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15. 수면에 비친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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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수면에 비친 달처럼(1)
아이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땅속에 묻히고 벌써 며칠이 지난 때이지만, 장례식은 뒤늦은 가운데 치러지게 되었다.
같은 날. 전 원로인 푸르기스의 장례 또한 있었지만, 원로들 가운데에서도 몇 명만이 모여 조촐하게 진행된 만큼 엘프들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평범한 엘프들과는 달리 충만한 마나의 축복을 타고나는 하이엘프는 수명을 다할 때, 신체를 짙게 이루는 마나에 이끌려 눈부신 빛이 되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달무리의 의식을 장례식과 겸하였지만...
그는 끝내 선대 원로회 수장인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땅에 묻히게 된 두 번째 하이엘프가 되었다.
물론 그는 정반대의 결말을 맞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시신을 수습하여 봉합하고 하얀 수의를 입혀 요람의 끝자락에 나마 묻히게 되었으니 여태껏 그가 엘프들을 위해 살아온 것에 대한 마지막 예우가 되었을 것이다.
"샤샤, 이곳에.."
수인들의 장례는 매장으로 크게 특별한 것은 없지만, 한 가지.. 풍습이라 할 만한 게 있다.
사슴의 뿔이 눈에 띄는 수인 여성 하나가 두꺼운 가죽 자루를 들고 다니며,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다가가 물건을 하나씩 건네받고 있다.
그 물건은 실밥이 터진 작은 인형이기도, 낙서 같은 무늬가 그려진 나무 그릇이기도 하다.
"흐윽... 흑.."
사슴 수인 여성이 부모와 눈을 맞추고 한차례 인사를 한 다음, 제각각의 물건들을 자루에 넣을 때마다 부모들의 흐느낌이 작게 들려온다.
아이들의 냄새가 가장 짙게 배인 물건 하나씩을 자루에 넣고 함께 매장하는 것이다.
이는 남겨진 이들이 미련을 빨리 덜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죽은 이가 홀로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가장 오래 함께한 물건을 쥐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인들이 수명이 다해 흙으로 돌아갈 때, 보통 함께 매장되는 물건들이 수십 년을 사용한 지팡이와 같이 그들의 긴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는 것들인 것에 반해..
제대로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보지도 못하고 떠나간 어린아이들의 물건들은 작고 초라하게까지 느껴져, 보는 이들에게 더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내고 만다.
"아이들의 물건을 맡겨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제 보내주도록 할게요."
그럼에도 식장의 분위기는 여태까지 숙연했지만.. 사슴 수인이 자루의 입구를 단단히 묶고 깊은 땅속으로 내릴 때에는 결국 통곡이 터져 나오고 만다.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식장을 채우니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고,
삽을 들고 자루 위에 흙을 덮는 헹겔의 얼굴에도 그늘이 점점 더 짙어져 간다.
"...? ..!"
".. 저 자식이 왜 여기를?..."
"......!"
자루가 흙에 파묻혀 아이들의 냄새가완전히사라질 때까지 그녀가 단단히 땅을 고르고 있을 때쯤. 식장의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인파가 서서히 갈라지고, 여기저기 수선된 자국이 눈에 띄는 사제복을 입은 에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수를 정화하다 잠시 숨이 끊어진 그의 몸을푸르기스 원로가마법으로움직여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살해한 것이라는 진실은.. 분명히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었음에도...
죽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일으켰던 분노의 감정들이 아직까지도 가라앉지 않아, 기어이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미련한 자들이 여전히 있다.
휘이익! 빡!
"...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거냐!"
"당장 꺼져!!"
어디선가 날아든 돌 하나가 그의 고개가 옆으로 휙 틀어질 만큼이나 강하게직격했고, 이내 그의 이마에서 피 한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게 된 헹겔은 들고 있던 삽자루를 강하게 움켜쥐고 만다.
빠직, 푸스슥..
거세게 부스러지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에단은 그녀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이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충분히 예상했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미치광이 살인자라고 굳게 믿으며 함께 연대하여 경계를 넘고 엘프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수인들의 생존과, 정의에 기반한 대의라는 것이 그들의 행동에 안개가 낀 정당성을 부여했었다.
그런데 이를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부정하며 나타난 새로운 진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졌으니.. 이들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믿어왔던 대의에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난다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이 모호해지고 말 테니 말이다.
물론 엘프들에 대한 반감이 이미 강하게 자리 잡힌 만큼, 세레스티아의 능력에 크게 기댄 판결자체에 불신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이들의 행동은 아이들을 위한다는 개인의 감정이 크게 지나쳐, 정작 그 아이들의 장례식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신을 미련하게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에단.."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릴 만큼이나 강하게 깨물며 화를 눌러 참은 헹겔은 아이들의 장례식에 찾아와준 에단을 바라보았다.
인파에 가려 보지 못했지만 그의 앞에는 실비아도 함께하고 있었고,그는 혹시나 더 날아올지 모르는 돌을 의식하여 실비아를 보호하는 동시에 어깨를 잡고 그녀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 다들 조용히.. 아이들과의 작별에 소란을 끼얹을 생각이라면 내가 직접 뼈를 부러뜨려 주겠어."
헹겔의 작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경고 한 번에 웅성거림은 빠르게 잦아든다.
군중의 힘을 빌려 책임 없이 내놓는 감정이란 대개 이런 법이다.
이미 머리에 열이오른 그녀와는 다르게 여전히 침착한 에단은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벌써 아물어있는 상처를 한 차례 보인다.
"아이들에게 기도를 해 주고 싶어서, 물론.. 아이들의 부모가 허락한다면."
그러고는 아이들의 무덤 앞에 늘어선 부모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
"....."
그들은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에단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해도, 한때 그를 향해 품었던 감정만큼은 가짜가 아니었기에 그의 얼굴을 보면 감정이 먼저 반사적으로 요동쳐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끝내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다른 온갖 감정들을 이겨내는 것이다.
말은 없었으나, 그들을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을 대신하고 가운데의 자리를 비워준다.
"...."
당당히 그 자리에 선 에단은 성호를 긋고, 아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기도를 시작한다.
모아 올린 그의 손으로부터는 이 자리의 모두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신성한 은총이 축복을 내리듯 상냥하게 무덤 위를 덮어간다.
"... 가엾은 어린 생명들이.. 악의에 힘없이 스러져 끝내 빛을 보지 못하였구나."
그의 옆에 선 수인 소녀 역시도 그를 흉내 내어 성호를 긋고 말없이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 다음 보게 될 하늘은... 바라건대 푸른빛이기를."
"푸른 빛이기를.."
이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짧은 기도를 마친 그는 마찬가지로 기도를 마친 소녀의 손을 잡아 이끌더니 헹겔의 앞에서 멈춰 선다.
"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겠다고 하더군. 내일이면 떠날 테니 그전에는 마무리하도록 해."
"..."
아마도 다른 이들을 의식한 것인지 필요한 내용만을 짤막하게 전한 그는 왔을 때와 같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식장을 떠나간다.
그의 기도는 옆 사람에게나 겨우 들릴까 싶은 작은 읊조림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수인들이었으니 아마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의 신성한 기운이 아이들의 안식을 위해 이불처럼 덮어지는 모습 또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라면 단순히 헹겔의 경고를 따르는 것일까.
더 이상 그에게 반감에 찬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수인들은 없었다.
에단의 뒷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헹겔은, 곧 자신의 앞에 실비아가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잔뜩 어색한 표정이 되어 소녀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회색 눈동자를 보고 괜히 압박 비슷한 것을 느낀 헹겔이었지만, 그것이 요 근래 일부러 소녀를 피했던 자신의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빠르게 그 답답한 감정을 벗어던지고 소녀의 양손을 잡아끌었다.
"앗..?"
그대로 소녀를 꼭 껴안아버린 헹겔은 소녀의 귓가에 대고 진작에 했어야 할 말을 건네었다.
"미안..."
"..."
"미안해실비아..내가 너무 어른스럽지 못했지...?"
포옥..
이렇게 갑자기 끌어안을 줄은 몰랐기에 잠깐 놀란 것 뿐, 실비아는 자신이그녀의 포옹을불쾌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함께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 괜찮아."
괜찮다는소녀의한 마디에 헹겔은 눈물이 찔끔 새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자신만큼은다른 수인들이 보는 앞에서꼴사나운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으로 고마움의 표현을 대신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될 걸,
오히려 어린 소녀의 용서에 위로받고 있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누가 누굴 가르치나 싶다.
점점 주변의 시선이 모였기에 낯이 간지러웠던 헹겔은 아직까지도 자신을 껴안아 주고 있는 소녀에게 무슨 구실로 슬슬 놓아달라 할지를 고민하다..
소녀의 어깨너머로,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명의 수인 여성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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