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15. 수면에 비친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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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수면에 비친 달처럼(5)
꿈인 걸까, 하고 생각했다.
창밖에서 건너온 호수의 은은한 불빛이 침대 위로 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 아래 어지러이 흐트러진 은발이 그림자 속에서도 반짝이는 걸 본 나는 홀린 듯이 그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말았다.
".. 읏..."
"... 네가 먼저 유혹해놓고 그런 소리를 내는 건, 날 욕정 시키려는 건가?"
두꺼운 손바닥이 머리칼을 간지럽히자 새어 나온 그 귀여운 신음에 나는 담담히 물었지만,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어색한 고요에 피부의 온기가 금방 식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유혹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탓을 할 생각은 없지만, 외간 남자와 단둘이 술을 마시면서 그 무방비한 차림은 몹쓸 짓을 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테이블 아래의 마룻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빈 술병을 바라보았다.
분위기에 이끌렸는지 어떤지.. 처음부터 저 독한 술을 뱃속에 털어놓은 탓에 그녀는 얼마 안가 완전히 취해버렸고,거기다 열이 올랐는지 편한 옷차림에 그나마 걸치고 있던 외투까지 벗어던지고 말았다.
"그리고, 애초에 날 침대로 끌고 온 건 너잖아."
"그건.. 에단이... 불안하게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대답해 주지 않은 내 탓이다?"
나를 향한 그녀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올곧은 고백에 대해, 내가 속시원하게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리 없다.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어느 쪽이든 간에 쉽지 않았으니까.
받아들이기에는 새로운 인연이 무섭고,
거절하기에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무겁다.
"그래서.. 이 당돌한 엘프는, 날 침대까지 끌고 와서 뭘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었던 걸까?"
"... 놀리지 말아요.."
귀를 연신 움찔거리며 얼굴을 선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요정의 머리칼은, 매일같이 이슬로 빗겨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간질이며 감싸오고 있다.
사르륵 넘어가는 머리칼의 감촉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값이 더 나간다는 고급 비단보다도 손안을 만족시켜준다.
그러다 머리칼 사이로 비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녀의 귀에 시선이 닿았기에 예고 없이 훌쩍 간질여 보았다.
"히윽...?"
"재밌는 소리를 내네."
"갑자기 만지니까 그런 거잖아요..!"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내 손을 털어낸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나를 새침하게 노려본다.
몹시 괴롭혀주고 싶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그 당황스러운 충동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털어낸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위로 쓰러질 것만 같았던 자세를 고쳐 침대맡에 걸터앉는 것으로 취기에 이끌린 욕망을 내려놓았다.
"내가 누구에게 충고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불안하다는 이유로 몸을 내어줄 생각이라면... 음?"
오른팔에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있는 게 보인다.
"... 취한 것도 맞고, 내일 에단이 떠나는 것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것도 맞아요."
".. 그럼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그렇다고 해서.. 에단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부끄럽지 않았던 건 아니거든요..? 제가 어떤 각오를 했는지 에단은 절대 모를 거예요."
"..."
..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 걸까.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내 옆에 있고 싶다는 그녀의 집착에 가까운 갈애는 그 자체로도 물론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내겐 더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비는 내게 책임감을 지우려 들지는 않고 있다.
나를 도우려다 마을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으니, 책임을 지라든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내는 진실을 밝혀낸 자신을 배신하지 말라든가...
충분히 내게 책임을 지우고, 구속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일체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분명 그녀가 나와의 순수한 인연을 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임이나 빚 따위로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가 아닌, 순수한 호감에 이끌린 인연을 바라고 있다.
그게 지금 그녀가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이다.
"그래... 모를 리가 있나. 지금도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우읏.."
손을 뻗어 이번에는 그녀의 뺨 위에 얹자, 달아오른 피부 위로 열기가 한가득 느껴진다.
내 손바닥이 얼굴에 닿자 귀끝을 위아래로 격하게 움찔거리는 모습은, 꼭 수의 꼬리를 보는 것 같아 옅은 웃음기를 입안에 퍼트린다.
"미안하지만, 네가 처음은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나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다가오려 하는 건 네가 처음이지."
"저도.. 읏, 알아요. 하지만 이미 성소에서 저는 에단에게 있어 악역을 맡아줬잖아요? 이 정도는 이제 티도 안 난다고요."
"... 그렇긴 하네."
내게 아직 쉬어서는 안된다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해주는 그 악역을 흔쾌히 맡아준 이비에게는 고마움을 분명 느끼고 있다.
"에단도.. 사실 제가 싫지는 않죠?"
"꽤 대담한 질문이네."
"나름 확신이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저를 살리려고 애쓰던 에단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부하거든요."
"... 그렇네. 네가 정말 귀찮고 싫었다면, 그렇게나 널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조해하지는 않았겠지."
술기운 때문인지 가벼워진 내 입이 솔직한 대답을 내뱉자, 이비는 예의 그 웃음소리를 흘리며 자신의 뺨을 내 손에 더욱 기대어 왔다.
"에헤헤.."
그 순수하게 기뻐보이는 얼굴에 나는 마냥 마음편해질 수 없었다.
"...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걸요."
"..."
내 입은 분명 그녀에게 나를 포기하기를 종용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는 걸 그녀가 이미 눈치챈 건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내 말들은 그녀의 마음을 거절하고 싶어 스스로에게 내뱉는 것과 다름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실비아마저 잊어버리고 무덤 아래 무책임하게 잠기려고 했었지."
".. 결국은 밖으로 나와서, 모두의 앞에서 멋진 약속까지 해줬잖아요?"
"하지만 그 약속이 과연 지켜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조차 확신이 없어."
"..."
꾸욱.
그녀의 뺨 위로 얹어진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이비는 마치 나를 안심시켜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을 꼬물거리며 내 손바닥과 손등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 그러니까, 에단이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도와주고 싶다는 거예요."
"..."
"하나보단 둘이, 둘보다는 셋이 더 든든하지 않겠어요?"
정론이기에 오히려 더 부정하고 싶어지는 이 못난 마음을 잠시 눌러놓기로 한 나는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고 붙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아.."
이에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뱉은 이비였지만,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에단은 저를 지켜주지 못 할까 봐 두려운 거죠?"
"... 네가 겪을 필요 없는 일들이니까. 너는 신탁의 마법사도, 용사도 아니잖아. 이 길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아... 오히려 절망적이지. 그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꼭 그 신탁이라는 걸 받아야 에단을 도울 수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역시.. 에단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 하나부터 열까지가 전부 틀린 말에 나는 곧바로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하려던 말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동료들의 죽음과 용의 저주.. 그리고 구원의 실패에 대한 사람들의 싸늘한 원망을 겪고도, 에단은 그걸 다시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 실패한 건 우리들이니까.. 그들의 원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어떻게 에단을 원망할 자격이 있는지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는 한순간 마음이 흔들려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신탁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신탁이 구원의 의무와 동시에 부여하는 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축복이야. 노력 없이 그만한 힘을 얻고도..."
".. 그 힘은 에단이 원해서 얻게 된 게 아니잖아요."
"...!"
내가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어 두고, 감히 입 밖으로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런 이야기들을 이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걸 알면서도... 또 에단에게는 일어나 달라고 부탁해버리고 말았어요."
감히 그 의도에 대한 의심조차 품을 수 없을 만큼이나 신성시되는 신탁에 그 누가 이렇게나 불경한 소리를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그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죠?"
"..."
...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득 건네진 그녀의 진심어린 위로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야..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이조차도 아직 부족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왔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아니, 도와주게 해 주세요."
"하하..."
"에단..?"
이유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숨인가 싶을 만큼 힘없이 바람이 빠지는 그 웃음은 아주 잠깐 새어 나오고 끊어졌지만 분명 그녀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금방 말라버린 내 입은 묵묵히 닫혀있다가, 힙겹게 첫마디를 떼었다.
"나는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
"얼굴도, 목소리도,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도 전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기억나는 그 이름을 떠올릴 때면.. 내가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어."
"... 제 마음은 보답받지 못 할 거라는 이야기 일까요?"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지금 내 마음 속에는 그녀가 들어올 수 있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 뭐, 그렇지."
"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
내 손을 놓아주고는 침대에서 휙 몸을 일으킨 이비는 그대로 등 뒤에서부터 나를 강하게 끌어안아 왔다.
"이브..?"
그 당돌하고 대범한 행각에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보다 더한 말을 던져왔다.
"얼굴도, 목소리도, 추억도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가사, 그 아름다운 성녀님께는 미안하지만 제 쪽이 더 유리한 것 같아 보여서요."
"아가사... 네가 어떻게 그걸?"
"그리고 이 마음이 정말 보답받지 못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왜냐면 에단은 정에 엄청 약하니까요."
"... 헛?"
풀썩..!
껴안은 그대로 몸을 기울여 기어이 침대위로 나를 넘어뜨린 이비는 내 어깨 위에 고개를 얹고 귓가에 속삭여 왔다.
그 작은 숨결은 귓등을 간질이며 몸을 긴장시킨다.
"그러니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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