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7. 다시 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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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다시 길 위(1)
살갗 위로따스한 안개처럼내려앉은 햇살에 포근함과약간의나른함을 느끼며, 어린 수인 소녀는 스르르 몸을 일으킨다.
기분 좋게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온 꽃향기에 코 끝이 간지럽다.
소녀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 푸르른 색감으로 아른거리고 있었다.
"... 아.."
소녀는 이곳을 알고 있다.
"안녕. 시르."
"핫..?"
분명 주변을 살필 때는 발견하지 못한 누군가의 기척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등 뒤에서 나타나자 소녀는 놀란 마음에 꼬리를 말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야 말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던 밝은 빛이 무언가에 의해 가리어지는 것을 보고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하얀 양산을 쓰고 있는.. 하얀 원피스의 여인이다.
소녀는 이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의 어깨 위로 양산의 옅은 그림자를 드리워준 여인 역시도 알고 있다.
"푸흐흐..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쪽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고 조신하게 웃음을 흘리는 여인의 얼굴은 이 옅은 그림자에도 짙게 묻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소녀는 막상 그녀를 보니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 왜 이제서야 떠오른 걸까...?
소녀는 이곳에 올 때마다 생겨나는 늘 같은 의문과 위화감을 곱씹으며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지만,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머리 위로 덮어진 낯설지만 상냥한 손길을 느끼며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줄곧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정말 기특해서, 다시 만났을 때는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어."
"... 으응.."
스르륵... 스윽..
그녀의 손에서 고운 감촉으로 사락거리는 얇은 장갑 때문인지 소녀는 이 쓰다듬에 저절로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소녀는 그녀와 만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말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 도와줘서... 고마워."
"응, 그렇네. 내 변변찮은 재주가 너에게 도움이 돼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에단을, 그리고 은인이기도 한 요정님을 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마운 여인을 늘 떠올리고 싶은 소녀였지만..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어째서인지 여인과 함께 한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 당장이라도 높게 펼쳐진 저 푸른 하늘도,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푸르른 들판과 아름다운 꽃들도, 오감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평화로운 분위기와 양산을 든 여인까지...
늘,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만 떠오르는 것이다.
"... 미안, 나 기억하고 싶은데.."
"미안해할 필요 없단다. 오히려.. 미안해야 하는 쪽은 이쪽이니까."
"..?"
소녀는 그녀가 자신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뭐가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스륵.. 사락...
"으응..."
재차 그 잿빛의여린머리칼을 상냥하게 흐트러뜨려 놓는 여인의 기분 좋은 손길에 소녀는 이번에도 질문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 아직은... 아직은,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단다."
*
"..."
한차례 눈을 깜빡이고, 다시 스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소녀는 자신의 팔다리가 어색하게 휘적거려지고 있는 느낌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는 커다랗고 굳센 손이다.
"햣..?"
그제서야 몸 주변에 맞닿은 낯선 체온을 느끼고 소녀는 새된 비명과 함께 몸을 뒤틀었지만,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 실비아."
자신의 이름을 똑바로 불러오는 그 무뚝뚝한 목소리에 소녀의 팔다리는다시 얌전히 늘어져그가 흙바닥을 박찰 때마다 휘적거린다.
"... 에단?"
바로 코앞에서 그의 익숙한 냄새가 맡아지고 있었는데도, 어째서 곧바로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면 잠시 쉬었다가 가고."
옅게 갈라지는 그의 목소리와 딱딱한 말투는 언뜻 차갑게 느껴졌지만..
지쳐 잠든 소녀를 안아들고 계속 길 위를 달려온 그가 잠에서 깨어난 소녀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그녀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과도하게 상냥하기까지 하다.
"... 으응.. 아니. 빨리 돌아가야 하잖아."
깊디 깊은 강바닥과 같이 빛 한줌 새어들어오지 않는 대삼림에서 자신을 안고 달렸던 그 자세로 어느새 또 안겨있었다는 사실에 소녀는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솟아났지만, 그보다는 상냥한 요정님에게 받아온 나무의 씨앗을 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땅을 박찰 때마다 다시 팔다리가 휘적거리기 시작했기에 혹시라도 걸리적거릴까 두 팔이라도 가슴께에 모아 올린 소녀는 그가 무거운 관까지 등 뒤에 이고 달리고 있음에도 안겨있는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써주고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속도를 높일 테니 조금 가까이 붙도록 해."
역시나, 잠든 자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달려왔던 모양이다.
"... 응.."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바깥세상의 탄내섞인 쓸쓸한 바람을 피해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소녀는, 그의 품에서 은발의 아름다운 요정님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챘지만..
저번에도 수 언니의 냄새에 대해 말하자 그가 곤란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모른척 하기로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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