.

지금은 이것보다는...

"추방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한 적 없었잖아."

그렇다, 추방.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낸 이비에게 내가 이런 뜬금없는 것을 물은 것은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금서고에 침입한 이비와, 성소에 침입한 실비아에 대한 문책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으음.. 이건 제가 이미 이전에도 한 번 금서고에 침입한 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이전에도..?"

"에헤헤..."

본래 허락 없이 금서고에 침입할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마을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는 모양이지만, 세레스티아는 그녀의 사정과 요람 바깥의 상황을 감안하여 기한 없는 유예로 추방을 간신히 미루어 놓았던 듯하다.

엘프들의 사이에서 금서고의 침입은 성소의 침입에 버금가는 중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유예기간 동안 다시 한번 금서고에 침입한 이비에 대해서는 끝내 추방 명령이 내려졌다.

물론 그녀의 팔과 다리에 대한 재활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요람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유예의 유예가 주어지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

죽은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요람 주민들의 서로에 대한 신뢰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비는 이런 와중에도 규율이라는 것에 얽매여 요람 밖을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세레스티아가 주민들 사이의 관계 완화를 위해 종족 대표 회의를 정기적으로 열겠다는 둥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감정은 분명하게 토해낼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게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누구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아마 세레스티아와 헹겔만이 한동안 종족간에 격화된 감정의 고점을 별일 없이 넘기기 위해 애먼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내일을 약속하겠다는 다소 거창하기도 한 말을 보는 앞에서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재차 무력감을 일깨웠지만, 지금은 세레스티아와 헹겔을 믿고 맡겨야 하는 때이다.

"그것보다 실비아는 어떻게 된 거예요? 혼자서 성소를 지키는 엘프 둘을 쓰러뜨리고 에단을 바깥으로 끌고 나온 거라면서요."

"... 글쎄.."

실비아에게 직접 공격당해 기절한 두 엘프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었고, 나도 그녀에게 구해졌을 때 성소 앞에 쓰러져있는 두 엘프들을 보았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한 번 당해본 기억이 있는 만큼 기습으로 한 명을 쓰러뜨렸다면야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경비는 둘이었던 만큼 정규 훈련을 받는, 그것도 지혜의 줄기를 지키는 엘프 경비를 최소 한 명은 정면에서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목소리의 도움.. 이라고는 했지만 실비아는 이후 깨어나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목소리의 정체에 대한 건 물론이고 말이다.

"실비아."

이름을 부르자 물 밖으로 나온 수인 소녀는 물가에 벗어둔 신발을 들어 품에 안고 맨발로 내게 다가온다.

수가 만들어준 저 신발에 물을 묻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

재판장에서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며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한결 편해진 듯한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그다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귀를 쫑긋거리던 실비아는..

꼬르륵..

"... 앗.."

"푸흐핫.."

내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배에서 들려온 배곯는 소리에 고개를 푹 숙이는 실비아와, 참지 않고 웃음을 터뜨리는 이비.

나 역시 그녀를 먼저 불러놓고 이 예상밖의 대답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나무집의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집안 식탁 위에 먹을 게 좀 있을 거야. 가서 먹고 있어."

".. 저기요 에단, 일단 저긴 제 집인데요."

"생색을 내긴.."

물론 이비는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실비아는 성실하게도 그런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그러겠어요. 앞으로 얼마나 비우게 될지 모르는 걸요."

"..."

"가서 먹으렴, 후후."

또 이렇게 할 말을 없게 만든다.

"... 이브.."

"아, 잊어버릴 뻔했네요."

"...?"

실비아가 집안으로 향할 때까지의 짧은 침묵이 지나고 추방의 건에 대해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던 순간, 갑자기 이비는 뭔가 생각난 것처럼 내게서 떨어져 호수를 향해 걸어간다.

"이브..?"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금방이면 되니까요."

아직은 불안정한 발걸음이었지만, 용케도 물가까지 다가간 그녀는 자신의 몸 주변으로 투명하게 일렁이는 바람의 막을 두르는가 싶더니 단번에 손가락을 튕겨 모습을 감춘다.

"...!"

그녀가 전이 마법을 통해 그런 꼴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가 이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전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에 헛숨을 들이켰다.

그야 물론 그때는 실패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막연한 공포심 같은 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처럼 전이를 통해 눈앞에서 사라진 이비는 곧,

"얍."

변하지 않는 이 성의없는 기합과 함께,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 낸다.

촤악...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에 오히려 내가 더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단순히 그녀의 몸 주변의 투명한 막을 따라 흘러내리는 호수의 물소리였을 뿐이다.

말한대로 정말 잠깐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비의 등 뒤에는, 눈에 익은 관 하나가 사슬에 단단히 묶인 채 기대어져 있다.

쿵..

조심스럽게 관을 바닥에 내려놓은 이비는 마치 보란듯이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쓰러져 온다.

포옥.

이를 받아주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그녀를 안아주게 되었지만,이비는한 번힘껏 나를 껴안았을 뿐 다시 팔을 풀고 한 발자국을 물러서 나를 빤히 올려다 본다.

"...?"

양손으로는 그녀를 안아 주었지만, 관이 다시 내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내 시선은 끊어짐 없이 관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이비는 말없이 내 옷깃을 꼭 붙잡았다가, 이내 스르륵 손에서 힘을 놓는다.

"..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해 줄 수 있어요?"

"..."

"이 관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빛은.. 묘하게 낯설지 않아요."

처음 만났을 때에도,

집 안에 관을 들여놓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관에 대해 내게 묻지 않았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평소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이상할 만큼이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아예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행동한 이유는 아마 관의 주변으로 정신 사나울 만큼이나 복잡하게 감겨있는 사슬 때문일 것이다.

"결코 열려서는 안된다는 것처럼.. 칭칭 감겨있는 이 사슬 때문에라도 묻지 않았지만... 성소에서 에단은 마지막 결심을 하기 직전에 이 관에 대해서 물었었죠?"

"..."

"만약.. 이 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에단은 그때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요?"

소리 내어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분명 알고 있다.

이비의 말대로.. 정말 만약 이 사슬이 풀리고, 관이 열렸다면 나는 그대로 허무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잊혀지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그... 이유는..?

이유...?

"에단."

"... 아."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나는 이 사슬과 단단한 관의 너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뿐이다.

"저는 확신해요. 이 관이 에단을 옥죄고 있는 족쇄, 과거라는걸요."

"..."

어째서일까.

눈앞이 울렁거린다.

심장박동이 빨라져 목 아래에서부터 피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에단..."

호흡이 불안하게 겉돌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일순간에 검게 변하는 순간..

그 짧은 순간 잔상처럼 남는 것은 타다 남은 나무토막과,

그 속살을 좀먹는 불씨다.

"관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나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