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15. 수면에 비친 달처럼
* * *
15.수면에 비친 달처럼(2)
"샤샤...?"
소녀는 헹겔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몸을 굳혔다.
긴장한 꼬리가 조용히 늘어지고, 한차례 움찔거린 자신의 코는 등 뒤에 누가 서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
손을 뻗어 닿을 수 있기까지 이제 세 걸음이라는 애매한 거리감을 남기고 우뚝 멈춰 선 곰 수인은, 먼저 헹겔과 한번 눈을 맞추고..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수인 소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실비아.. 였지?"
그녀는 헹겔이 아닌 소녀에게 용건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과연 이들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마냥 희망적인 관측은 없다.
그도 그럴게, 소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반사적으로눈을 질끈 감고고개를 숙인 채였으니 말이다.
"괜찮다면.. 우리 집에 들르지 않을래?"
샤샤라고 불린 수인 여성의 물기 젖은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가라앉아 있었지만, 어떻게든 상냥한 느낌을 내기 위함인지 힘겹게 갈라지고 있다.
헹겔은 그녀의 간절하고 애처로운 모습에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한 순간 생기기는 했지만,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포옹을 풀고, 여전히 굳은 채로 불안하게 떨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
그 순간을...
자신도 기억하고 있다.
원망이 담긴 샤샤의 눈동자가 결코 향해서는 안될 어린 소녀에게로 섣불리 향하여,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때를 말이다.
그렇다 해서 자신이 잘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탁해져 끝내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이를 잃은 샤샤를 차갑게 밀쳐내지 못 했다.
차라리 그때 자신이 빠르게 결단했다면, 이렇게 둘 모두 상처만 남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으으..."
이미 지나가버린 자신의 부족함을 후회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런 건 자신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대로 둘을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실비아, 샤샤는 네게 묻고 있는 거야. 물론 그러고 싶지 않다면 나한테 말해."
"... 나는.. 난..."
"무리할 필요 없어. 샤샤가 그 때.. 네게 잘못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푸욱..
결국 소녀의 고개는 떨구어지고 만다.
이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샤샤는 그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는지 그저 후회로 가득한 마음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다.
그때는..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아직 어린아이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소녀가 한 것이라고는, 가장 먼저 피피를... 아이들을 찾아준 것뿐이다.
이성적으로 조금만 생각을 해 보아도, 헹겔과 함께 있었던 이 소녀에게 그 어떤 잘못도 있을리 없었다.
사과와 용서로는 이미 해결할 수 없게 되어버린 뒤늦은 때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기에 더욱 큰 후회가 어깨와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오는 것을 느꼈다.
"샤샤.. 미안하지만, 나는 실비아를 데리고 먼저 가볼 테니까."
".. 네."
"... 실비아?"
고개를 숙인 소녀의 어깨를 다독이듯 끌어안고 그대로 식장을 떠나려던 헹겔은, 최대한 소녀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었음에도 그녀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자 곤란해한다.
"..."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고 보기에는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고, 다만 이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
힘겹게 말을 걸어온 샤샤에게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않고 떠나는 데에 혹시나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자신이 조금 더 힘을 주어서라도 소녀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던 헹겔이지만,
말없이 땅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몸이 지금은 떨리고 있지 않았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헹겔에게조차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던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아마 이 자리의 모두가 잊어버렸을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다.
"머핀.. 받으러 가기로... 했었어."
아직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 이전.. 아니 직전에, 이들은 함께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했었다.
소녀는 아마도 그때 그녀가 보여준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기억하며, 이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샤샤를 믿어보기로 한 것 같았다.
*
화로의 열기와 함께 빵 굽는 냄새가 서늘했던 집안을 부드럽게 채운다.
그 향은 잘 꾸며진 화단 앞을 거니는 것보다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묘한 느낌이 있다.
"냐아..."
샤샤의 집 안에는 수많은 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헹겔이 키우는 검은 고양이, 앙리를 닮은 아이들도 있다.
그녀에게서 섞여 풍기던 고양이의 냄새는 이 조그마한 것들의 냄새였던 것 같다.
낯선 이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먼저 다가와 주변에서 꼬물거리는 고양이들을 보면서, 소녀는 샤샤가 이들을 얼마나 잘 돌보아 주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자아.. 다 됐단다."
화로 안에서 예쁘게 모양이 잡혀 부풀어 오른 반죽은 어느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머핀이 되어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다.
뜨거워 보이는 철판을 익숙한 듯이 맨손으로 잡고 식탁으로 옮겨오는 그녀는 뜨거우니 닿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 각자의 접시 위로 머핀을 하나씩 올려주고 있었다.
먼저 실비아에게 하나를,
다음은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헹겔에게 하나를.
그리고 자신이 앉을 자리의 접시 위에도 하나를 올렸지만 철판 위에는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머핀 하나가 남아있었다.
분명 수를 맞췄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하나가 남은 머핀을 보고 멈칫한 그녀는 이내 떨리는 손으로 실비아의 접시 위에 하나를 더 올려주었다.
".. 많이 먹으렴."
"... 고마워."
철판을 옆 선반에 올려두고, 의자를 끌어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으니 안그래도 헹겔의 표정 때문에 어색했던 공기는 더욱 답답하게 짙어지고 만다.
두 어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한 채 소녀의 눈치만을 보고 있다.
지금 이 모습이 얼마나 꼴사나운지는 자신들이 가장 잘 알겠지만, 그럼에도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인다.
".. 따뜻해."
포크 같은 게 있는지 자신의 접시 옆을 꼼꼼하게 살핀 소녀는 위에 올려진 두 개의 머핀 중 하나를 잡아들고 그대로 베어 문다.
그 모습을 보고 헹겔도 따라서 머핀을 집어 들었지만, 샤샤는 그저 소녀가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결국에는, 헹겔과 소녀가 접시 위를 깨끗하게 비울 때까지 샤샤의 머핀은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식고 말았다.
"... 실비아라고 했었지?"
".. 응."
빵 부스러기를 입과 손에 잔뜩 묻히고 있는 소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샤샤는 드디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 미안하구나."
이미 말라버린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기에 그녀는 옷소매로 마른 눈가를 황급히 닦아내고는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위로 끌어당긴다.
최대한 소녀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헹겔이 보기에는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네게는.. 너무 큰 잘못을 해버렸어."
"..."
소녀는 자신에게 사과해오고 있는 수인 여성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않았기에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결국에는 저 눈동자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그 갈색 눈동자 안에는 이전과 같은 원망과 분노를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기억속에 각인된 감정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다시 한 번 숨통을 죄여오는 것 같다.
"... 정말.. 미안하구나.."
트라사에서,
자신과 엄마를 향하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늘 차갑고 신경질적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철저한 무관심에 가까웠기에 엄마와 서로 의지하는 것으로 조그마한 안정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선이 무섭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처음으로 무섭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들의 눈동자가 마치 사냥감을 찾는 것처럼.. 까맣게 번들거리며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는데, 소녀에게는 한순간 그들이 굶주린 마물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아니, 그 이상으로 두려웠다.
분명 그전까지 헹겔과 함께 마을을 구경하며 보았던... 자신과 '같은' 수인들은 정말 친절하고 상냥해서.. 잠깐이지만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당장 에단을 찾으러 가고 싶을 뿐인데,
날 둘러싼 이들은 왜 저런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까.
두렵고, 억울하고, 혼란스러워서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에단과 들르게 된 아이들의 장례식장에서함께기도를 하며, 실비아는 그 부모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삶에 있어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린 그들의 얼굴에서 소녀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와의 약속까지 잊어버린 채로 아무런 잘못 없는 에단을 습격해 죽이려 했고, 심지어는 그의 자비에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배신하기까지..얼마나 여유 없는 마음으로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이들에게는 그 적은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때 에단이 자신과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마을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돌리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같은 슬픔을 짊어지게 된 이들이 자신과 다른 점이라면, 그저 누군가의 도움이 개입할 여지가.. 안타깝게도 없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사죄도, 용서도, 누군가를 향한 질책도 아닌..
"샤샤도... 많이 힘들 테니까."
".....!"
위로가 아닐까,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샤샤도.. 자.."
샤샤는 머핀이 올려진 접시를 자신 쪽으로 밀어주는 소녀를 보았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그 연회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눈앞의 시야가 갑작스레 흐릿해져버려서 당황했지만.. 곧 볼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지칠 때까지 흘려댄 탓에 더는 흘릴 눈물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뜨거운 눈물이 눈 주변과 얼굴을 데워온다.
"먹고.. 힘냈으면 좋겠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지만, 어째서인지 마음만큼은 따뜻하게 울려와서 여태 억지로 끌어올리려 했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간다.
슬픈데... 정말 슬픈데.. 고마워서, 그리고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워서..
오히려자신을위로해 주려 하고 있는 이 어린 소녀의 앞에서.. 그녀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미 식어버렸을 머핀을 쥔 자신의 손에서 분명한 따스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