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90화 (90/137)

〈 90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 * *

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8)

철그렁.

철겅.

이 지긋지긋한 철성은 머릿속에 새겨져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게 된 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추모제와 쓰러진 사제들이었다.

하얀 사제복이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나는 당장 그들에게로 달려나갈 수 없었다.

심하게 다친 사제들에게 반사적으로 내뻗은 내 손이 무안하게도, 그 반대편 손에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져오며 나를 멈춰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럽고,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황금 문양으로 장식된 하얀색의 관이 바로 그 정체였다.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직접 관에 사슬을 감았다.

손에서 쇳내가 진하게 배어날 때까지 단단히 묶으며 몇 번이고 사슬이 관의 상판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철그렁.

철걱...

그마저도 안심이 되지 않은 것일까.

나는 늘 관을 이고 지내며, 내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그 익숙한 철성을 듣는 것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었다.

그녀의 관을...

아니.... 그의 관을..

아니...

아니야....

"에단...? 에단? 괜찮아요?"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에단..!"

"허억..."

이마 주변으로 무언가 흘러내리는 느낌에 팔을 들어 소매로 훑어내자 그건 단순히식은땀이다.

"허억.... 헉.."

왜 이렇게 호흡이..

아니 그것보다는...

"불의 계약..."

어째서 과거의 기억 속에 이 단어가 남아있는 거지?

늘 분신처럼 이고 지내온 관의 안쪽에 대해 나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끌려 나온 기억의 파편 속에서 불의 계약이 함께 끌려 나와 놓였다는 사실은 몹시 꺼림칙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불의 계약이라는 단어가 부자연스럽게도 입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

'그 자는.. 에단이 보고 듣는 걸 자신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어요.'

금서고에 몰래 침입한 이비를 곧바로 푸르기스가 쫓아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재판장에서 이비가 말한 불의 계약에 관한 내용들 중에서 이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었다.

"이브... 너, 아직 내게 하지 않은 말이.."

"... 앗."

도망칠 수 없게끔 이브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놓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주시하며 마지막 남은 위화감에 대해 물으려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벗어나 그 뒤를 향하며 다소 얼빠진 감탄사를 흘린다.

늦지 않게 내게도 느껴져온 하나의 조용한 기척에 나 역시 당장은 추궁을 포기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

어색한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그자의 건강미가 돋보이는 갈색 피부와, 대비되는 하얀색으로 상의 대신 감겨있는 붕대가 보인다.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붙였다 할 때마다 뒤의 얇고 기다란 하얀 꼬리가 흔들리며, 동시에 노란빛이 언뜻 섞인 하얀 단발도 함께 찰랑거린다.

그 위로 뾰족하게 솟은 고양이의 귀와, 이쪽을 보지 못하고 바닥을 향하고 있는 하얗고 검은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

"... 헹겔?"

*

"흣... 냐앙.. 냐아...."

"..."

그녀의 상처 주변을 은총이 담긴 손길로 쓰다듬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이 낯부끄러운 목소리에 나는 그리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정체 모를 감정을 느끼며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헹겔의 방문 덕분에 이비의 그 곤란한 물음을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물론이고,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이 그나마 진정이 되었으니 말이다.

"... 미안, ㅊ.. 참으려고는 하는데.. 흐냐앗.."

검게 타버린 살이 잘게 찢어지며 살이 새롭게 돋아나는 중이었으니 그야 고통스러울만하지만 그 고통을 참으며 낸다는 소리가.. 다소... 경박.. 아니, 천박... 아니지...

.. 아무튼 내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그야 내가 먼저 그녀에게 치유를 받으러 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곧바로 찾아올 줄이야.

"이렇게나 심각하게 화상을 입었는데 바로 치유를 받지 않은 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흐읏... 냐우으.."

이후 어중간하게 이루어진 치료 때문에 상처 부위가 지저분하게 재생되어 오히려 치유가 더 힘들어졌다.

예리한 날로 절제를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치유를 제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 당장.. 네 얼굴을 볼 면목이... 흐냥.. 없었으니까냐앗..."

"딱히 이유를 물었다기보다는 네 행동을 지적하고 있는 거다만.."

"냐아읏.."

"불에 의한 상처는 최대한 빠르게 사제에게 치유를 받아야만 해. 고온에 그을려 괴사한 상처가 성수가 아닌 이상에야 일반적인 약품 따위로 해결될 리가 없잖아."

사실 요 며칠간을 대체 어떻게 이 상태로 멀쩡하다는 듯이 지내온 건지 그게 더 놀랍다.

이것도 수인의 신체능력 덕분일까? 아니지.. 그녀도 한계라고 생각했으니 곧바로 이렇게 날 찾아온 거려나.

내장도 그대로 다친 채였으니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테고...

"가만히 뒀다가는 갑자기 픽 쓰러져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어. 어떻게든 마법과 약품으로 겉은 봉합한 모양이지만 속은 엉망이었으니까."

"냐앙... 어쩐지.. 더럽게... 아프더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집중한 채 앉아있었던지 다리가 얼얼하다.

"하아..."

붕대를 열었을 때,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검붉고 누런 지저분한 상처 부위를 살피며 한숨을 쉬었던게 바로 조금 전 이지만 어떻게든 무사히 치유를 끝마쳤다.

"여기서 조금 더 옅어지기야 하겠지만, 흉터는 남을 거야."

"..."

치유가 끝났다는 의미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헹겔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치유가 끝난 자신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고 있다.

흉터가 보이기는 했지만 이전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상처가 사라져있으니 놀랍다고 느낄만하다.

"... 대단한 능력이네."

그녀의 말에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대답을 바라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고 말이다.

".. 고마워. 나는... 네게 그런 짓까지 했는데, 이렇게 치유까지 해 주고.."

"앞으로는 제때 치유받기나 해."

"... 그럴게.. 냥."

수인들이 경계를 넘어 엘프들을 공격하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한 이유 중에서는 헹겔이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 또한 있었다.

신뢰하는 대변인의 부재는 단체의 혼란을 야기하고 이들의 감정이 격화되었을 때 쉽게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수인들에게 신뢰받고 있는 모양인 헹겔의 역할은 중요했다.

말 그대로 픽 쓰러져서야 나 역시 곤란하다.

"그러고 보니. 너, 실비아를 피하고 있는 것 같던데."

"... 읏.. 그건..."

실비아라면 치유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이비와 기다리게 했기에, 지금 이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아마 실비아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몹시 서운해 보이기도 했고.

"실비아에게는.. 못 볼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어."

"정확히 어떤?"

"... 주민들과 가까이에 있었어, 그중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도 있었고.. 다들... 아무튼... 평소와 많이 달라져서.. 충격적이었을 거야. 나도 그렇게 느꼈으니까... 실비아는 말할 것도 없겠지."

그 혼란스러운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재판장에서 실비아가 고개를 들지 못했던 건 몹시 당연한 행동이었다.

"... 그건 곤란하네."

".. 곤란하지. 게다가... 내가 너를 한 번 죽이려고.. 결국에는 죽였, 아니 살았지만 어쨌든.. 그런 행동을 한 걸 실비아도 알게 됐는데, 결국에는 네가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니었고.. 으..."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더 곤란해지겠지."

"그렇겠지.."

천천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놓인 피 묻은 붕대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헹겔은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래서 말인데.. 에단, 염치없는 건 알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

"말해. 목숨 빚에 뭔가 하나 더 얹어진다고 해서 크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니까."

"윽.."

뾰족한 고양이 귀가 삐죽 뒤로 솟으며 울상인지 뭔지 모를 표정을 지어 보인다.

... 이쪽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끝내 용기를 낸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게 당당하게도 말해온다.

"실비아를..! 냐한테 빌려줄 수 있을까..?"

"..."

빌려달라는 표현이 그녀가 말하려던 의도에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간에 목소리까지 한 번 떨면서까지 부탁해오는 저 모습을 보아하니 어중간한 책임감에 이러는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당사자인 실비아에게 한 번 더 물어봐야 하겠지만, 내게 실비아를 위한 마땅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여기에서는 거절하지 않는 게 나아 보인다.

"이곳에서의 용건은 마쳤으니.. 그리 오래 남아있지는 않을 거야."

"...!!"

허락의 의미를 담은 내 대답에 헹겔은 그리 큰 반응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하얀 꼬리가 위쪽을 향해 솟아올라 그 끝부분이 살짝 말려 천천히 흔들리고 있기는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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