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17. 다시 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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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다시 길 위(3)
"그 아이랑은 언제 친해진 거지?"
쫑긋!
처음에는 내게도 잘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던 귀와 꼬리를 숨기지도 않고, 뛰어놀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 별 의미 없이 물은 말이었다.
"아니.. 그 아이가 먼저... 그러니까.."
그런데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니 없던 관심까지 생겨나고 만다.
귀끝을 가만두지 못하고 연신 앞뒤로 펄럭거리면서 무언가를 숨기듯 한 쪽 팔을 부자연스럽게 등 뒤로하고 있는 걸 보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싶다.
"등 뒤에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앗.."
설마 들킬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이 소녀에게 지금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그대로 비춰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니까.. 그 아이가... 소테루..? 님이랑 친구냐면서.."
".. 음."
..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알 것 같다.
머리 양옆이 살짝 당겨왔지만 그리 불쾌한 느낌도 아니었고, 오히려 뭐랄까..
"그래서.. 이야기하다가... 같이 놀아달라고 해서.. 기뻐서..."
... 말을 내뱉을 때마다 실비아의 뾰족한 귀가 고개와 함께 아래로 힘없이 늘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우선 괜한 오해부터 피하기로 했다.
"딱히 너를 탓하고 있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넌 그 아이가 넘어질 뻔한 걸 지켜주기도 했으니까."
"... 아."
"중간부터는 너도 꽤나 즐거워 보이길래 내버려 뒀다만.. 괜한 참견이었나?"
"아니..! 참견.. 아니야, 그러니까, 응.. 고마워...!"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올 만큼이나 꼬리를 붕붕 휘두르면서 저렇게 적극적으로 대답을 해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려준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단순히 저 마을이 이상한 것뿐인지도 모르겠지만..내가 바라고 있는 내일은 대강 그런 모습이었지.
그래서 괜히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손은?"
"아... 으응.. 여기."
조금 망설였지만, 실비아가 꾹 쥐고 있던 손을 펴자 그 손바닥 위에는 당장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과 비슷하게도 예쁜 모양으로 맨들거리고 있는 돌멩이 하나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 이건?"
"선물... 받았어."
이미 먼저 비슷한 선물을 받은 입장이다 보니 저 돌멩이가 그 아이가 준 선물이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의문을 가지고 괜히 한 번 더 물어본 이유라면, 굳이 저걸 내게서 숨기려 한 그 의도가 궁금했을 뿐이다.
잠깐.. 설마.
"설마 너.. 부끄러워하는 건.."
"..."
붕붕 휘둘러지던 꼬리가 단번에 멈춰서서 늘어지고, 귀는 쭈뼛하고 꼿꼿이 세워져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처럼 실비아의 깨끗한 뺨 위로 연한 홍조가 떠오르는 것까지 보게 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이 열리고 비식하고 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 흐.."
"...?"
"흐하.. 아... 아하하.."
황당함과 더불어 여러 낯선 감정들이 뒤섞여 툭 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흔치않은내이상행동에 실비아의 투명한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기에, 곧장 헛기침을 하고 분명 이상했을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지만.. 이미 다 봤겠지.
"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네가 아직 어린애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떠올렸거든."
그야 당장 겉모습만 보더라도 어리지만, 여태까지 그녀가 내 앞에서 보여준 행동들은 새로운 것이나 신기한 것을 보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일찍 철이 들어 있는 그런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 평범하게 부끄러워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꽤나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아.. 괜히 숨이 차네. 그건 잃어버리지 않게 안주머니에 잘 넣어두고."
"응..."
아직 홍조가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실비아를 보고 있자니, 바실리카를 나서고부터 여태 하고 있었던 걱정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후.."
어차피 신탁에 따르기로 결정한 이상 운명은 어떻게든 나를 종착지로 데려다줄 거다.
그러니 나는 그 거대한 흐름에 굳이 거스르려 할 필요도 없이... 단지, 내 손에 쥐여진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의지를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준비를 게을리 할 생각은 없었던 만큼,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딜런이 해준 말들을 곱씹었다.
'며칠 전 새롭게 찾아온 난민들에게서 넘겨듣기 힘든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아무래도... 사절단을 보낸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던 모양이라..'
시기라면 그야 왕도 내에 역병이 퍼진 상황이니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딜런이 뒤이어 말해준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이유였다.
'저희 쪽에서 보낸 사절단은... 저항군으로 몰려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모르부스는 힐타인 왕가의 통치 아래 있었을 것이다.
사방이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왕도 모르부스로 도망쳐온 귀족들 때문에 왕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평범한 주민들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난민들의 말에 따르면, 처형을 지시한 건 황제입니다.'
갑작스럽게 모르부스를 제국령으로 선포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나타난 새로운 통치자.
제국령의 선포를 인정할 다른 국가들이 남아있지 않은 지금이야 그런 선포는 단순히 벽에 대고 하는 말 따위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어진 건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 그 많던 귀족들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처형시키고, 모르부스의 중앙광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시체를 분쇄기에 갈아 돼지 먹이로 주는 만행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왕가가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귀족들은 여태 자신들의 창고와 침실에 쌓아올린 금은보화만큼이나 많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심판의 날 이후 모르부스로 모여들어온 그 수는 왕가를 수호하는 군의 세력을 아득히 넘어서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렇다면 새롭게 나타난 황제는 누구이며,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만약 암투 끝에 승리한 귀족이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라면 같은 귀족들의 시체를 욕보이는 짓을 할 리가 없다.
그건 스스로의 혈통이 지닌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과 같았고, 이는 그들에게 있어 목숨을 빼앗기는 것보다도 끔찍하게 여기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 귀족들의 귀찮고 성가신 본성에 대해서는 그녀 덕분에 얕게나마 지식이 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그렇다고 왕가에서 그 많은 귀족들을 단번에 어떻게 했다고 하기에는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케라에서 가장 넓은 영토인 베헤멘티아는왕가가 홀로 그 넓은 땅과 국민들을 다 통치할 수 없었으니 귀족들과는 필연적으로 서로 공생하면서도견제하는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귀족들은 각자의 영토에서 왕처럼 군림했으며, 왕이 허락하지 않은 영토싸움을 벌이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 그들이 모르부스라는 한 장소에 모조리 모여들었다.
끔찍하게도 말이다.
100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 살아있던 귀족은 눈치껏 큰 세력을 지닌 귀족에게 귀의하여 목숨을 의탁한 이들이나, 경쟁을 포기하고 평민들 틈으로 섞여들어간 이들 뿐이겠지.
물론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전부 돼지의 창자에 담겼다는 이야기지만..
귀족들의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평민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모르부스의 상황에서는 그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일도 결코 없으니 왕가가 함부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무너진 균형은 내전을 일으키고, 그 결과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승리한 귀족 세력에 왕가가 잡아먹히는 것 이외에는 없다.
다만..
'저항군'
그리고, 그들과 대립하는 것이 처형당한 귀족들이 아닌 '황제'라는 구도는 또한 의문스럽다.
".. 서두르자."
"응."
사절단에는 내게 쓸데없이 말을 걸어왔던 호세르라는 젊은 사제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된 걸까.
정말 이미 모두 목숨을 잃은 걸까.
대체 모르부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젠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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