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7. 다시 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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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다시 길 위(2)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들은..
노 없이 조각배 위에 올라탄 사공처럼, 깊고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지 않는 한 결코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법이다.
"..."
내가 생명의 요람에서 흔들리고 망설이는 동안 이미 시간은 충분히 지체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포르투나의 강줄기는 나를 금세 또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는 모양이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문 앞에 자리를 잡고 늘어진 수십 개의 천막들, 이미 이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진 듯 보이는 난민들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소녀의 손목을 잡고 가까이 당겼다.
당장 바실리카의 경비대장인 딜런이 앞에서 나를 맞이하고 있었으니, 굳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겠지만...
"내 착각이 아니라면.. 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음, 늘어난 게 맞습니다. 처음 때처럼 한 번에 많은 이들이 우르르 찾아온 건 아니지만.. 우토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모르부스에서 찾아온 난민인가.."
당장은 아니겠지만 이대로 하나 둘 난민이 더 늘어나게 되면, 일하지 않는 입을 감당하는 것이 점차 힘들어질 것이다.
"모르부스로 향한 사절은 어떻게 됐지?"
"... 그건.. 일단 들어오시죠. 바깥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물을 찾아 돌아온 내 앞이다 보니 그 여로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딜런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저녁때가 되어 성양구가 희미하게 흩어져 가는 어두운 바실리카의 대로를 가로질러 곧바로 대성당으로 안내하는 그의 발걸음은 다소 진정되어 있지 않다.
"대주교님, 에단과 실비아가 돌아왔습니다."
"... 들어오시게."
촛불로 밝힌 그리 넓지 않은 기도실, 대주교님은 저녁기도를 마침 끝마친 모양이다.
"에단.. 그리고 실비아..."
그녀는 뒷말을 아꼈지만, 나와 소녀가 건강해 보여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눈빛으로 대신 전하고 있다.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마음은 먹었을 텐데도, 그 자애깊은 시선이 여전히 부담스러웠던 나는 서둘러 품속에서 밀봉된 목함 하나를 꺼내 건네는 것으로 안부 인사를 대신했다.
"이건..?"
"묘목을 얻어와 달라는 조건이었지만.. 그곳에서도 문제가 조금 생겨서 말입니다."
엘프들에게 세계수의 묘목을 받아오는 조건으로 실비아를 바실리카에 들인 걸 눈감아 준다는 그런 이야기였지만, 요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소의 묘목들이 전부 말라비틀어져 죽어있었으니 말이다.
"세계수의 마지막 씨앗입니다. 원로회 수장인 세레스티아의 편지도 함께 들어있으니 읽어보시면 됩니다."
"그래.. 그렇군... 고맙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목함을 건네받고 안도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주교님을 보며 실비아도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무언가 건네주고 싶었던 모양이라, 배낭을 한참 뒤적거린 끝에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든다.
"... 다나 할머니, 이거.. 아, 커다란 아저씨도."
"아, 아저씨.."
기도실 안을 채워가는 쿠키의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와 함께, 소녀의 이 거부할 수 없는 성의에는... 대주교님과, 심지어는 딜런마저 눈밑의 짙은 수심을 잠시 걷어내고 입안의 심심함을 달래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같이 있었지만.. 이 잠깐의 평온에 대해서는 나도 잠시 눈을 감기로 했다.
*
"흐음.."
그야 물론 성물로 유지되는 결계를 정상화하기 위함이라는 의미가 가장 컸지만, 바실리카에 실비아가 남는 것을 인정시키기 위함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비아는 바실리카에 남지 않고 나를 따라 또다시 밖으로 나왔으니.. 그 목적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버렸다.
"꺄르르..!"
"아, 넘어지면.. 안돼."
그래서 나는 지금 함께 뛰어놀고 있는 두 어린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참이다.
잿빛 머리칼과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은 늑대의 귀가 인상적인 수인 소녀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그 옆의 소녀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막상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괜찮다는 느낌이다.
분명 실비아를 처음만났을 때는 저 소녀만큼이나 어려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테르 님, 저 수인 아이는.."
"제 일행입니다."
".. 그렇군요, 역시나... 그런데 벌써 다시 이곳에 찾아주신 건, 얼마 전 보였던 그 신성한 빛줄기 때문입니까?"
.. 바실리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그야 그 거대한 빛기둥을 보지 못했을 리는 없겠다.
"..."
내가 추모제 때마다 음식과 물을 얻기 위해 찾았던 이 마을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왕도 모르부스로 향하기 전 한 가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넓다는 말로도 부족한 대삼림이다. 지크프리트.. 그 순혈자가 요람의 지근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분명 나와 마찬가지로 세계수로 이끌어줄 성물의 가지가 필요했을 거다.
이비에게 듣게 된 나와 카마엘 사이의 계약 가능성과, 기억을 훔쳐본다는 그 번거로운 권능에 대해서는 이젠 나 역시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성당 내부에 내통자가 있어 교단의 성물을 훔친 게 아니라면.. 내가 이 마을에 작은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심어둔 저 성물의 가지에 손을 댄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일말의 걱정이 있었다.
"뭐.. 그렇습니다. 새롭게 신탁의 선택을 받은 이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오오..."
하지만 결계는 이렇게 무사하니, 역시 대주교님과 딜런에게 경고해둔 대로 바실리카 내부에 내통자가 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꺄하하...! 핫..?"
멍하니 있던 내 앞으로, 끝내 실비아의 우려대로 발을 접질려 넘어지려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당돌하게도 내 앞길을 가로막고, 맨들거리는 돌멩이 하나를 선물해 주었던 그때의 그 조그마한 소녀다.
"...!"
저절로 그곳으로 팔을 뻗게 되었지만, 거리는 닿지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으니 제때 닿을 리 없다.
하지만 곁에 있던 실비아의 팔은 민첩하게 뻗어져 나가 그 소녀가 쓰러지기 전에 무사히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넘어지면.. 다쳐, 아파... 조심해."
"으응.. 언니, 고마워!"
비식 한숨을 내뱉고, 어색하게 들어올려진 팔을 제자리에 늘어뜨린 나는 다시 두 소녀가 어울려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이 마을의 이들이 나를 멋대로 소테르, 구원자라 믿고 부르는 탓인지 일행인 실비아가 수인이든 어떻든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괜찮은 모양이다.
"사실 신탁이든 용사든.. 저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문득 내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바깥에 내놓은 것처럼 다시 말을 걸어온 마을의 노인은, 내 옆에 서서 마찬가지로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저희는 소테르 님이 건네주신 이 작은 구원으로 이미 일상의 행복을 되찾았으니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더니, 흘려듣기에는 부담스럽게 귀에 걸리는 구원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묻고 말았다.
".. 정말 이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하늘은 여전히 어둡지만, 저 아이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밭을 가는 아들딸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저렇게나 밝지 않습니까."
"..."
노인의 말대로다.
살고 있는 이들도 얼마 되지 않는 이 작은 마을에는 이상할 만큼이나 생기가 느껴진다.
"허허허.."
노인은 흐뭇하게 웃어 보이며, 말린 과일들이 담긴 작은 바구니 하나를 내게 건네왔다.
"마물의 이빨을 두려워할 일도 없고,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날붙이를 들이댈 일도 없고, 자식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느껴집니다... 이것이 구원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던 나는, 결국 그 대가 없는 선의를 거절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