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15. 수면에 비친 달처럼
* * *
15.수면에 비친 달처럼(3)
요람보다도 더 아래, 은밀하게 감추어진 호수로 향하는 좁은 통로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이유라면 부담일 것이다.
무거운 어깨와 답답한 가슴에 발걸음을 휘청인 나는 서늘한 흙벽에 힘없이 기대고 말았다.
부스스 하고, 작은 돌가루와 흙먼지가 사제복의 어깨 부분에 떨어져 내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역시나.. 잃어버린 이들의 앞에 서는 구하는 자는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떨리고 있는 내 양손을 당장이라도 잘라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것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광인의 기행 정도에 그치는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충동이 머릿속을 때리는 이유는, 이미 사라진 카마엘과 죽어버린 푸르기스 이외에 내가 원망할 것이라고는... 아이들의 목을 조른 내 양손 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뭘 하고 있는 건지.. 나는.."
그러다 비식,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 누구 보는 이 없는 이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나마 홀로 안심하며 충동을 붙잡고 있는 꼴이라니.
사제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분명하게 마음먹었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과 근심으로 이곳을 떠나기도 전에 이리도 흔들리고 있다.
이 불안이 당연한 거라는 걸 안다.
그만큼 힘든 길이 될 테고, 내가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한 번 걸어본, 그리고 한 번 넘어져 본 길이었으니 말이다.
"후..."
그래도 이런 식으로 홀로 궁상을 떠는 게 내겐 필요했다.
이 당연한 것을 속에 눌러 담고 있는다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다만 주의할 것이라면, 이 궁상이 너무 오래 늘어지지 않도록 적절히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부스슥...
어깨를 떨어뜨리고, 호수의 나무집을 향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 내일이면 요람을 떠나야 하니, 이비에게는 들어야 할 답이 있었다.
"..."
그러니 분명..
그녀에게 용건이 있는 건 나였을 텐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통로가 끝난 입구이자 출구에서 다시 한번 발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맑은 호수의 내음과 은은한 빛무리가 나를 반겨준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호숫가에 홀로 앉아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은빛의 요정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집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만큼, 문밖에서 짧게나마 나름대로의 준비와 결심을 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어 보인다.
"..."
어느새 기척을 눈치챘는지 저 멀리에서부터 고개를 돌리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를 보면 말이다.
풀석..
"데려다주고 왔어요?"
"..."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굳이 답하지 않고 그녀의 조금 떨어진 옆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였다.
"안 가봐도 괜찮겠어? 아이들이 너를 꽤 따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으음.. 지금 가봐야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아서요. 괜히 분위기를 흐려서 작별 인사를 하는 데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요."
"..."
나를 구해 요람에 데리고 왔다는 사실만으로 수인들이 이비를 얼마나 의심하고 비난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나중에 따로 한 번 들러서 인사만 하려고요."
"... 그래."
크게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이비의 옆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나도 그녀를 따라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왜인지 마음이 진정되는 푸르른 색감의 이 호수의 앞에 그녀가 앉아 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내일이면.. 우리는 떠날 거다."
"아..."
무릎을 다소곳이 모아 양팔로 껴안은 편안한 자세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이비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반응하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왔다.
"우리.. 부럽네요."
"...?"
부럽다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깨닫지 못한 나였지만, 그녀는 친절하게도 내가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들추어 온다.
"에단이 실비아를 두고 우리라는 말을 한 건 처음인 것 같아서요. 음, 아니면 제가 처음들은 것뿐일까요?"
방금.. 내가 우리라고 말했던가?
나와 그 소녀는...
"..."
"반응을 보니 더 부러워지네요."
".. 그런 건 아무래도 됐어. 그것보다는.."
괜히 눈가에 주름이 생겨난다.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당장 몸이 다 회복되는 대로 그녀는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만큼...
"따라오라고 말하려는 거라면 거절할게요."
"...!"
.. 하지만 그녀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채워오고 있었지만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다.
나는 단지 그녀를 바실리카로 데려다주려 한 것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한 번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단정짓고 있지만, 결국에는 나를 위해 추방을 각오하고 다시 한번 금기를 어기는 결정을 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너를.."
"바실리카에 데려다 주려는 거잖아요. 그래서 거절한 거예요."
그녀의 분명한 거절은 내가 그녀를 바실리카에 데려가려 했다는 걸 이미 예상하고 내뱉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자자, 지금은 조금 진정하고.. 이야기나 조금 해요."
"하아.."
그런 사소한 건 됐으니 이야기나 하자는 그 태평한 소리에 눈가의 주름이 더욱 짙어졌지만, 내 쪽을 바라보며 티 없이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결국에는 한숨과 함께 주름은 사라진다.
"부끄러운 거라면 저부터 이야기할까요?"
"... 마음대로 해."
의도와는 다르게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온 것 같지만, 이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호수로 시선을 향했다.
"저는.. 이곳에서 쭉, 기다리고 있었어요."
"...?"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기에는.. 조금 다르다.
아마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하지만 무의미한 기다림이죠. 저를 찾으러 와줄 가족들이.. 이젠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제 가족들은 대화재 때 목숨을 잃었어요. 불운과 우연이 겹친 당혹스러운 이별이었죠."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지금의 세레스티아와, 헹겔이 대신하기 전의 진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다.
"다 털어냈다고 생각해도.. 역시 계속 떠올리게 돼요. 그때 밤에 혼자서 호수를 보러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가족들의 죽음에.. 네 책임이 있다는 건가?"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네요. 그러니 이렇게나 힘든 거겠죠. 캐묻지는 말아 주세요. 저도 그 철없는 시절의 제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이나 원망스러운 마음을.. 아직은 다 버리지 못했으니까요."
미동도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이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지만, 그 눈동자 만큼은 서늘한 푸른빛을 띠고 있어 나는 더 캐묻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
"뭐, 그래서 이번 추방 건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이 들 정도예요. 제게 이 호수는 하나의 족쇄이기도 하거든요. 스승님께 전이 마법을 배운 것도, 결국에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저 나무집과 이 호수를 옮기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저는 지금까지도 이 지긋지긋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잖아요."
"..."
처음에 이 지하에 덩그러니 놓인 호수와 그 바로 옆의 나무집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는, 지상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가면 대체 어디로 가려고."
"네..? 그야 에단을 따라가야죠."
"... 뭐?"
분명 먼저 거절했던 주제에, 이번에는 당연히 날 따라갈 거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는 그녀를 보자 어이가 없어 절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너.. 분명 방금 전에는..."
"아, 으음.. 설명이 조금 부족했네요. 그러니까... 저는, 에단이 말하는 그 '우리'에 함께하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
그녀는... 이제 세계수의 묘목을 통해 적어도 마물로부터의 안전은 보장받게 될 바실리카가 아니라, 나와 실비아가 나아갈 길에 함께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그녀에게 묘목을 들게 하여 전달자의 입장으로 바실리카에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귀빈으로 대접받으며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텐데.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와 실비아를 구할 때.. 너도 그 괴물을 봤을 거 아니야. 그 놈도 요람을 혼돈에 빠뜨린 카마엘과 마찬가지로 적룡교의 대주교..."
"음.. 분명 엄청 무섭게 생기기는 했었죠."
".. 어쨌든, 그런 놈들이 나를 노리고 있어. 나와 함께한다는 건, 그놈들 앞에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 분명한 경고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해 온다.
"알고 있어요."
"뭐..?"
"실비아는 뭐라고 했어요? 이런 말, 에단이라면 분명 실비아한테도 적어도 세 번 이상은 했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나는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저로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 그런 문제가 아니다.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겠지. 너는 날 몇 번이고 도와줬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요람에 묻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는 커녕, 요람에 도착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녀의 진심 또한.. 모르는 척하려는 게 아니다.
".. 하지만..."
"하지만 뭔데요!"
내 태도에 결국 입가의 미소를 놓치고 목소리를 높인 이비였지만,
그녀도.. 나도..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무어라 말하지는 못한다.
"..."
"...."
잠시 그렇게.. 나와 이비는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맞지 않게 평온한 정경에 이비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나는.. 먼저 이 침묵을 끊기로 했다.
".. 너는 날 위해 네 목숨까지도 수단으로 여기고 행동했어. 물론 그래서는 안됐다고 스스로 깨달은 것 같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 몸을 내던진 너를 이해할 수 없어."
"..."
"너는.. 그럴 필요가 없어.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해도.. 넌 좋은 녀석이니까.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고."
내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이거다.
그녀가 내게 품은 호의와 호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자신에게 있어 부족한 것을 찾아온 그녀에게 한 순간의 충동에 가까운 착각일 것이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부친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내게 그녀는 잠깐 이끌렸을 뿐이고, 단지.. 불안하고 위태로운 심리가 그 작은 이끌림에 집착하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를 부친과 겹쳐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끌림의 계기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마치, 인연에서 만남을 부정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그녀의 의사가 어떻든 바실리카에 도착하는대로 그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마련해볼 생각이다.
이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겠다.
그녀가 그 꼴이 되어 피웅덩이 속에 늘어져 있었을 때,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큰 가책을 느끼고... 그녀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모른다.
실비아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기에 이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일 뿐.
이비는 아직 아니었다.
이 위험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어떠한 형태로든 그녀에게 내 짐을 떠안기고 싶지 않았다.
"... 에헤헤.. 또 뭐라고 하나 했더니."
"...?"
꾸우욱..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며, 그녀는 지금까지의 내 말을 조금도 듣지 못한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따라가 드릴게요."
"너... 방금 내가 뭐라고 했는지.."
"네, 똑똑히 잘 들었어요. 결국 에단이 말하는 요점은 이거잖아요?"
"...?"
털썩..!
짧은 실랑이 끝에 내가 다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게 되자, 이비는 내 옆으로 가까이 붙어오며 즐거워보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너는 정말 좋은 녀석이니까,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
"..."
"이브 네가 다친다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 거야... 맞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 이외의 것들은 전부 빼버린 제멋대로의 요약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당장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몹시 당황스럽다.
"그래도 한 가지 바로잡을 게 있어 보이기는 하네요."
"... 무슨.."
씨익...
그녀의 입가에 악동의 그것과 비슷한 시원한 미소가 걸린다.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를 중심으로 예쁜 눈매도 호선을 그리며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밀어붙인다.
"에단을 위하는 제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먼저.. 저를 위하는 에단의 그 마음도 잘못됐다고 인정해야겠죠?"
"... 아니, 그건.."
그건,
그렇게 말해버리면..
"좋아해요."
".... 뭐?"
그 갑작스럽게 던져진,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는 부담스러운 그녀의 눈동자보다도 더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그 짧은 한 마디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