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02화 (102/137)

〈 102화 〉 16. 분기점, 선택

* * *

16.분기점, 선택(3)

철그덕, 철걱.

철그럭..

세계수의 기둥 안쪽으로 깊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걸어들어갈 때마다, 짊어진 무거운 관은 사슬을 입 삼아 끈질기게 소음을 흘리며 내게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앞에서 돌리지는 않았지만..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통로의 끝이 멀지 않은지, 나무 바닥을 차분히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저 너머에 부딪혀 돌아오는 철성의 메아리가 짧아지고 있다.

철걱.

.. 도착한 모양이다.

"..."

잠시 멈춰 선 나는 어두운 공동 안 세 줄기의 빛이 내려와 무언가를 올려두기 위한 구조물을 비추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빛줄기의 바로 아래에 각각 놓여있는 것은 다름아닌 세 권의 금서들.

덩굴과 줄기가 엉키고 그 위로 이끼가 덮여 형상을 만들어낸 금서의 겉표지가 은은한 빛 아래에서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금서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현자의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이다.

내가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금서는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으니..

지금은 잊어버린, 과거에 나와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마음속에서 들끓어 온다.

노아..

아가사...

철걱, 구우욱.

어깨 위로 묵직하게 늘어진 사슬을 맨손으로 움켜쥐자, 거친 철덩이 특유의 불쾌한 감촉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민다.

"... 무의미하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나 마음의 동요와 저항이 큰 것은 어째서일까.

만약 과거에 대한 대답을 얻는다 하더라도 용의 지긋지긋한 저주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야 의미가 없었다.

저주는 내 머릿속에서 그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지워버릴 것이다.

실비아가 여태껏 해준 용사 일행에 대한 이야기도 지금에 와서는 다시 이름만이 기억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세계수의 조언에 따르는 것이 옳은 선택인 걸까?

애초에 옳은 선택이라는 건 뭘까?

당장의 이 한 번의 선택만으로 미래의 중요한 모든 것들이 손쉽게 바뀌어버린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형편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역시..

이것이 다름 아닌 세계수의 조언이라는 사실을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만큼, 미래에 닥쳐올지 모르는 냉혹한 결과 앞에 지금 이 한순간의 욕구에 이끌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갈림길을 앞에 두고 내가 함부로 발을 내딛지 못하게 붙잡아 온다.

"내가 바라지 않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답."

무슨 의미인 걸까.

세계수는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내게 준 마지막 기회를 간신히 붙잡은 나는 이대로 순응해야 옳은 것일까.

"..."

도저히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등 뒤로 당겼다.

철걱... 그그그극,

드륵, 촤르르르르르르륵...!

쿵.

내가 바라지 않는 선택.

"... 그러나 원하는 답."

내 욕심과 걱정으로 하는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목적은 무엇일까.

...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의 결말.

나의 죽음.

그리고...

"실비아.."

그 소녀를.. 내일로 데려다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사악한 용이 쓰러지고, 태양이 다시 하늘 위에 떠오른다고 해서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다.

내일을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이었고, 밤에 익숙해진 그들이 다시 그 옛날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가벼워진 발걸음 끝에는, 더 이상 철성은 섞여 들려오지 않는다.

고심 끝에 선택한 금서의 앞에 선 나는..

그 덩굴에 엮인 책장을 잡고 단번에 펼쳤다.

"...!"

그러자 놀랍게도, 비어있던 책의 종이 위로 저절로 글씨가 써 내려져가기 시작한다.

'다시 길 위에 선 사제의 앞에 닥칠 세 번의 죽음은 무엇을 바라는가.'

'첫 번째 때가 이르매, 눈먼 아이의 죽음이 네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두 번째 때가 이르매, 반쪽짜리 짐승의 죽음이 네 앞길을 열 것이다.'

"... 아."

그리고 세 번째.

털썩.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다급히 책장을 덮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만 나였지만

분명..

"..."

내 입은 웃고 있었다.

'세 번째 때가 이르매, 너는 붉은 하늘 아래에서 그토록 바라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

수인들의 외로운 대표 헹겔은 백 년간 지긋지긋하게 보아온 요람의 풍경을 한눈에 담으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타닥, 탓.

휘파람 소리를 들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장작더미 너머에서 나타나더니 가볍게 뛰어올라 그녀의 품속에 안겨들었고, 그녀는 품속의 그 조그만 것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등을 돌렸다.

다시 지루한 백년의 매일이 반복되겠지만, 견갑 아래로 항상 느껴졌던 단검의 무게감이 사라져 있다는 점은 분명 다르다.

그 어린 늑대 소녀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이 어두운 땅속에서 조용히 마모되어가던 자신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마음속 깊은 곳에 조그맣게 불을 지폈다.

이 생소하고도 유쾌하게 느껴지는 열기는 대체 무엇인지, 이것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실비아, 다시 만나자... 냥."

*

"이비..! 아, 실비아도 같이 있었구나?"

머리 위에 돋아난 사슴의 뿔이 인상적인 수인 여성은 언제부터 이 주변을 한참 돌아다녔던지 가빠진 숨을 몰아쉬면서, 손에 들린 연갈색 종이봉투와 작은 주머니 하나 씩을 실비아에게 내밀어 온다.

"어라, 라챤코 씨? 저희를 찾고 계셨나요?"

"음, 그러니까.. 이거, 샤샤가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녀가 앞으로 내민 봉투의 안쪽을 슬쩍 엿본 이비는 싱글거리며 묻는다.

"오오... 이건 쿠키인가요?"

".. 네 거 아니니까 뺏어 먹지는 말고."

"굳이 뺏어 먹으려 하지 않아도 실비아는 착한 아이니까요. 나한테도 조금 줄 거지? 그렇지?"

끄덕 끄덕.

"하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받아든 소녀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맡곤 귀를 한차례 쫑긋 거린다.

품에 한가득 안긴 넉넉한 크기의 종이봉투 안에는 이비의 말대로 갓 구워져 나온 것처럼 진한 향을 품고 있는 쿠키들이 담겨있었다.

"직접 주는 게 좋을 거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생각이 많은 모양이라서.."

"응, 괜찮아.. 고마워. 전해줘서. 아, 그리고..."

"그래, 샤샤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줄게."

"... 응."

실비아를 보며 싱긋 웃은 라챤코는 소녀의 두 손이 묵직한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유가 없는 것을 보았기에, 따로 들고 있던 작은 천 주머니는 소녀의 품속에 찾아 넣어주고 그 위를 툭툭 손바닥으로 약하게 두드려 주었다.

"라챤코... 이거..?"

"지금은 다 나은 모양인데, 저번에는 손가락도 많이 다치고 그랬잖아. 잘 듣는 연고랑 반창고랑 여러 쓸만한 약들을 이름 써서 넣어뒀으니까.."

"나.. 글씨 못 읽는데..."

"그, 그건 그 사제분께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될 거야. 아.. 잠깐, 그러면 이 약들 다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사제의 일행에게 연고같은 상비약을 챙겨주다니, 자신의 생각이 짧았던 것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굳어버린 라챤코를 보면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린 실비아였지만, 받은 것이 무엇이든 그곳에는 그들이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고마워. 라챤코."

*

지혜의 줄기 최상층, 난간에 기대어 에단을 기다리고 있는 세레스티아는 그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여전히 요람의 어두칙칙한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난처럼 나타난 적룡교의 대주교는 요람 속의 소중한 생명 여섯을 거두어갔다.

그에 대한 자신의 대처는 두말할 것 없이 미숙했고, 어리석었다.

자칫 더욱 커다란 재앙으로 번질 수 있었던 것을 몸 바쳐 막아낸 것은 이브였고, 그녀를 통해 뒤늦게서야 눈이 뜨이기까지 했다.

에단에게 금서고의 출입을 허가하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자신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생각난 것이 고작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백 년 만에 재회하게 된 그는 등 뒤에 커다란 관보다도 훨씬 무거운 그림자를 짊어지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서 더 이상 이전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과거의 정이 분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들을 구원해 주는 것은 숭고한 신탁의 선택을 받은 용사일행.. 그렇다면, 그들을 구원해 주는 것은 응당 우리가 되어야겠지."

그것을 위한 맹약일 텐데도, 한심한 나는 전부 줍기 위해섣불리달려나가다 꼴사납게 넘어져 자칫 전부를 놓쳐버릴 뻔했구나..

하고, 작게 내쉰 그녀의 자조어린 한숨 소리는 금방 흩어져 누구도 듣지 못 했지만...

세레스티아, 그녀의 마음 속에는 분명하게 남아 새로운 변화의 첫 걸음을 이끌어 내려 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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